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한국전쟁기 중립국 선택 포로 연구」 이선우(현대사분과) 나의 학위논문 주제는 석사 2학기 외교사료관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던 시절에 그 구상을 잡았다. 외교사료관을 자주 방문하셨던 한 연구자 분께서는 그 날 봤던 재밌는 자료들을 얘기해주시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인도로 송환된 반공포로 관계철」이었다. 전쟁 직후 인도로 간 포로들을 한국 정부에서 관리하고, 접촉을 시도하는 내용의 문서들이었다. 당시 한국전쟁 포로에 대한 전후 지식이 없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안의 호기심을 따라 배경 지식을 채워나갔고 이렇게 한국전쟁, 포로,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나의 작은 연구가 시작되었다. 소설 <광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중립국 선택 포로들은 공산군 포로 74명, 국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으로 총 88명이다. 이들은 1954년 2월, 당시 중립국송환위원회 의장국이었던 인도로 이송되어 이후 약 2년 동안 그곳에서 관리 받다가 다시 브라질, 아르헨티나, 미국, 캐나다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 본토로 송환된 경우도 있었다.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 원칙을 적극 실천한 이들이자, 휴전회담의 포로 협상의 최종 결과물로서 이들의 존재는 전후 포로 처리 방식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선택 과정, 혹은 발생 경위를 추적함으로써 한국전쟁 포로 처리과정 전반을 이해하고 자원 송환 원칙의 의미를 재고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자료의 한계에 부딪혔다. 지금까지는 중립국행 포로에 대한 전체 명단도 확실히 공개되어있지 않았고, 이 중 한국인의 명단도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확실한 명단 확보가 필요했다. 다행히 지도교수님을 따라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tional Archive of Record Administration)을 방문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며칠 간 사료군에 대한 이해를 거친 후에야 RG 338의 중립국송환위원회 최종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도 수집되어 있던 자료였기 때문에 사료군에 대한 이해가 되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단을 찾았을 때 혹시 잃어버릴까 불안할 만큼 짜릿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림-1> 중립국송환위원회 최종보고서 중립국행 포로명단 원문 휴전 회담에서 가장 논쟁이 되었던 (본국) 송환 거부 포로 문제는 중립국송환위원회(Neutral Nation Repatriation Commission)에서 처리하되 포로 자원 송환 원칙을 반영하기로 양측은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남북한 여러 지역 수용소에 있던 송환 거부 포로들은 모두 판문점 근처 비무장지대로 이송되었고, 중립국송환위원회의 관리 하에 약 4개월간의 해설(Explanation, 설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는 전체 포로의 약 1/10에 해당하는 포로들만이 해설을 받을 수 있었고, 포로들은 수용소를 탈출하는 등의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 송환을 요청할 수 없었다. 중립국행을 원하는 포로들의 경우, 해설장에는 제3의 선택지(남한, 북한, 중립국)가 만들어진 상황도 아니었고, 중립국송환위원회, 양 측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수용소 당국으로부터 각종 설득과 만류를 받았다. 포로들 사이에는 중립분자에 대한 탄압마저 존재했다. 포로의 중립국행이 배척, 만류되었던 이유는 극단적인 이념 대립의 영향이 가장 크지만, 정책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는 점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다. 무엇보다 포로들을 받아줄 '중립국'이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포로 송환 협정에서는 '포로들이 민간인으로 석방된 이후 중립국을 원할 경우 지원한다'는 규정 외에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자연히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책임이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인도 측의 부담이었다. 88명의 포로들은 최종 정착국이 정해질 때까지 약 2년간 인도군 관리 하에 수용되었고, 그동안 국제적 난민과 비슷한 방식으로 한국, 북한, 인도, 유엔의 동시 처리를 받게 되었다. 각 국은 나름의 이념과 방식대로 중립국행 포로들을 대했고, 포로들은 각 정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중립국으로 갔는가. 솔직히 논문을 쓰는 당시에는 나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주변 사람들이 참 미웠다. 당시 88명의 개인적 심리상태를 알 수 없으며 발생 과정을 설명한 이상 대변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유를 추궁하는 질문에 현답을 제시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을 때, 지도교수님께서는 "누가(Who)"를 분석하면 "왜(Why)"에 대한 답이 나올 것이니, 포로심문보고서를 통해서 중립국행 포로들의 인물 분석을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때부터 수집할 수 있는 모든 포로심문보고서를 목록화했고, 여기에 각종 데이터베이스, 신문자료와 회고록을 동원해서 약 20명의 인적사항과 경력을 확인했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서 88명 중 한국인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총 77명이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원래 만주에서 징용된 팔로군이었던 1명(오일국)은 중립국 이송 당시 중국군 포로로 등록되었지만, 이후 한국 외교부 문서에서는 한국인으로 분류되었고 당시 포로집단 사이에서도 한국인 무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77명은 대부분 20대 초반 연령의 집단으로 일부 장교 출신을 포함한 고학력자들이 문화적 심리적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립국행 포로의 선택을 단계적으로 분석해보면, 북한 송환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체류를 거부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양 측을 거부했던 것이 반드시 이념적 중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체제 경쟁에서 벗어나고자 먼저 전쟁을 포기하고, 끔찍했던 수용소를 도망친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통해서 대한민국과 북한 모두를 선택지에서 배제했고, 동시에 제3의 국가로서 중립국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非北과 非南으로서 택한 중립국은 ‘외국’, 그 중에서도 미국으로 가까웠다. 단 이들의 미국지향성은 공산권에 반대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학업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이들이 정착했던 남미 지역 역시 미국행이 좌절되면서 선택한 차안의 하나였다. 중립국 선택 포로들은 전후 소설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적 중립의 상징물이 되어 왔지만, 그 실체는 상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들이 ‘이념적 중립’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 그리고 중립에 대한 반감이나 호기심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것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체제경쟁을 반증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포로들에게 이념 선택을 요구하고, 그리고 그 선택을 이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전쟁 포로를 둘러싼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불어 논문 기초 자료 분석을 통해서 포로심문보고서라는 자료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연구 활용의 가능성을 파악했다는 점 역시 큰 수확이었다. 자료에서 시작했고, 또 자료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역량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도 현대사 전공자로서 겪어야 했던 자료와의 싸움, 문제의식의 고민을 충분히 수련할 수 있었던 과정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앞으로는 한국전쟁과 냉전의 시대적 맥락을 그리는 포로 연구를 좀 더 진행해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