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高麗前期 外交儀禮 硏究」(2017.02.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박윤미(중세1분과)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예(禮)’는 동아시아를 타문화권과 구분하여 하나의 세계로 설정하는 주요 근거로 기능하였다. 중국에서 본래 제기(祭器)·제사(祭祀)를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예 개념은 춘추시대 유가(儒家)에 의해 특정한 관념이 부여됨에 따라 사회적 규범원리로 정착되었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예치(禮治)’라는 중국 고유의 질서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한대 이후에는 조공·책봉 등의 방식으로 중국과 주변국의 관계에도 예치가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예가 국제관계에 적용될 때, 외교의 담당자인 사신이 행하는 의례 즉 ‘외교의례’는 국가 간 질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사신과 그를 대하는 국왕 혹은 황제 사이의 의례(의식)를 통해, 식장에 자리한 의식 참여자들은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예적 질서를 직접 목도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본 박사학위논문 「고려전기 외교의례 연구」는 이처럼 국제 질서를 시각화하는 장치로서의 외교의례에 주목하였다. [그림1] 한대 화상석의 빈객을 맞이하는 의례 그림. 山東 蒼山縣 樓子村 (네이버 지식백과) 지금까지 고려의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상당히 많은 성과를 축적하였으나, 예·예제·의례를 통한 연구방법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연구자에게 생소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외관계사 분야는 전쟁이나 분쟁, 외교정책 등을 통해 시기별 관계의 변화상을 설명하는 연구방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예제나 의례 등을 접목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듯하다. 때문에 최근에 들어서야 관련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려의 대외관계사 분야에서 예나 의례를 다룬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필자 역시 석사학위논문 제목은 「고려 인종대의 대금정책」으로, 처음부터 외교의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석사학위논문을 쓰던 2007년, 보다 체계적인 한문교육을 받기 위해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에 입학하였는데, 이것이 예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사서삼경의 경서와 『주례』·『의례』의 예서 등을 공부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고, 서당을 졸업한 후에는 재학시에 『예기』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예학(禮學)을 하시는 선생님들의 공부모임인 ‘삼례역락’에 들어가 『예기』를 강독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이 의례(의식)에 관한 글, 즉 의주(儀註)를 읽는 일이었다. 글자로 된 설명을 그림으로 옮겨 재현하는 것은 죽은 과거를 살려 현재화하는 듯한 기쁨을 주었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의주는 『고려사』 예지이다. 필자의 의주에 대한 관심은 『고려사』 예지를 강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09~2011년에 한국역사연구회 중세1분과 학습반으로 고려사 예지 강독반을 운영하면서, 몇 분 선생님들과 함께 예지의 군례·빈례·가례를 강독하였다. 이때 참고자료로 『대당개원례』를 함께 보았는데, 『고려사』 예지의 내용이 『대당개원례와 상당히 비슷한 것을 확인하고 고려의 예제에 미친 당례(唐禮)의 영향을 느낀 바 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의례를 논문의 주제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의례를 필자가 전공하는 고려시대 대외관계사 분야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이었다. 한국역사연구회 중세1·2분과에 소속된 국제관계사반은 필자의 제안에 따라 2013년에 외교의례를 주제로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2015년에는 연구발표회를 거쳐 『역사와 현실』98에 외교의례를 주제로 한 특집 논문을 수록하게 되었다. 이때 게재한 필자의 논문 「고려전기 외교의례에서 국왕 ‘서면(西面)’의 의미」는 박사학위논문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 필자는 외교의례를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고려전기 고려국왕과 송·요·금의 사신 간에 행한 외교의례를 재현하여 이를 통해 고려와 송·요·금 간 예적 질서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예적 질서는 두 국가가 관계를 공식화할 때 형성되는 합의된 질서를 말한다. 이를 위해 외교의례 의주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의례의 구체적인 절차를 복원하고 그 특징과 의미를 파악하였다. 본문은 Ⅱ·Ⅲ·Ⅳ장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Ⅱ장은 외교의례 의주에 대한 내용으로, 고려는 물론 고려의 의례에 영향을 미친 당·송·요·금의 외교의례 의주를 아울러 검토하였다. Ⅲ장은 고려국왕이 사신으로부터 조서를 받는 의례에 대해, Ⅳ장은 국상(國喪)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행하는 외교의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림2] 『고려사』 예지 빈례 「영북조조사의」 (Krpia) 외교의례는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 구분 방식인 길(吉)·흉(凶)·군(軍)·빈(賓)·가(嘉)의 오례(五禮)로 따지면 빈례에 해당된다. 그러나 ‘빈례=외교의례’라고 할 수는 없다. 빈례를 외교의례로 규정하기 시작한 『대당개원례』에서조차 빈례 외의 부분에서도 외교의례는 확인된다. 이에 본고의 Ⅱ장에서는 오례로 구성된 당·송·요·금 그리고 고려의 예서에서 외교의례에 해당되는 의주를 찾아 그 관련성과 변화상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교의례는 빈례 외에도 가례 혹은 군례, 그리고 공통적으로 흉례에 포함되어 있으며, 『고려사』 예지의 경우 빈례의 「영북조조사의(迎北朝詔使儀)」·「영북조기복고칙사의(迎北朝起復告勅使儀)」와 흉례의 「상국사제전증부조위의(上國使祭奠贈賻弔慰儀)」·「상국상(上國喪)」·「인국상(隣國喪)」이 외교의례에 해당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에 따라 고려의 외교의례를 빈례의 측면에서 조서를 받는 의례(Ⅲ장), 흉례의 측면에서 국상 관련 의례(Ⅳ장)로 구분하여 살펴본 것이다. Ⅲ장에서는 『고려사』 「영북조조사의」와 『고려도경』 권25 수조(受詔)를 통해 각각 북조(北朝:요·금)의 사신과 송의 사신으로부터 고려국왕이 조서를 받는 의례를 검토하였다. 먼저 「영북조조사의」와 관련해서는, 이와 유사한 진행 방식을 보이는 「왕태자칭명입부의(王太子稱名立府儀)」와의 비교를 통해 그 세부 절차 하나하나를 복원하여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한 ‘사신 남향 : 국왕 서향’의 면위가 안부를 묻는 절차에 한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다음으로 『고려도경』에 보이는 송 사신 의례는 『고려도경』의 서술방식을 바탕으로 그 절차를 복원한 결과 「영북조조사의」에 보이는 북조 사신 의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고려도경』에 보이는 외교의례의 절차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으며, 여기에 보이는 의례가 북조 사신에 대한 것과 다르게 진행된 것이라는 점 역시 본고에서 처음 밝히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국상 관련 외교의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 역시 지금까지 전혀 다루어진 바 없는 주제이다. 이 의례는 『고려사』 예지 흉례의 「상국사제전증부조위의」와 『고려도경 권25 수조의 「제전(祭奠)」·「조위(弔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의주는 모두 송 사신 의례라는 점에서 북조 사신과의 차이점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고려는 요·금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은 이후 국상이 발생하면 고애사(告哀使)를 파견하여 알렸고, 요·금에서는 이에 대해 치제사(致祭使=祭奠使), 위문사(慰問使=弔慰使), 기복사(起復使), 낙기복사(落起復使)를 보낸 후에 책봉사(冊封使)를 파견하여 고려의 국상과 왕위계승 절차를 북조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의례는 『고려사』 「영북조기복고칙사의」밖에 확인할 수 없어, 북조에 대해서는 의례를 살펴보는 대신 고려의 국상 과정과 북조의 사신 파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상국상」에 보이는 고려 국왕의 거애(擧哀) 의례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국상으로 인해 파견된 사신과 행한 의례를 복원하는 작업은 송 사신이 행한 제전·조위 의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송 사신 의례의 경우, 제전·조위 의례와 조서를 받는 의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망궐(望闕)’의 관념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북조 사신 의례는 전통적인 원칙에 따른 것이지만, 송 사신 의례는 이전과 다른 특별한 구도로 행해진 것이다. [그림3] 『고려도경』 권25 수조 「제전」 (한국고전종합DB) 이상의 검토를 통해 고려전기 외교의례는 기본적으로는 당례(唐禮)를 근거로 삼으면서, 외교 대상국과의 관계 혹은 입장을 반영하는 예를 제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북조 사신에 대한 의례와 송 사신에 대한 의례가 각각 다르게 운영되었고, 또 원칙적으로 고정된 사안이 아닌 경우에는 의례를 행할 당시의 정치적 관계도 반영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고려식의 예제를 운용한 것으로, 고려후기에 원·명의 강압에 의해 변형되기 이전 고려적 예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시에 북조와 송이 추구한 예적 질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에서 행한 북조의 조서를 받는 의례 및 기복의례, 그리고 북조에서 국상과 관련된 사신을 파견하는 행위 등에서 북방민족의 특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제의 전범(典範)으로서의 당례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즉 요에서는 국상과 관련된 사신 파견을 부활시키는 등 전통적 당례를 계승하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는 금에도 이어졌다. 한편 고려에서 행한 송의 조서를 받는 의례나 송 사신의 제전·조위 의례를 통해서는 ‘망궐’이라는 개념을 외교의례에 적용하고자 했던 송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고려에서는 이를 수용하여 송 사신과의 의례에 있어서는 전에 없던 새로운 구도로 예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외교의례를 주제로 삼게 된 과정과 본고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소개하였다. 필자는 예 및 의례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지는 오래되었으나, 고려의 외교의례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 때문에 본고를 통해 고려전기 외교의례에 대한 모든 것을 고찰했다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앞으로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더 쌓아 본고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 연구범위를 확대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