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전영욱(근대사 분과) 역사학을 직업으로 삼기를 마음먹은 이후 최초의 성과물이다. 대학원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지나치게 자주 논문 주제가 바뀌어 지도 선생님께 적잖은 걱정을 끼쳐 드리기도 하고,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논문 계획서를 분과총회 때 발표해서 여러 선생님께 꾸중도 많이 받았다. 어느 것 하나에 진득하니 파고들지 못하는 성격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 나온 이 논문 역시 1년이 갓 넘은 문제의식으로 쓰였다. 아마도 머지않아 이 논문은 가리고 싶지만 가릴 수 없는 치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이 논문을 쓰게 한 몇 가지 문제의식은 ‘당분간은’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 논문은 사료의 부족이라는 역사학의 가장 기본적인 한계로 인해 그간 식민지 全시기 연구 중, 상대적인 공백기로 불린 1910년대의 성격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1920년대와의 인식론적 연결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 나름의 노력이다. 나는 1910년대 총독정치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 내부의 ‘일부’ 의견들을 종합하여 소위 무단통치 자체가 가지고 있던 불안정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정책적 불안정성이야말로 일본으로 하여금 “무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조선 통치를 필요로 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재적 불안정성은 일본의 정국 변화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으며, 이 흐름은 제국과 식민지의 법적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 때문에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나는 1930년대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시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상, 공부를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처음부터 진행하는 것이 正道일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 때문에 학위논문의 연구시기를 1910년대로 정하였다. 그러나 미리 밝혀 두지만, 또한 사실 엄밀히 말할 것도 없는 부분이지만 이 논문은 1910년대 全般은커녕 1년도 채 안 되는 시기를 주된 연구시기로 잡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병합’ 직후에 이루어진1911년 제27회 제국의회를 연구공간으로 삼고, 여기에서 조선 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총독부 관료와 제2차 가쓰라 내각(육군), 중의원이라는 삼자 간의 갈등 관계를 주된 분석축으로 잡았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재조일본인의 총독정치 인식도 분석하였다. 이렇게 연구시기를 좁게 잡았던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본고의 가장 핵심 개념인제령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 시기에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全시기에 걸쳐 기록된 방대한 양의 제국의회 속기록을 검토하는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역량에 반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필자가 1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다듬은 문제의식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은 듯하다. 1910년대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인식되었던 적이 있었다. 우선 나는 조선총독부 관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자체를 1910년대와 연결시키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역사학에서 관료 연구는 아직까지 박사학위 논문조차 나오지 않은, 이제 막 시작된 분야인데다 조선인 관료의 모습이 가시화되는 시기 역시 그들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일본의 시험 제도에 적응하게 되는 2,30년대 이후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오히려 ‘통치자’의 상황 인식을 주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1910년대를 해야겠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낳은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막무가내로 한국사 연구자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연구 테마로 삼게 되었다. 나는 조선총독부의 일반 정책에 대해 총독부 관료와 그 외의 통치자들의 인식이 어떤 양상으로든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기존 연구들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 번 논문의 구도를 바꾸니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나타났다. 우선 나는 한국사뿐만 아니라 내 문제의식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주제의 일본현대사를 거의 처음으로 공부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리한 식민지정책론 연구와 제국법제 연구 등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또한 일본에서 유래된 “제국사적”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오히려 “식민지를 알고 있는” 한국 측 연구자가 그렇지 못한 일본 측 연구자보다 이 제국사적 방법론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연구 대상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러던 와중에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그 논의를 연구한 대부분의 식민지정책론 연구들이 취한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총독부를 하나의 국가권력 기구라고 상정할 때 또 다른 국가권력 기구와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것,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가장 큰 이유는 총독정치와 ‘내지정치’ 간의 관계가 고려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제국의회 그 자체를 육군과 조선총독부에 대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국가권력 기구로 설정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오로지 서양의 기준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었던 ‘문명’의 표상이 바로 의회의 정치력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본 정계의 현실적인 정치권력은 육군이 가장 강력히 휘두르고 있었고, 조선총독부는 바로 그런 육군의 비호를 받았지만, 의회가 지닌 문명으로서의 의의는 흔히 “법적으로” 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이는 것처럼 언제나 정당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국가권력 기구들이 가지는 이와 같은 차이는 데라우치의 조선 통치를 둘러싼 논란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배경이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분주함은양자에게 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생각하게 할 겨를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총독정치를 둘러싼, 그리고 제국과 식민지의 법적 관계를 둘러싼 충돌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양자가 공유하고 있던 지점이었던 것 같다. 결국 1910년대 조선인에 대한 무단통치는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인식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고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드러나는 개념의 불확실성은 역시 시간의 제약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꼭 해 보고 싶어서 하기는 했는데, 아직까지 공부량은 부족하고, 논문 제출기한이 다가온다는 매우 현실적인 제약이 작용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나 부족하지만 딱 한 가지 그나마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나고 자유롭게 고민할 수 있어 좋았다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한국사 연구자로서 일본사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아무리 공부해도 이 짧은 시간 안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감각과 그래도 해 보고 싶다는 만용 사이에서 적잖이 고민했던 것 같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논문은 아마 머지않아 부끄러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더 공부해서 꼭 보완하고 싶다. 그래서 내 논문 앞에 자랑스럽게 서리라. 그러니까, 부족하기만 한 논문이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어 다행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는 ‘결국’ 신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