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1904년~1920년대 京城 新町遊廓의 형성과 공간적 특징」

BoardLang.text_date 2015.09.08 작성자 박현

나의 학위논문


 

「1904년~1920년대 京城 新町遊廓의 형성과 공간적 특징」
(2015.2.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박현(근대사분과)


  유곽(遊廓)은 쉽게 말하면 유락(遊樂)시설로, 예기(藝妓)의 춤사위를 구경하거나 창기(娼妓)들과 성매매를 하는 장소를 말한다. 유곽은 일본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이래 신사와 더불어 일제가 만든 식민지에 대부분 건설되었다. 즉 해외로 진출한 일본인이 거주했던 도시에는 정신적 지주역할을 담당하는 신사와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유곽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곽과 신사가 일제 식민지 도시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연구는 그 중에서 유곽, 특히 경성에 건설된 신정유곽에 주목하였다. 경성유곽은 식민지 조선에서 성공한 유곽으로 인식되었고, 해방 후 자취를 감춘 신사와 달리 1960년대까지 사창(私娼)의 형태로 남아있는 등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림1] 신정유곽의 위치 『대경성정도』를 편집
   1904년 10월 신정(新町)에서 유곽 영업이 시작되었다. 경성에 유곽이 건설된 것은 1904년 2월 시작된 러일전쟁으로 인한 일본인 남성 인구의 증가와 재경성 거류민단의 지속적인 수입원 마련 등이 주된 이유였다. 신정에 유곽이 건설된 이유는 세 가지로, 신정 일대가 유곽 건설에 적합한 공지(空地)였고, 신정이 건설 당시 일본인 거류지의 외곽이면서 자연지형으로 거주지와 분리되어 있었으며, 군대 주변에 자리하였고 조선인과 부딪칠 장애 요소가 적었다.



[그림2] 신정유곽의 자연지형 『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를 GIS 프로그램으로 제도
  신정유곽 건설 이후부터 1910년대까지의 신정유곽 내부 구성을 살펴보면, 남북도로와 대화정과 이어지는 도로가 있었는데, 두 도로 모두 신정유곽의 입구 역할을 했다. 남북도로는 일본의 주요 유곽에서도 비슷한 도로가 있었지만, 대화정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신정 유곽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초기의 대좌부들은 도로 주변에 위치했는데, 쌍이문동천 동쪽의 경우 기존의 조선인 거류지가 있어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곽과 관련된 업종 분포의 경우 규모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일본 요시와라 유곽과 신정유곽이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그림3] 신정유곽의 주요 하천 ․ 도로와 현재 위치 『대경성정도』를 편집[좌], 네이버지도(http://map.naver.com)[우]
  1920년대 신정유곽의 변화를 살펴보면, 먼저 필지 구획이 남북도로 동쪽까지 진행되고 필지가 세분화되었다. 필지의 세분화는 곧 해당 필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지목이 변화하였다. 대지와 도로의 비율이 높아지고, 밭과 임야가 줄어들었다. 토지 소유자의 인적 구성도 변화하였다. 1910년대에는 신정유곽의 토지 소유자와 토지 운용자가 일치하지 않았지만, 1920년대에는 대좌부 주인들이 신정유곽의 토지까지 소유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한편 경성학교조합은 191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신정유곽의 토지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경성학교조합이 유곽의 토지를 소유했던 것은 교육재정 마련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림4] 1920년대 신정유곽의 필지 양상 『지형명세도(1929)』
신정유곽이 건설된 이후 경성에서는 성매매가 성행하였다. 성매매의 성행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갔다. 유곽을 찾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신정유곽은 상당한 이익을 거두었다. 한편 일본인 여성과 더불어 조선인 여성의 성매매도 증가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1916년 단속규칙이 반포되었고, 1919년 신정 근처(서사헌정 ․ 병목정)에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유곽이 만들어졌다. 조선인 유곽은 신정유곽 내부가 아닌 신정유곽 주변부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조선인 유곽의 입지에 민족 구분이라는 변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두 유곽의 이러한 구분은 입지조건뿐만 아니라 당시 유곽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상으로도 나타났다.

  신정유곽은 건설 이래 경성 유흥문화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현상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신정유곽은 일본인 중심지였던 남촌에 있었고 일본인을 대상으로 영업하였지만, 신정유곽 주변에 조선인 유곽이 만들어지는 등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간적으로 만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장소였다. 동시에 신정유곽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소였다. 조선인 유곽과 신정유곽이 근처에 있었지만 지리적으로는 분리되었고 소설 속에서도 분리된 공간으로 묘사되는 등 두 유곽 사이에는 가시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 모두에서 경계가 존재했다.

  이 연구는 신정유곽 연구를 통해 남촌연구의 공간적 ․ 심상적 외연을 신정까지 확대시키고자 했다. 지금까지 일제시기 남촌 연구는 본정이나 명치정, 남대문통 같은 번화가 위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신정은 남촌의 끄트머리에 위치했지만 유곽에 부과된 세금이 교육재정의 일환으로 쓰이거나 대좌부 주인(아카오기 요사부로)이 경성부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남촌 일본인 사회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 글이 신정의 위상을 살펴봄으로써 번화가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남촌연구의 공간적 ․ 심상적 외연을 신정까지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연구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지리정보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통해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여 인접학문과의 융합이나 역사 연구방법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제시하고자 하였다. 추후에는 다른 지역 유곽과의 비교연구나 이번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1930년대 이후의 신정유곽에 대한 후속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