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고려 전기 공주 책봉제의 의의」

BoardLang.text_date 2017.10.11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려 전기 공주 책봉제의 의의」


(2016. 08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신혜영(중세 1분과)


 

 

필자는 지난해 8월 「고려 전기 공주 책봉제의 의의」라는 논문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고려 전기의 공주와 공주 책봉제에 대한 고찰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의 공주는 생득적 ‧ 자연적 칭호가 아닌 책봉 과정을 통해 부여되는 작위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왕녀가 아닌 일부만이 오를 수 있는 특수한 지위였음을 논증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석사 학위 논문은 두 가지 의문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먼저 고려의 왕녀 칭호로는 宮主와 公主 두 칭호 모두가 존재했다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굳이 두 칭호 모두를 사용하였는지 두 칭호 간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다음으로“왕의 딸을 공주로 책봉한다.”와 같은 사료를 접하면서 왕녀를 공주로 책봉한다는 사실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자료 1]

[자료 1] 冊王子王姬儀 (『고려사』 「예지」)


 

이러한 궁금한 점을 풀기 위해 『고려사』 「예지」‘冊王子王姬儀’에 주목하였습니다(위 [자료 1]). 이 의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자와 왕희를 책봉하는 의례입니다. 일찍이 이 의례는 왕의 아들에게 公・侯・伯과 같은 작위를 수여하는 의례로 살펴졌지만, 의례의 또 다른 주인공인 왕희, 즉 왕녀의 존재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왕녀는 무엇으로 책봉되었을까? 필자는 왕녀가 공주 자체에 책봉되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는 중국의 공주 책봉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唐 공주 책봉례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의례가 황녀의 혼인례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고려의 공주 책봉례는 혼인례와 무관한 독립된 의례였습니다. 이는 문종의 장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문종의 장녀는 문종 28년(1074)에 積慶公主로 책봉되었고, 선종 3년(1086)에 혼인하였습니다. 이 왕녀가 공주로 책봉되고 약 12년이 흐른 뒤에 혼인하였다는 점에서 고려의 공주 책봉례는 혼인례와 완전히 별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宋의 공주 책봉례는 그 이름이 公主受封儀였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의식은 封號를 받는 의례였습니다. 宋은 물론 일찍이 唐代부터 공주의 봉호를 짓는 규정이 마련되었습니다. 만약 고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공주의 封號를 짓는 규정이 있었다면 공주 책봉례는 封號를 내리는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고려 전기(태조~의종) 封號를 알 수 있는 공주 15명을 분석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공주의 봉호는 宮號 혹은 시호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때 궁호는 자신이 거쳐하는 궁 혹은 모후의 궁호였고, 시호 역시 사후에 붙여진 봉호이므로, 고려의 공주 책봉례는 봉호를 내리는 의례도 아님을 확인하였습니다.

 

[자료 2]

[자료 2] 盧旦, 「冊王女爲公主文」, 『同文選』 권28, 冊. 


 
고려의 공주 책봉례는 어떤 의례였을까? 필자는 『同文選』에 수록된 공주 책봉문에 주목하였습니다. 위의 [자료 2]는 『동문선』에 남아있는 문종의 차녀를 공주로 책봉하는 책문입니다. 이 책문에서‘너를 冊命하여 공주로 삼는다.’라는 구절이 주목됩니다. 왕녀가‘○○+공주’가 아니라 단지‘공주’로만 책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왕자가 계림공, 평양공 등‘○○+公・候・伯’으로 책봉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입니다. 추정컨대 왕녀는 宮號를 封號로 삼았으므로, 굳이 봉호를 내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주 책봉문에서 봉호가 생략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왕자가 公・候・伯의 작위를 받는 것처럼 공주 칭호는 작위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고려의 공주 책봉례는 왕녀에게 공주라는 작위를 부여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료 3]

[자료 3] 『高麗史』 권77, 지31, 백관2, 內職


 

고려의 공주가 작위라면, 왕녀 내부에 위계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종실 봉작제에서 公・候・伯의 질서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는 고려의 외명부 제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외명부란 왕실 일원인 公主와 長公主 그리고 일반 관료의 妻와 母를 대상으로 國大夫人 이하 縣君의 지위를 부여하는 제도입니다([자료 3]). 여기에 따르면 공주와 장공주는 모두 정1품으로, 왕녀가 공주 혹은 장공주로 책봉되면 외명부 내 최상단에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공주는 작위였으므로 왕녀가 공주로 책봉되는데 일정한 자격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는 공주 책봉제의 시행과 정비 과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공주 책봉제가 시행된 것은 현종대로 여겨집니다. 공주를 책봉한 최초의 기록은 현종(재위 1009~1031)의 왕녀 孝靖公主 사례에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현종대 공주 책봉제의 시행은 종실 봉작제과 함께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때에 왕의 자녀들에 대한 책봉 제도를 마련하여 그들 내부에 질서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종은 태조 이후로 가장 많은 異姓의 后妃를 맞이한 국왕이었습니다. 이는 곧 왕실 구성원이 이전에 비해 다양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현종은 왕의 자녀에 대한 질서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현종의 혼인 자체가 국내의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왕의 자녀에 대한 질서를 요구하면서도 엄격한 차등을 마련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종의 혼인은 그 출발 자체가 한계를 지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왕 子女의 책봉에 있어서 母后의 신분만큼은 중요시 하였는데, 천계 소생의 왕자는 小君으로 불렸고 왕녀는 공주로 책봉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선종대 왕실 의례들이 재정비되면서, 공주 책봉제도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부터는 공주 책봉 대상자에 보다 엄격한 자격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종~의종대 공주로 책봉된 왕녀를 분석해보면, 모두 제1비 혹은 제1비에 준하는 후비 소생의 왕녀와 태후 소생의 왕녀만이 공주로 책봉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왕녀가 공주로 책봉되는데 있어 母后의 納妃 순서와 최종 지위를 중요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무인집권기에 들어서면 한 명의 왕에게 한 명의 후비만을 맞이하면서, 공주 책봉 대상자의 조건은 더욱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에서 母后의 위상과 지위를 중요시 여긴 현상은 중국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이면 모두 공주로 불렸던 것입니다. 이는 고려에서 同氣意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기의식이란 조상과 후신의 父系의 氣를 통해 연결된다는 믿음입니다. 양측적 친속 관계를 유지했던 고려 사회의 특성상 부계 중심의 중국적 동기의식이 없었고, 결국 모든 왕녀들이 왕의 딸이라는 점에서 차등이 없었기 때문에 母后의 지위와 위상을 중요시하였던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필자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고려의 공주는 책봉례를 통해 부여되는 작위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공주가 작위였던 만큼 책봉 대상자에게 일정한 자격이 요구되었습니다. 처음 현종대 공주 책봉제가 시행되면서 모후의 신분이 그리고 선종대에는 모후의 지위와 위상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렇듯 필자는 석사 논문에서 고려의 공주는 중국의 황녀와는 다른 특수한 계층으로 왕의 딸 중에서도 일부만이 오를 수 있었던 지위였음을 논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