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분원 사기장의 자유해방과 계약 노동자의 길」

BoardLang.text_date 2015.03.03 작성자 박은숙

나의 논문


 

분원 사기장의 자유해방과 계약 노동자의 길(1895~1910)

(『역사와현실』93, 2014 )


 

박은숙(근대사분과)


 

 

1. 조선 최고의 백자를 만든 분원 사기장은 어디로 갔을까?

흔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손꼽는다. 그러나 정작 청자와 백자를 만든 사기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왕실 자기를 만들었던 분원 옛터에는 그들을 감독했던 당상관들의 비석만 남아 있을 뿐 백자를 만든 사기장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사기장 李參平은 일본 최초로 백자를 만들었으며,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의 사기장과 기술을 약탈한 일본의 자기업은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한때 유럽시장을 휩쓸었다.


   본 논문은 분원의 官窯가 막을 내린 1895년 이후 수백여 명에 달했던 사기장들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수백여 년 동안 대대로 세습하면서 공적(公籍)에 묶여 있었던 사기장들의 해방과 마지막 자취를 복원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유해방된 그들의 자취를 복원하기에는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았다. 다행히 분원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의 『하재일기』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사기장에 대한 이야기는 분원 운영자의 관점에 제한되어 있었고, 그 기록도 산발적이고 간헐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사기장에 대한 이야기를 긁어낼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본 논문은 『하재일기』를 기반으로, 그간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분원 사기장의 마지막 행적을 밝혀 보고자 한 것이다.



[그림 1] 분원도요지 입구 ⓒ 박은숙
2. 분원 사기장의 자유해방과 마지막 여정을 복원하다.

1) 해방된 사기장들, 임노동자의 길에 들어서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사회는 그릇에도 명분을 강조했다. 군신(君臣), 부자(父子) 간에도 같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15세기 후반 왕의 그릇을 전담하여 제작하는 분원을 설치했으며, 이후 분원 사기장은 수백여 년 동안 대대로 세습하면서 자기제조업에 종사했다.

   개항 후 조선 정부는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분원 운영권을 공인(貢人)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어용자기 진상을 조건으로 정부는 사기장의 임금을 지급하고 도토를 제공했다. 따라서 분원 사기장은 소속은 정부에, 지휘 감독은 공인들에게 받는 이원적 체제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다.


   1895년 분원이 혁파되면서 분원 사기장들은 정부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임노동자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자신의 기예를 발판으로 자유롭게 업주를 선택하고 임금을 교섭할 수 있었다. 사기장들은 각자 일거리와 임금을 좇아 흩어졌으며, 분원과 여주 등지를 옮겨 다녔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사기장은 핵심적 기예를 가진 조기장 등에 한정되었다. 개별 사기장의 전문성과 숙련 정도에 따라 임금과 근무조건의 차별화·등급화가 진행되었으며, 단순 직종에 종사하는 사기장은 대부분 도태되었다.



[그림 2] 사옹원당상선정비 ⓒ 박은숙

 2) 계약의 실태와 임금을 추적하다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분원 자기업은 1897년 번자회사(燔磁會社)의 간판을 달고 다시 출범했다. 번자회사는 분원 공인과 서울 관료의 자본 합작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자본금은 16만 5천냥 규모였다. 사기장은 번자회사 운영진에 한 사람도 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의 자본력과 영향력이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번자회사는 상당한 수익을 올렸지만, 자금회전 경색과 외상거래 관행 및 고리채 부담으로 자금난에 시달렸다. 결국 번자회사는 3년간의 공동 투자·운영방식을 청산하고, 1900년부터 사원이 業主가 되어 개별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판매하고, 회사는 가마 등의 시설세를 받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1900년 이후 분원에 드나든 사기장은 특정 자본가 업주에게 일대일로 고용된 분자로서 존재하였다. 사기장은 업주와 일정 기간 전속 계약하였는데, 보통 1~2년 정도 함께 일하였다. 근무 일수는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략 1달에 5~10일 정도 쉬는 것으로 드러나 있었다.

   당시 숙련된 조기장의 임금은 연간 수백 냥 이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부 소속일 때 사기장 수백 명이 일괄적으로 받았던 고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계약 기간이 짧고, 업주의 경제상황에 따라 고용 불안이 상존하고 있었다.


 3) 사기장의 인적 교류와 새로운 기법의 도입을 밝히다
분원 업주는 지방의 우수한 사기장을 확보하기 위해 수십·수백 냥에 이르는 노자를 지급하고, 수백 냥짜리 주택을 구입하여 제공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궁내부의 권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분원에는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황해도·경상도의 조기장과 부장(釜匠) 등이 드나들었다. 사기장들이 자유 해방되면서 자연스럽게 계약 조건에 따른 사기장의 교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인적 교류는 기술 교류와 연결되어 도자 제조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분원 사기장은 오랫동안 전통적 기법으로 자기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시장의 변화와 업주의 요구로 1902년 처음으로 일본식 채색 자기를 만들어 시장에 판매하였고, 1903년에는 문경의 망동요(望同窯)가 분원에 설치되었다. 1910년에는 분원의 젊은이들이 공업전습소에 들어가 새로운 도기를 공부하였고, 도기를 전공한 학생들 또한 분원에 드나들면서 자기개량에 관심을 기울였다.


1916년 분원의 마지막 분원자기주식회사가 폐쇄됨으로써 수백여 년 전승되어 왔던 전통적 도자기법과 테크닉 또한 그 맥락이 끊겼고, 분원 사기장의 계보도 단절되었다. 분원 사기장들은 다른 사기점에 옮겨가거나 일본인 요업공장의 하부구조에 편입되어 갔다.


[그림 2]  도자기 파편들 ⓒ 박은숙


3. 한국적 하이테크 자기의 부활을 기대하면서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전통시대 문명의 상징이었고, 고도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상품이었다. 오늘날에도 자기는 일상생활의 그릇부터 우주선의 단열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조선은 세계 역사상 중국 다음으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였고, 독창적이고 탁월한 자기를 만들었다. 옛날 사기장들이 고도의 기술을 적용하여 자기를 만들었듯이, 21세기 한국적 하이테크 자기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


※ 한국역사연구회는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연구 활성화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심사를 통해 ‘최우수 논문’ 및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에 대한 수상을 해오고 있다. 위에 소개된 논문은 편집위원회의 엄밀한 심사를 거쳐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은 2014년 한국역사연구회 정기총회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