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으로 - 여말선초, 단절인가 계승인가』(2019, 역사비평사)

BoardLang.text_date 2019.07.22 작성자 정요근
 

우리 책을 말한다



발전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고려-조선 왕조 교체의 의미를 살펴보다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 여말선초, 단절인가 계승인가』, 역사비평사, 2019)


 

정요근(중세1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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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고 한국사의 발전적 성격을 탐구하는 발전론적 역사 인식이 오랫동안 한국사학계를 이끌어왔다. 발전론적 관점에서는 한국사 전개의 중요한 계기로서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에 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개창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발전의 큰 성취를 이룬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발전론적 역사 인식에서는 조선왕조 건국의 주도 세력으로서 신진사대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은 신진사대부는 국가 재정의 확충, 중앙 집권체제의 정비, 불교계의 폐단 일소 등의 각종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개혁 세력이자, 권문세족의 통치로 대표되는 고려 후기의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의 모순들을 극복한 진보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대안 세력으로서 신진사대부가 등장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한국사에 있어서 커다란 발전의 계기로 이해되었다.
나아가 이른바 ‘급진파 사대부’는 신진사대부의 이념적 기반인 성리학에서 혁명적 요소를 추출하여 실천에 옮긴 역사 흐름의 선도자이자 혁명가로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를 이해하는 기본 사료인 『고려사』 자체가 조선 개창 세력의 시각에서 편향적으로 서술되었다는 점 역시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를 분절적으로 보는 계기를 제공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근래의 많은 연구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를 발전론적인 관점만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신진사대부가 기존의 권문세족과 구분되는 세력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는 이미 예전부터 지적된 바 있으며, 조선왕조 개창을 주도한 이른바 ‘급진파’ 사대부가 온건파 사대부와 차별화되는 성리학 사상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연구도 나왔다. 실제 조선 태종 연간 이후에는 권근 등 ‘온건파’ 사대부의 가치가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정계를 전면적으로 장악하는 사림 세력 역시 ‘급진파’ 사대부가 아닌, ‘온건파’ 사대부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국가 통치와 제도 운영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관점과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지방 사회의 편제에 있어서 고려의 주현-속현 제도가 붕괴하고 지방 향리의 영향력이 약화하는 현상은 이미 몽골 복속의 시기부터 보편화하였음이 지적되었다. 아울러 조선 건국 세력이 야심 차게 추진했던 토지 개혁이나 노비 변정 사업 등도 고려 후기부터 진행되었던 대토지 소유나 다수의 노비 소유 현상을 막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소지를 제공하였다. 국가의 재정 구조 역시 고려 후기나 대동법 실시 이전 조선 시대는 모두 공물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비 조달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
외교나 국제 관계의 면에서도 과거의 견해와는 차별적인 관점의 연구들이 근래에 다수 발표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선이 명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의 일부라는 생각을 보편적으로 가졌던 것은 고려의 몽골(원) 복속 경험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명과 조선 사이의 외교적, 의례적 관계의 형성과 유지 역시 과거 몽골(원)과 고려 사이의 관계가 주요한 기준이 되었음이 강조되었다. 또한, 몽골 복속기 고려의 지배층이 몽골(원)의 문물을 보편문화의 기준으로 상정하였다면, 조선의 지배층은 원을 계승한 명의 문물을 보편문화의 기준이라 생각하였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불교사 연구 역시 인상적이다. 조선의 개창을 유불 교체의 결정적인 근거로 이해하던 기존의 통설을 비판하는 다양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적어도 15세기까지는 고려의 불교 전통이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 있었다는 근거들이 여러 측면에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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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이상의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 연구논문들을 수록하였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논증이 포함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이미 발표되었던 연구성과들의 논지를 정리한 글들로 구성되었다. 본서의 논문들은 지난 2017년 가을호부터 2018년 가을호까지 5회에 걸쳐 『역사비평』에 기획논문으로 게재된 바 있다. 본서는 전체 16편의 논문을 5부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1부에서는 국가운영을 주도하였던 정치세력과 그들이 이념적 도구로 삼았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한 논문 3편을 실었다. 송웅섭은 강남 농법을 도입하고 신유학을 수용한 지방의 재지사족이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로 성장하고 조선 시대 사림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권문세족과 훈구파를 수구적인 존재로, 신진사대부와 사림파를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존재로 설정하는 이분법적 인식의 극복을 주장하였다.
강문식은 고려 말의 사대부들이 정치적인 면에서는 두 가지 흐름으로 분기되었지만, 두 흐름이 처음부터 각기 전혀 다른 경향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학문·사상의 지향이 서로 달랐다고 보는 관점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급진파 사대부와 조선 건국을 반대한 온건파 사대부 사이에 정치적 지향을 제외하면 학문적으로는 본질적인 차이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최봉준은 원 간섭기 고려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의 독자적 역사 인식이 약해지고 유교적 교화의 상징인 기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단군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색 계열과 기자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정도전 계열의 갈등이 있었으나, 양자의 분열은 조선 초기 권근에 의해 단군에 대한 의미가 강조되는 형태로 봉합되었음에 주목하였다.
2부에서는 지방 편제, 노비 제도, 토지 제도, 재정 운용 등 통치 체제의 개편과 관련된 4편의 글을 실었다. 정요근은 지방 사회의 편제와 운영의 측면에서 원 간섭기부터 16세기 사림의 집권에 이르는 약 300년의 기간을 연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시각은 조선의 개창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변화의 동력을 제공한 사건이 아니라, 원 간섭기 이래 진행되던 변화와 개편을 제도적으로 공고히 했다는 역사적 계기라는 입장에 기반한 것이다. 고려 특유의 주현-속현 제도는 대몽항쟁기에 사실상 붕괴하였으며, 원 간섭기에 수립된 수령 중심의 군현 통치 정책은 조선 초기에 더욱 공고해졌다가, 16세기 중반 이후 사림의 집권이 확고해지자 재지 사족 중심의 향촌 자치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고 파악하였다.
박진훈은 조선 초기에 시행된 노비 정책을 고려 후기 전민변정의 연장선에서 검토하였다. 그에 따르면, 조선 건국 후에 노비주 사이의 소유권 분쟁을 막기 위한 노비 법제의 정비가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이루어져 노비 지배를 둘러싼 지배층 사이의 갈등이 상당히 완화되었지만, 노비주가 노비를 안정적으로 소유하고 상속하는 데에 기본 토대가 되었던 노비 세전과 일천즉천의 원칙은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음에 주목하였다. 즉 조선의 개창은 고려 후기 이래의 노비 문제 해결에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이민우는 고려 말 조선 개창 세력에 의해 주도된 사전 혁파는 경작이 동반되지 않는 토지 소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나 노비 인구의 확대를 제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보았다. 토지 제도의 개혁과 더불어 호적 제도의 개혁이 동반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토지 소유자들은 호의 구성원으로 은닉한 대규모의 사적 예속인을 활용하여 과거의 사전을 세습할 수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조선 건국 이후 노비 인구의 급속한 증가라는 역사적 현상이 나타났음에 주목하였다.
소순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재정 구조가 공물을 통한 관서의 경상비 조달이라는 측면에서 뚜렷한 공통점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인 태종 연간부터 공납제의 개편을 진행했지만, 공물을 중심으로 한 고려 후기 이래의 국가의 경상비 조달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정부 관서의 경상비 예산을 공물로 조달하는 시스템은 대동법 수립 때까지 그대로 계승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였다.
3부에서는 세계 인식과 국제 관계를 주제로 한 3편의 글을 실었다. 최종석은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갖고 있던 고려 사람들이 고려의 원 복속과 성리학 도입을 통하여 자신을 이(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을 내향화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인식은 조선왕조 개창 후에도 계승되어, 조선이 중국과 구별되는 국가이면서도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 속의 제후적 존재라는 천하 인식으로 나아갔다고 이해하였다. 즉 조선 시대 유자들의 보편적인 천하 인식이 성립되는 기원과 계기를 고려의 원 복속에서 찾은 것이다.
이명미는 황제의 성지(聖旨)를 통하여 여말선초의 정치와 외교 환경을 분석하면서, 명의 등장 이후 고려(조선)에서 명 황제권의 역할은 국내의 정치세력들이 자기 정당성이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기대는 정치적 권위로 한정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명 황제의 성지가 조선의 정치 세력에게 실질적인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현상은 이전 몽골-고려 간 관계에서 몽골 황제의 성지가 고려의 권력 구조 최상위에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임을 강조하였다.
정동훈은 몽골(원)의 붕괴 이후 고려(조선)와 명의 관계를 몽골(원)의 유산 상속 분쟁의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명은 천하 유일의 패권국가로서 몽골(원)이 갖고 있던 예제적 지위를 계승하여 고려 등 주변 국가로부터 인정받고자 했으며, 고려(조선)는 예전 몽골(원)과의 관계를 근거로 삼아 그러한 명의 의도에 자발적으로 부응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명과 고려가 요동과 한반도 북부, 제주도 등의 영토와 인호 귀속권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한 것을 두고서, 과거 중국의 영역에 속하지 않다가 새로이 몽골(원)의 판도 안에 들어왔던 지역에 대한 양국 간 상속 분쟁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그리고 1388년 위화도 회군을 그러한 분쟁이 일단락된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보편문화의 수용과 대외 정책의 전개를 주제로 한 4부에서는 관복제의 변화, 역서(曆書)의 반사(頒賜), 대외 정벌 등을 주제로 한 3편의 논문을 수록하였다. 김윤정은 고려와 몽골(원)과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고려 사람들이 몽골(원)을 문화의 중심인 중화로 인식하고 몽골풍의 관복제를 도입하였음에 주목하였다. 몽골(원)을 대신하여 명이 등장한 후 조선의 집권층이 몽골풍의 관복제 대신 명의 관복제를 받아들인 사실을 두고, 몽골(원)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의 집권층이 상정한 보편문화의 적용이 명과의 관계 속에서 조선의 집권층에게 그대로 계승된 결과로 이해하였다.
서은혜는 중국왕조의 고려와 조선에 대한 역서(曆書) 반사(頒賜)의 측면에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연속성을 고찰하였다. 그에 의하면, 고려 전기에는 중국 왕조의 고려에 대한 역서 반사가 정기적이지 않았고 책봉과 결부되지도 않았으나, 몽골 복속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정례적으로 해마다 천자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명에서도 조선에 매년 역서를 반사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자국의 역서가 명의 역서와 합치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굳건해졌다. 즉, 중국왕조로부터의 역서 반사를 몽골 복속기 이래 정례화된 현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검토한 것이다.
이규철은 15세기 조선의 대외 정벌이 공민왕 때의 정책을 모범으로 하여 진행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대외 정벌의 측면에서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연속성을 검토하였다. 몽골 복속기와 조선 초기의 연속성과 계승성을 강조하는 본서의 다른 논문들과는 궤를 약간 달리하는 측면이 있지만, 공민왕 때의 대외 정벌 정책이 몽골 복속기의 유산에 기인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앞서 정동훈이 제시했던 몽골 복속기 때의 유산 상속의 관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5부에서는 여말선초의 불교를 주제로 한 3편의 글을 실었다. 김용태는 정치이념과 시대의식 등에 한정하면 여말선초의 불교는 연속보다 단절의 측면이 강하지만, 조선 초기, 적어도 15세기까지 불교가 고려 시대 이래 사회 내에서 견고한 기반을 유지하던 주류의 사상적 전통으로 유지되었다고 보았다. 즉 조선 초기에도 여전히 사상과 신앙을 두 축으로 고려의 불교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16~17세기가 되어야 기존과 단절된 조선의 새로운 불교 전통이 창출된다고 파악하였다.
양혜원은 조선 초기 승려의 사회적 신분이 절대로 낮지 않았음을 역설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 법전인 『경제육전』에서 도첩의 발급 대상을 소수의 상층 양반 자제로 제한하는 등 도첩승을 상층 신분으로 간주한 점은 조선 초기에도 승려의 신분적 지위를 높은 수준으로 인정했던 근거로 보았다. 조선 초기에 승려가 군역 의무를 갖지 않았던 이유도 그들이 천민 신분에 속해서가 아니라 성균관이나 향교의 학생처럼 군역 면제를 받았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것을 강조하였다.
손성필은 조선 초기 불서 간행의 양상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불교의 연속성을 논하였다. 조선 개창 후인 15세기에도 불서의 간행량이 전혀 줄지 않았고,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모두 사찰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이 불서 간행의 주요 주체로 참여하였음에 주목하였다. 나아가 15세기 불교계는 불서의 간행뿐만 아니라 국왕의 통치 행위, 국가 승정 체제의 운영, 불교계의 규모와 저변, 간행 서적의 향유 계층 등의 측면에서 고려 시대와의 연속성에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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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소개한 본서의 글들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를 보는 하나의 통일된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본서의 논문들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시기 구분의 결정적인 기점이라는 것을 부정하며, 그 대신 고려의 몽골 복속이 변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의 몽골 복속으로부터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을 동일한 시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와, 조선왕조의 개창 대신 몽골에의 복속이 더 중요한 시기 구분의 기점이 된다는 견해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 복속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중세, 그 이후를 근세로 설정하는 구상은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사 전반에 대한 이해 속에서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가 갖는 의미를 찾아야 하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향후에 다시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또 하나, 시기에 대한 용어 사용의 문제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는 몽골과 고려의 화친 이후 시기에 대하여 원 간섭기, 원 복속기, 몽골 복속기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해당 시기 몽골(원)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가 가지는 특수하고도 복합적인 위상으로 인한 연구자들 사이의 인식과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본서에서는 연구자 각자의 견해를 존중하여, 각 논문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할 것인지는 저자의 견해와 입장에 일임하였다.
기성 학계에서는 조선왕조의 개창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 집권세력으로서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강조하고, 기존의 지배세력과 구별되는 신진사대부의 계급적 기반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정착하면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고, 중국과의 사대 외교가 새롭게 정착되는 계기로 이해하였다. 고려 시대에 미숙했던 중앙 집권체제가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게 되었다는 관점과도 연관된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발전론적 역사 인식의 영향이 짙게 드리운 결과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개창 이전과 이후에 정치, 사회, 경제 각 측면에서 뚜렷한 질적 차이가 나타났는지에 대한 실증적 검토는 기존의 발전론적 역사 인식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동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당대의 관찬 사료들에서 보이는 조선왕조 개창 세력의 역사 인식에서 한 발짝 벗어난다면, 조선왕조의 개창을 ‘과거와의 단절’ 혹은 ‘미래로의 발전’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연속’과 ‘계승’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다. 이제는 그와 같은 발전론적 역사 인식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본서의 발간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공동 필자들의 소박한 기획이 막상 단행본의 성과로 출간되고 나니,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본서의 발간을 통해 연속성의 관점에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를 바라보는 연구 시각이 더욱 확산되고 깊어질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새로운 관점에서의 연구가 활성화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풍부한 해석이 축적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후배 연구자들의 많은 관심과 비판을 기대한다. 본서의 기획에 참여한 연구자들에게도 학문적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드러낸 관점과 시각에 정교함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 본 내용은 본서 머리말(8∼19쪽)의 내용을 토대로 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