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원간섭기 첨의부의 위상과 역할」

BoardLang.text_date 2014.03.18 작성자 이정훈

나의 논문


 

원간섭기 첨의부의 위상과 역할


– 충렬왕과 충선왕대를 중심으로 -

(『역사와현실』88, 2013 )


이정훈(중세1분과)


위 논문은「忠宣王代 官制 改革과 관청간의 統屬관계」(『한국중세사연구』32, 2012)를 집필하면서 고민을 했지만 쓰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필자 자신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충선왕 즉위년과 복위년 관제를 기본적인 방향은 같았지만, 즉위년 관제는 국왕의 친림(親臨)을 전제로 하였고 복위년 관제는 충선왕의 재원통치(在元統治)를 전제로 편제되었기 때문에 관제의 내용이 달랐다고 보았다.

   재원 통치는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원에 머물면서 국정 운영의 현장인 고려를 떠나 통치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간섭기 고려 국왕은 원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고려를 떠나 원에 갔었다. 친조(親朝)로 표현되는 이러한 행위는 원간섭기 내내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방식이었다. 재원 통치와 친조는 원에 머무르는 기간은 달랐어도, 기본적으로 국왕이 국정 운영 현장을 떠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친림과 재원 통치는 충선왕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친림과 친조라는 형태로 원간섭기의 국왕 모두가 행했던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전근대 국가의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국왕의 친림(親臨)을 전제로 구조화된다. 친조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친림을 전제로 구조화된 정치제도로서는 국정 운영을 온전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친조에 따른 국정 운영의 공백을 메울 장치가 강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원간섭기에는 국왕의 친림을 전제로 하면서도 친조로 인한 국정운영의 공백을 감안한 정국운영 및 정치제도의 운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을 것이다. 비록 정치제도 전반은 아니더라도 일부 정치기구라도 그 기능과 역할을 변화시켜 친조로 인한 국정 운영의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는 친조가 본격화되고 수차례 행해졌던 충렬왕대와 장기간의 재원통치를 기도했던 충선왕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되었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서 고찰했던 것이 위 논문이었다.


   친림과 친조를 전제로 하는 국정 운영이라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첨의부를 주목했던 것은 친림과 친조가 행해지기 위해서는 전체 정치기구를 관할ㆍ통솔하는 기구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국정 운영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대민지배와 관련된 행정 운영이었기 때문이다. 국왕을 대신해서 행정 체계상으로 전체 정치기구를 관할ㆍ통솔하는 기구가 있다면 또는 이러한 역할을 해 주는 기구가 있다면, 대민지배와 관련된 행정 운영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려전기에 행정 체계상으로 전체 정치기구를 관할ㆍ통솔하는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고,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이루어진 원간섭기 초반에도 전체 정치기구를 관할ㆍ통솔하는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왕이 친조를 행할 때 무엇보다도 전체 정치기구를 관할ㆍ통솔하는 기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런데 원간섭기 첨의부에는 이전 시기 행정 체계상 최고 위치에 있었던 기구와 다른 몇 가지 변화가 타났다. 첫째, 첨의부를 “백관지장(百官之長)”이라 인식하였다. 백관지장은 말 그대로 모든 관청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 관청 또는 가장 높다는 뜻이다. 고려전기나 무인집권기에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관청은 없었다. 첨의부를 백관지장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첨의부가 행정 체계 상 가장 높은 관청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첨의부 = 백관지장이란 표현은『고려사』권76, 백관1, 문하부조에 나오는 “장백규서무(掌百揆庶務)”와 일맥상통한다. 첨의부가 고려시대데 존재했던 관청 중에서 처음으로 백관지장이라고 불리었다는 점에서, 문하부가 백규서무(百揆庶務)를 관장했다고 한 것은 문하부의 전신이었던 첨의부에서 비롯되었다. 즉 첨의부가 행정 체계 상 가장 높은 관청으로서 백규 서무를 관장하였다.



[그림 1] 『고려사』권76, 백관1, 문하부


   둘째, 첨의부가 대외적으로 고려를 대표하는 기구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첨의부는 원에서 고려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수신처이자 고려에서 원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발부처였다. 첨의부가 이런 역할을 하였던 것은 첨의부의 전신인 상서도성(尙書都省)에서 기원한다. 그런데 원간섭기 대외관계는 단순히 외교 문서를 주고받는 형식적인 것이 아닌 원의 지배 하에서 사신이나 외교 문서를 통해 원이 요구하는 부분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첨의부는 원이 발급한 외교 문서를 수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교 문서를 통해 원이 요구하는 문제를 실질적인 처리해야만 하였다. 이에 따라 첨의부는 대외적으로 고려를 대표하는 기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원간섭기 외교 문서는 국왕 대 국왕만이 아니라 관청 대 관청으로 주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결과 특히 후자의 경우, 첨의부와 원 관청 간에 위계질서가 문제가 되었다. 첨의부가 고려에서는 최고의 기구였지만, 원에서는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첨의부의 관인(官印)을 하사해 줄 것을 원에 요구하였다. 당시 원에서 사용된 관인은 관질(官秩)이 명시된 관인을 사용하였다. 관질은 곧 관청의 격을 말한다. 첨의부가 고려를 대표하는 기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첨의부의 관질은 원에서 차지하는 고려의 지위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결국 원은 원과 고려, 지배 국가 간의 위계질서를 고려하여 충렬왕 5년 첨의부에 정4품의 관질이 명시된 관인을 하사하였다.



[그림 2] 『大元聖政國朝典章』에 제시된「印章品級分料例」 ⓒ박준호,「公文書의 官印 硏究」『고문서연구』36, 2010에서 재인용


   셋째, 행정 기능이 강화되었다. 첨의부가 백관지장으로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행정 기능이 강화되어야만 하였다. 그런데 충렬왕 원년 3성이 첨의부로 변화될 때, 상서도성의 관원은 첨의부로 이관되지 못하고 모두 혁파되었다. 상서도성은 3성 중에서 가장 행정 기능이 강한 기구였다. 상서도성의 관원이 첨의부로 이관되지 못한 것은 충렬왕대 초반 첨의부는 행정 기능이 매우 약했음을 말한다.


   이러한 첨의부는 충선왕대에 들어와 행정 기능이 강화되었다. 충선왕은 즉위년, 복위년에 관제 개혁을 통해 첨의부의 행정 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첨의부가 행정 기능이 강화되었던 것은 복위년 관제 개혁이었다. 우선, 첨의부를 제외한 모든 관청에는 장관을 복수로 지정하였지만, 첨의부만은 장관인 정승(政丞)을 1인으로 정하고, 정승에게 첨의부와 국정 전반을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다음으로 하부 관청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첨의부 재신들이 첨의부의 관원이라는 지위로 직접 하부 관청의 업무에 참여하도록 하는 등 첨의부가 하부 관청을 관할ㆍ통솔할 수 있도록 행정 체계를 변화시켰다. 셋째, 전무령(典務令)과 수령관(首領官)을 설치하였다. 전무령과 수령관은 이전 시기에는 없었던 관직들로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들이었다. 이들 관직들을 통해, 첨의부는 하부 관청 및 지방을 관찰ㆍ통솔할 때 생기는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를 담당하였다.


   이전 시기의 최고 관청과 달랐던 첨의부의 모습은 필자의 판단으로 첨의부가 전체 정치기구를 관할ㆍ통솔하는 기구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위의 세 가지 측면에서 충렬왕과 충선왕대의 첨의부를 고찰했던 것이 위 논문이다.


   그런데 정치기구는 실제 운영 과정이나 다른 기구와의 관계로 인해 처음 그 기구가 만들어질 때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다. 위 논문은 첨의부가 원간섭기 최고 행정 기구로서 그 모습을 갖춰가던 때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실제 국정 운영 과정에서 첨의부의 모습이나 충선왕대 이후 첨의부의 모습은 고찰하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추후 새로운 논문에 담아 볼 것을 기약한다.


※ 한국역사연구회는 소속 연구자들의 학술연구 활성화를 위해 2007년부터 매년 심사를 통해 ‘최우수 논문’ 및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에 대한 수상을 해오고 있다. 위에 소개된 논문은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분야에서 매우 주목되는 연구 성과로서 편집위원회의 엄밀한 심사를 거쳐 ‘최우수 논문상’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은 2013년 한국역사연구회 정기총회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역사연구회 편집위원장 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