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朝鮮後期 戶曹의 財政運營 硏究 -加入ㆍ鑄錢을 중심으로(1)

BoardLang.text_date 2019.04.2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나의 학위논문



朝鮮後期 戶曹의 財政運營 硏究


-加入ㆍ鑄錢을 중심으로-


 

(2019. 2.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임성수(중세 2분과)


 

재정은 국가의 경제력과 백성의 납세 부담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면서도 국가의 정책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역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처음 접했던 조선후기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매우 특이한 나라였다. 임진왜란 이후 재정은 항상 궁핍했지만, 세율은 점차 낮아지고 지출은 점차 소략해졌다. 그 격차는 조선전기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컸다. 동일한 왕조가 지속되고, 일관적인 유가적 재정이념이 고수되는 상황에서 왜 이렇게 전기와 후기는 차이가 날까? 정말 차이가 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착시가 있는가? 만약 실제로 재정의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후기에는 부족한 재정수입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충했을까? 등등의 궁금증은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무엇보다도 조선후기에 꾸준히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다고 배워왔던 나에게 17세기 이래로 계속된 재정부족과 19세기 중반 급격한 농민 경제의 위기는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경제사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국가재정에 몰입하게 된 것은 호조의 회계 문서라고 할 수 있는 <탁지전부고>를 직접 입력하면서 부터이다. <탁지전부고>에는 알 수 없는 다양한 토지 종류와 수입ㆍ지출 내역이 다양한 물종과 구분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각각의 토지들이 갖는 의미와 역할, 여러 물종을 사용하는 이유, 그 중에서도 재정의 핵심이던 쌀과 동전의 시기별 흐름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에서 문제의식이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의욕에 넘쳐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던 연구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로 모아지기 보다는 넓어져 갔고, 해명할 과제들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무작정 펼쳐놓을 수만은 없었기에 수많은 의문과 과제들을 접어두고, 나름의 논리를 정리한 것이 바로 이 논문이다.

 

   [그림1] 탁지부전고 (저자 제공)


 

이 논문에서는 호조의 재정운영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국가재정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호조는 조선시대 재정을 총괄하는 아문으로서 평시에는 관료의 녹봉과 공물을 비롯한 각종 경상비를 책임지고, 흉년ㆍ사신방문ㆍ국가의례 등과 같은 불시 지출이 발생할 경우에 비용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17ㆍ18세기에 대형 재무아문인 선혜청ㆍ균역청이 신설되었지만,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는 두 청과 달리 호조는 국가재정 요소요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각 시기별 호조의 재정운영은 국가재정의 현황을 가장 잘 보여준다.


논문은 크게 17ㆍ18ㆍ19세기로 구분하였다. 17세기에는 임진왜란 이후 재정을 복구하는 과정과 그 결과 전기와는 달라진 재정구조를 살펴보았다. 전쟁으로 많은 진황지가 발생하고 토지대장이 소실되면서 호조의 재정운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서둘러 시행한 계묘양전에서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광해군대 재정운영은 각종 임시세에 크게 의존하였다. 인조 12년(1634) 갑술양전으로 하삼도에서만 89만 7천여 결의 원장부와 54만여 결의 시기결을 조사하여 전국적으로 130만결 이상의 토지를 확보하였다. 왜란 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했지만, 쌀과 콩 20여만 석을 매년 세입으로 거두면서 정상적인 재정운영이 가능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갑술양전으로 왜란 이후 부과되었던 각종 부가세도 폐지ㆍ견감되었다. 녹봉과 각종 지출도 감축하여 호조는 평년을 기준으로 매년 쌀 10~12만석을 거두어 경상비 10~12만석을 지출하는 구조가 갖추어졌다.

문제는 세입과 세출 규모가 빡빡하여 재정적인 여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농업의 특성상 자연재해에 따라 세입이 급감할 수 있었고, 경상비 외에도 진휼과 사신 접대 등의 큰 비용이 지출될 경우도 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의 과세지 규모로는 흉년과 불시 지출을 감당할 저축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종 말부터 혹독한 흉년을 연이어 당하면서 재정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세입은 급감한 데 반해 진휼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전국의 비축곡이 소진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특단의 조치로 동전 발행을 추진하였다.

18세기에는 동전 발행 이후 달라진 호조의 재정운영과 영ㆍ정조 연간에 추진된 재정수지 개선 대책, 호조의 권한 강화에 따른 국가재정 운영의 특징 등을 살펴보았다. 특히 주목한 점은 동전이 어떠한 원리로 가치를 부여 받았고, 계속된 주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치를 유지하였으며, 정부는 동전으로 어떻게 재원을 확보했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인조ㆍ효종대에 발행을 시도했던 동전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동전 발행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동전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부여하지 못하면서 백성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백성의 구매를 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의 경제적 여건에서 일부 상인과 부유층을 제외하면 동전의 가치가 안정적이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백성은 동전의 필요성을 느끼기 못하였고, 동전을 구매할 형편도 되지 못하였다. 동전을 만들고도 제대로 판매되지 않으면 정부는 불필요한 재원만 낭비한 것이었다.

이에 숙종 연간의 동전 발행에는 동전 가치와 구매 강제를 위한 몇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초기에는 은전(銀錢)과 비가(比價)를 정해 동전 가치를 부여하였지만, 시장가의 변동이 심하게 요동치자 은전비가를 폐지하였다. 은전비가를 폐지한 뒤에도 동전은 필요에 따라 발행되었고, 그 가치도 등락을 거듭하였다. 정부가 주조한 동전의 재고가 원활하게 판매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동전 가치의 안정과 판매 촉진을 위해 전세ㆍ대동 등과 같은 국세(國稅) 영역에 대전납(代錢納)을 시행하였다. 다만, 대전납 허용 지역은 미곡 수입의 감소를 우려하여 주로 콩이나 포목으로 부세를 납부하던 산읍(山邑)으로 제한되었다.

주전의 목적은 재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당장에 필요한 미곡을 확보하고, 일부 경비를 동전으로 지출함으로써 경비 조달을 돕는데 있었다. 당시 정부가 주전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던 대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2] 鑄錢을 통한 재정확충 개요도


 

주조한 동전은 감영과 군현을 거쳐 일반 백성에게 판매되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농민이 반드시 동전을 구매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전납이다. 농민은 부세를 납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전을 구매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그렇다고 해서 동전 납부가 농민에게 일방적인 손해였던 것은 아니다. 대전납의 시행에 앞서 정부는 동전과 미태의 절가를 정했는데, 농민도 동전을 구매해서 부세를 납부하는 것이 유리했다. 특히 곡물 값이 급등하는 흉년에는 대전납은 농민에게 큰 혜택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진휼의 일환으로 일시적인 대전납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구조에서 정부는 주조한 동전을 판매하면서 부족한 미곡도 확보할 수 있었다. 동전 판매로 얻은 미곡은 진휼과 경비에 사용하였고, 지방에 분배된 동전은 부세를 통해 다시 중앙정부로 상납되어 경비지출에 사용하거나 저축하여 불시 상황에 대비하였다.

동전의 여러 기능 중에서도 본 연구가 재정적인 측면에 특히 주목한 것은 주전의 대부분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만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재정이 안정된 상태에서는 주전을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실제 을병정대기근(숙종 21~23년)에 대규모 주전을 시행한 뒤로는 영조 초반까지 주전이 정지되었다. 강력한 폐전론자였던 영조는 주전이 정부 재정이 부득이한 상황에서 시행한 고육지책이었음을 수차례 밝히면서 동전 혁파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주전이 재개된 이유도 흉년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이었다. 이는 전술하였듯이 17세기 마련된 빠듯한 재정수지 구조에서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적자 문제를 해결할 마땅한 대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동전에만 의지했던 것은 아니다. 재정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재정의 기반이 되었던 토지세를 확충해야만 했다. 정부는 숙종 46년(1720) 경자양전을 시행하여 140만결에 가까운 원장부 결수를 확보하였고, 90만결이 넘는 과세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과세지 확충의 결실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면세결의 증가와 재결(災結) 지급으로 인해 과세 가능한 기경전이 계속해서 감소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전세 비총법을 시행하여 재결을 제한하려 하였지만, 감사의 계속된 가청재(加請災) 요구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균역법 시행기에는 대규모 은결을 색출하여 재정에 투입했다. 17세기 이래로 변통을 거듭하던 궁방전은 을해정식으로 무토 지급과 결수 제한이 시행되었고, 마침내 정조 즉위 초반 무후(無後)ㆍ대진(代盡) 궁방을 혁파하고, 규정 외 궁방전을 환수 조치하면서 성과를 거두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정부는 과세지 확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과세지의 감소 추세는 저지할 수 없었다.

지출 부문에서도 대대적인 변통이 이루어졌다. 영조 25년(1749)부터 각궁(各宮)ㆍ각사(各司)의 경비 수요를 일제히 조사하여 지출 규범을 마련하였다. <탁지정례>와 <별무어린>의 완성으로 정부는 지출을 감축했을 뿐 아니라, 예측 가능한 재정운영이 가능해졌다. 다만, 이것도 특별한 지출이 없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사례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혹독한 흉년이나 대규모 국가사업이 벌어질 경우 추가로 지출되는 비용은 여전히 대비하기 어려웠다.

18세기에도 호조의 재정수지는 특별한 풍년이 아니라면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호조의 재정운영에도 주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부족한 재정을 타 기관에서 대여하여 채우던 방식에서 무상으로 여유 있는 기관에서 가져오는 가입(加入)을 활용하는 형태가 자리 잡은 것이다. 가입과 대여의 가장 큰 차이는 대여는 말 그대로 빌려 쓴 것이기에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가입은 상환할 필요가 없는 재원이었다. 가입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단연 호조의 재정적 권한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입은 백성에게 추가로 징수한 재원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모두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지원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관청의 재정도 결국은 납세자인 농민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가입이 무분별하게 확대되어 중앙과 지방관청이 위기에 빠지면 그 부담이 농민에게 재차 전가될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다. 다만, 18세기까지 가입은 세입으로 부족한 만큼의 재원만 재정적 여유가 있는 기관에서 지원받는 형태로 제한적으로 운영되었기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주전이 재개된 것은 영조 전반 흉년을 당하면서 부터이다. 영조는 끝까지 폐전론을 고수하고자 하였지만, 흉년에 백성을 진휼할 방법이 없다는 신하들의 말에 결국 주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도 영조는 만약 주전을 한다면 동전 가치가 사라질 정도로 대규모로 시행하여 사실상의 폐전을 도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결국 주전은 당장에 필요한 재원을 얻을 만큼의 소규모에 그쳤다.

결정적 반전은 균역법 시행기에 일어났다. 균역법은 영조가 탕평ㆍ준천과 함께 3대 치적이라고 자평할 만큼 역점을 둔 사업이었다. 감필급대에 소요되는 재원은 동전으로 환산했을 때 100만냥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정부는 불필요한 지출을 감축하는 감혁을 통해 급대 수요를 대폭 줄였지만, 여전히 급대를 위해 징수되는 재원은 매년 절전(折錢) 62만냥 이상이었다. 그 가운데 곡물과 포목으로 상납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 급대 재원 가운데 52만냥 이상이 순수 동전이었다. 전세와 대동세로 다량의 곡물과 포목이 상납되는 상황에서 추가로 대규모 미포를 부과하면 백성의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동전을 주요 급대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매년 52만냥 이상의 동전이 서울로 상납되기 위해서는 기존보다 많은 동전 유통량이 필요했다. 균역법 시행에 따른 제반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했다. 이에 영조는 폐전론을 사실상 폐기하고, 숙종대 대기근 이후 처음으로 100만냥 이상의 주전을 단행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적극적으로 주전을 활용하였다. 진휼과 경비마련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에서 재정보용의 성격으로 완전히 전환된 것이다.

주전량이 증가한 만큼 동전 구매를 강제하고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조치로 따라야 했다. 정부는 급대를 위해 부과한 결미(結米)를 얼마 지나지 않아 결전(結錢)으로 변경했고, 전세ㆍ대동미의 작전 지대도 확대하여 부세로 상납되는 동전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이 모두 균역법 시행 초기에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대전납이 동전 유통 확대에 있어 중요한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입과 주전을 활용한 호조의 재정운영은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형적은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일상적인 재정부족은 타 기관에서 지원하는 가입으로 채우면서도 흉년이나 특별한 사안으로 인해 발생하는 대규모 재정수요에는 주전으로 재원을 확보하였다. 가입과 주전을 통한 호조의 재정운영은 정조 연간까지도 큰 문제없이 유지되었다. 가입과 주전을 수요에 맞춰 제한적으로 활용하여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세입이 비교적 넉넉해 자체적으로 운영이 가능할 때에는 연례적인 가입 외에 추가 가입을 전혀 받지 않은 해도 있었다. 주전한 동전도 전량이 시중에서 유통되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주전으로 당장에 필요한 재원을 보충하면서도 재정상황이 개선되면 동전을 저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정조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전의 대부분은 정부가 비축하고 있었으며, 유통량은 주로 부세로 이동하는 동전이 차지하였다. 그 결과 동전 가치는 일정 수준을 유지했으며, 심각한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지 않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