【연구발표회 후기】한국의 위인 만들기와 그 역사
김인호(중세사 1분과)
□ 일시 : 2009년 9월 26일(토) 오후 2시
□ 장소 : 대우재단빌딩 8층 세미나실
□ 사회 : 이동인(서울여대)□ 발표 :
1. 총론 ‘현대 위인전의 형성과 유포’/ 이신철(성균관대)
2. ‘근현대 김유신 관련 기록에 나타난 역사적 인식 변화’/ 고현아(가톨릭대)
3. ‘정몽주 숭배의 변화와 위인상’/ 김인호(광운대)
4. ‘역사 속의 박문수와 위인으로의 형성화’/ 심재우(한국학중앙연구원)
5. ‘안중근 이미지의 고착화와 아동용 위인전에 반영된 안중근의 모습’/ 김대호(국사편찬위원회)
□ 토론 : 배경식(역사문제연구소), 손병규(성균관대)
이번 발표회의 주제는 학술적인 것만이 아닌 대중들에게 친숙한 위인전을 골랐다. 본래 이 주제는 올 해 전국역사학 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작년 가을에 역사학 대회 참여할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선택되었던 것이다. 당시 ‘영웅’과 관련된 주제를 논의하다가, 우리 모두가 어릴 때 읽게 되는 위인전의 모습과 이념, 그리고 변화상을 살펴보자고 얘기가 모아졌다. 그 결과 각 분과에서 한 명의 발표자와 위인을 한 명 씩 선정하였다. 따라서 이번 발표는 연구회의 특정 연구반이 아닌 각 분과를 아우르는 임시 연구반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올 해 전국역사학 대회가 치루어졌지만, 이 주제는 발표되지 않았다. 한국역사연구회 등의 몇 연구단체가 전국역사학 대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발표를 준비해야 할 발표자들에게 발표 연기처럼 쾌재(?)를 부를 만한 사건은 없다(이 글을 쓰는 저만 그랬다면 다른 분들에게는 죄송하다). 덕분에 이 발표는 공중에 뜰 뻔 했지만, 이미 뽑아든 칼이라 칼집에 그냥 넣을 수 없다는 식의 논리에 결국 9월에 연구 발표회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연구발표회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발표인원이었기에, 한 분과에 한 명으로 발표자를 줄이기로 했다. 이 때문에 처음 선정되었던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발표에 빠지기도 했다. 이신철은 현대 위인전에 대해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는 위인전 연구를 역사학계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인물 연구에 대한 방법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1945년 이후 위인전의 출판 흐름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에 따라 인물 선정의 문제와 역사적 고증에 대한 고민을 현재의 문제의식으로 우리에게 던졌다.<그림 1> 위인전 고현아의 발표는 고대 영웅인 김유신을 다루었다. 특히 근대 역사소설과 현대 위인전에 나타나는 김유신의 이미지가 발표의 초점이 되었다. 근대 시기 김유신은 영웅과 국가와의 만남이란 측면에서 강조되었으며, 당시 작가들은 김유신을 통해 당시 국가의 어려움을 구할 영웅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 1945년 이후에는 김유신이 화랑과 관련해 강조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충·효의 이념을 확산시켜 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 속에서 이미지를 만들어 갔다.<그림 2> 김유신 동상(출처: 경주문화관광 ) 김인호는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를 다루었다. 정몽주는 유교의 충을 실현한 대표적 인물이지만, 조선왕조 초기에는 비판적이었다가 태종대부터 평가가 변화하였다. 특히 조선후기부터는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크게 존중하는 인물로 바뀌게 된다. 그 결과 정몽주의 죽음과 관련된 선죽교 전설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위인전은 이를 담은 19세기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이다.<그림 3> 정몽주 초상(출처: 문화재청 ) 심재우는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를 발표 대상으로 했다. 사실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활약한 기간이 몇 개월 뿐이지만, 그가 암행어사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까닭을 이 발표에서 밝히려 했다. 박문수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관찬 자료는 많지 않으며, 당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던 편이다. 또한 야담집에 실린 박문수의 얘기는 정의의 사도와 좀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박문수 이미지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4> 박문수 초상(출처: 문화재청 ) 김대호는 안중근의 현재 모습이 ‘극일(克日)’의 상징으로만 남아 있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따라서 이번 발표에서는 안중근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과정과 인식 변화를 살펴보았다. 일제 하에서 안중근의 이미지는 주로 신문기사와 각종 소문으로 알려졌다. 또한 추모하려는 열기가 높았다. 또한 그에 대한 전기와 문학 작품이 등장하였다가, 1945년 이후 그에 대한 자료가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현재 안중근에 대한 아동도서는 출생과 어릴 시절이 전설처럼 묘사되며, 안중근과 김구, 안창호의 관계가 한 책에 동시에 나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결국 안중근은 박제된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그림 5> 안중근 의사 행적도(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 토론은 종합토론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손병규는 위인을 얘기하는 논리의 측면과 인물사 연구의 과제를 중심으로 토론하였다. 전자와 관련해 근대국가 형성에 위인이 필요하다는 이념적 측면 속에서 특히 충과 효의 이념이 충돌을 해결하는 논리에 대해 질의했다. 요컨대 위인전 서술에서의 양 이념의 강조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의 문제였다. 또한 인물사 연구의 방법으로 새로운 인물연구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두 번째로 배경식은 이번 발표에서 위인선정과 인물선정의 기준에 대해 물어보았다. 특히 국가주도의 영웅이 중심인데, 이번 발표에서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등과 같은 중요한 인물이 빠졌음을 지적했다. 아울러 현재 출판 시장에서 위인전이라 부르는 것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발표가 대중적 소통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발표형식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이번 발표는 연구회 역사상 처음으로 파워포인트를 이용하여 발표가 이루어졌다. 발표 주제가 대중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준비한 것이다. 시각적인 발표였기에, 학술적 내용보다 강의에 가까운 형식을 띄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발표회 날이 추석에 가까웠고, 각 학회가 많았던 탓인지 발표를 들은 인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일반인들의 참여가 적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이 있었다. 또한 출판사에 근무하시는 분을 토론자로 선정했는데, 발표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발표회가 끝난 후에 가졌던 뒷풀이에서의 얘기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논의된 것은 발표의 형식과 주제가 좋았기 때문에, 역사대중들에게 강의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또한 연구회에서 ‘인물사 연구반’을 새로 만들어 회원들에게 참여를 독려하고, 미진했던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어이쿠,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뒷풀이를 가지 말아야 하는 건데). 그래서 우리의 발표회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고 숙제로 남아 있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