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후기】《三國遺事》를 통해 본 고대의 종교와 신앙
대표집필: 고현아(고대사 분과)
- 일시 : 2009년 4월 25일(토) 1시 30분
- 장소 :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 발표 : 습속연구반
- 사회 : 박미선(대림대)발표⑴ 7세기 고구려의 민간신앙
발표 : 김지영(숙명여대)
토론 : 문은순(한성백제박물관 건립추진단 전문연구원)⑵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에 보이는 ‘귀중(鬼衆)’의 실체
발표 : 남무희(국민대 강사)
토론 : 김병곤(동국대 강사)⑶ 신라 선도산 성모신앙의 의미와 변화
발표 : 김선주(상명대 강사)
토론 : 채미하(경희대 학술연구교수)⑷ 신라의 불교 수용과 왕실 여성 - 永興寺 창건과 여성승관제를 중심으로
발표 : 이현주(성균관대)
토론 : 강영경(숙명여대 강사)
1.
습속연구반은 2003년 고대사분과에서 습속사 학습반으로 개설되어 2006년 습속연구반(이후 습속반)으로 전환하였다. 처음 학습반명을 정하는 과정에서 연구자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습속(習俗)은 “습관이 된 풍속”, “전통적인 사회적 관습, 제도”등으로 정의된다. 습속과 관습은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는 개념이다. 습속이란 관습처럼 사회적 규범의 의미를 가지면서 여기에 특히 신앙과 관련한 것으로, 제사나 제례 또는 이와 관련된 각종 의례나 관례에 초점을 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습속반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한국 고대의 신앙과 관련한 습속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습속반”이라는 반명을 결정하였다.
습속반에서는 그간 다양한 서적을 읽고 토론을 하는 방법으로 세미나를 진행시켰다. 특히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 분야에 많은 연구를 집적했던 서양의 다양한 이론 서적들은 한국 고대사에서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2.
그러던 중 2005년에서 2006년까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강독하는 작업은 고대 습속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사실 기존 연구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불교를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 삼국유사(출처: 문화재청 )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강독하는 과정에서 불교적인 자료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에서의 다양한 신앙 형태와 이와 관련한 습속의 모습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기존에 읽었던 많은 서적의 이론들에서 시사 받은 바가 크다. 이에 습속반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습속반의 공동 연구주제로 정하고, 고대사회에서의 다양한 종교와 신앙의 모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발표의 제목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본 고대의 종교와 신앙”으로 결정하고 총 네명의 발표자가 결정되었다. 발표회는 2009년 4월 25일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이루어졌다. 발표회 당일 사회는
박미선 선생님께서 맡아 주셨으며, 사회자의 개회로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는 발표에 앞서 습속반의 반원 현황 및 연원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또한 발표회 축사는 현 고대사분과 분과장이신 정동준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습속반 소개 및 축사가 끝나고 곧바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3.
첫 번째 발표는 7세기 고구려의 민간 신앙이라는 주제로 김지영 선생님이 발표해 주셨다. 7세기 고구려에는 이미 유교와 불교, 한대(漢代)의 도교 이외에도 다양한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연개소문에 의해 당(唐) 왕실에서 받들어지고 있었던 새로운 경향의 도교가 수입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당시 특별히 ‘신인(神人)’이라는 공동 어휘로 표현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산과 관련된 용례로 등장하고 있다. 당시 삼국에서는 모두 산악 숭배 및 제사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산악 숭배는 초기의 교단 도교가 고구려에 유입되기 전부터 고구려의 고유 신앙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산악숭배 신앙은 지배층 보다는 민간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신인(神人)으로 표현되는 인물은 산악숭배와 관련된 대중적인 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신인(神人) 세력이 연개소문 정권에 반대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처럼 연개소문 정권에서 이반해 나간 세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불교를 비롯한 이러한 대중적인 신앙을 믿는 집단의 이반은 결국 고구려의 역량을 약화시켰을 것이며, 이것이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발표의 토론은 문은순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우선, 토론자는 내용구성에 대해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뒤, 논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언급하였다. 우선, 논문에서 필자가 민간신앙, 전통신앙, 고유신앙, 대중적 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들을 사용할 때 어떠한 차이가 있는 지에 관한 점이다. 또한 고구려 말기에 산악신앙 외에도 기존의 토착신앙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과, 이러한 토착신앙의 제재가 고분벽화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관련해 산악신앙만이 아닌 고분벽화자료에 보이는 토착신앙의 여려 제재를 모두 아울러서 고구려 말기 토착신앙이 기존 신앙과 융합되어 전개되는 양상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도교 사상을 강화하려는 고구려 후기의 정국 변화 속에서 평양ㆍ안악지역과 집안ㆍ환인 지역의 기존 신앙세력이 대응한 양상 차이를 고분 벽화자료를 통해 추출해 낼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민간신앙은 대중적 신앙으로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용어 정리의 필요성에 대한 지적을 인정하였다. 나머지 지적들은 모두 고분 벽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선, 벽화고분에서 나타는 제재들을 모두 도교적 제재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신앙과도 연결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앞으로 고분벽화에서 토착신앙 부분을 추출해서 강화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4.
두 번째 발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도화녀비형랑〉조에 보이는 귀중(鬼衆)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남무희 선생님이 맡아 주셨다. 이 논문은 도화녀비형랑조의 기록에서 말하고자 하는 역사적인 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다. 진지왕은 재위 3년간 큰 무리없이 정치를 하였지만, 4년 2월에 백제 위덕왕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진지왕은 사량부의 도화녀 세력과 손을 잡고자 하였지만 거절당하고 7월 17일에 폐위되거나 죽었다.
<그림 2> 진지왕릉(출처: 문화재청 )
그러나 진지왕은 결국 도화녀 세력과 손을 잡는데 성공하였고,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에 태어난 비형랑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귀중(鬼衆)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진평왕은 왕이 된 후 자신의 기족을 석가모니의 집안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진지왕의 아들인 비형랑(용춘)은 진지왕의 아버지인 진흥왕의 전륜성왕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진평왕으로 이어지는 동륜계와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전륜성왕으로 상징되는 인도 아소카왕의 모습을 용춘은 모방했을 것이다. 이때 귀중(鬼衆)에서 중(衆)은 비구와 비구니가 수업전도를 하기 위한 화합단체로 추정하고, 비형랑이 거느리고 있었던 귀중과 김용춘이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동원했던 장인(匠人)은 동일한 성격을 갖는 집단으로 보았다.
두 번째 발표의 토론은
김병곤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토론자는 동륜계와 사륜계를 반드시 대립과 갈등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하였다. 또한 김유신 세력을 사량부에 세력기반을 두고 있다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논문의 구성 분량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귀중의 해석에 더 집중할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이외 청중토론이 이어졌는데, 귀중(鬼衆)을 도교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한 것과 신라에서 기시(棄市)라는 형벌이 있었던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발표자는 논문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동륜과 사륜계의 대립관계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나머지 의견에 대해서는 이후 논문 수정에 반영하겠다고 답변하였다.
5.
10분의 휴식 뒤 세 번째 발표가 진행되었다. 발표는 신라의 선도성모(仙桃聖母) 전승과 선도산(仙桃山)의 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김선주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승되는 선도성모 전승은, 신라에 토착적인 선도성모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선도성모는 선도산에 대한 인격화된 표현으로, 신라의 선도성모 숭배는 선도산의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선도산을 구체적으로 신라 초기 사로 육촌 중에 하나였던 돌산고허촌(사량부)의 진산으로 보았다. 돌산고허촌은 신라의 선주 토착세력으로, 사로국 단계에서 경주일대의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이 단계에서 돌산고허촌의 진산이었던 선도산이 사로국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성장과 함께 혁거세로 대표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돌산고허촌의 독자적인 시조전승과 제의체계는 혁거세를 중심으로 하는 건국신화와 국가제의 속에 편입되었다. 돌산고허촌의 진산으로 사로국 단계에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던 선도산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오악의 하나인 서악으로 위상이 변화되었다. 통일 이후에는 산천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체계인 삼사 가운데 소사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위상이 변화되었다.
이 발표의 토론은
채미하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토론자는 우선 선도산의 기록에 대한 저본자료를 정리한 필요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두 번째로는 선도산 일대에 선사 유적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주시내 보다 선도산 일대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면,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마지막은 3장의 제목이 선도산의 역사적 성격과 변화인데 선도산의 위상 변화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지만, 선도산의 역사적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발표자는 우선 선도산과 관련한 저본자료의 분석은 추주 보완 할 것이라 답변하였다. 두 번째 선사유적과 관련해서는 논문에서 선도산 기슭에는 성혈이 새겨진 바위가 발견 된 것, 선도산 근처의 금장대에 있는 암각화 등이 발견, 이외에도 선도산 자락인 충효동, 효현동, 광명동, 율동 등지에서 고인돌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했다고 설명하였다. 선도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사로국 단계에서는 경주 시내보다 지금 선도산 지역이 더 중심이었으며, 당시 단위정치시기에 성산으로 인식되었다는 측면을 들었다.
6.
마지막은 신라의 불교 수용과 왕실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이현주 선생님께서 발표해주셨다. 불교 전래기에 왕실 여성은 기존 토착신앙의 상징이었다. 왕녀(王女)의 병을 기존의 무의(巫醫)가 아닌 승려가 불법으로서 치유한다는 것 자체로도 토착신앙의 사제로서의 왕녀의 위상을 하락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왕녀의 병을 치유한다는 행위가 천경림(天鏡林) 등의 성소(聖所)에 사찰을 건립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갈등과 그에 따른 불법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상고기의 왕비 시조묘제의 제의 주관자로서 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을 담보하였던 존재였던데 반해, 법흥왕과 진흥왕의 비들은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주지함으로서 왕권의 신성성과 정당성에 기여하고 있었다. 또한 진흥왕 11년 흥륜사 창건 후 실무관료적 성격의 초기(初期) 승관조직(僧官組織)이 이루어졌다. 이 중 도유나낭(都唯那娘)과 아니(阿尼)로 이루어진 승관직(僧官織) 역시 창설되었는데, 이는 법흥왕비와 진흥왕비가 주지하고 있던 영흥사의 니승(尼僧) 및 운영의 총괄을 맡고 있던 승직이었다. 이러한 영흥사의 도유나낭(都唯那娘)과 아니(阿尼)들은 왕실여성들로서 구성되었고, 특히 처음 도유나낭(都唯那娘)에 임명된 이는 지소부인이었다. 진흥왕은 섭정에서 물러난 그의 모(母)인 지소부인을 위해 니승(尼僧) 조직의 총책임자로서 도유나낭(都唯那娘)의 직을 신설했을 뿐만 아니라 니승조직(尼僧組織)의 총 본산인 영흥사의 운영을 일임함으로써 예우하고자 했던 것이다.
발표에 대한 토론은
강영경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토론자는 우선 왕녀가 주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와 관련해 토착신앙 사제로서 왕녀의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병이 치유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왕녀의 주체적 역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도유나랑의 승관직 창설 배경과 관련하여 진흥왕이 어머니인 지소부인을 예우하기 위해 승직 관료서의 실무직에 임명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외 회장 내에서 왕실내에서 왕녀, 왕, 불교세력의 정치적 성격이 다를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또. 진흥왕대 섭정의 주체는 법흥왕비로 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그림 3> 진흥왕릉(출처: 문화재청 )
이에 대해 발표자는 토론자의 지적에 대해 대체적으로 수용하며, 이후 논문 수정 시 반영하겠다는 답변을 하였다. 이외 소지왕대 신궁성립을 계기로 왕과 왕실 여성의 간극이 생겨났다는 점, 진흥왕의 왕태후 문제에 대해서는 진흥왕의 모인 지소태후의 견해를 받아들였음을 설명하였다.
7.
발표는 비가 오는 날임에도 많은 선생님들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다만, 시간관계상 종합토론이 생략되어 더 많은 선생님들의 고견을 듣기 힘들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간 많이 논의되지 않았던 한국 고대의 습속이라는 주제로 공동발표를 할 수 있었던 점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습속이라는 분야로 많은 관심과 다양한 연구들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