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정요근(중세사 1분과) ‘잠치(站赤)’로 불렸던 ‘대몽골제국’의 역전제도(驛傳制度)는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 역참(驛站)이라는 표현은 잠치의 중국식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30여 년간 지속된 고려 최씨정권의 대몽항쟁이 종료되면서 몽골과 고려 사이에는 화친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역참의 설치는 원(元)이 화친 성립의 조건으로 고려에 요구했던 6사(六事) 중의 한 항목이다. 따라서 몽골제국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원은 당연히 화친의 조건으로 고려에 원의 관리들이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역참의 완비를 요구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역제(驛制)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원과의 화친과 함께 원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고려의 역로망(驛路網)은 원의 잠치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는 원의 잠치체계와 고려 역로망 사이의 관련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시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료도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이 시기 고려 역참제도 자체가 원이 고려에 행사하던 정치적 영향력의 지표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흥미를 별로 끌지 못했던 것이다. 본 논문은 바로 원간섭기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의 개입과 그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양국 간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일단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에 그 서술 의도가 있다. 실제로 원은 6사 이행의 하나로서 개경으로부터 원의 대도(大都) 방면과 연결되는 루트에 위치한 역참들을 신속히 재건하도록 하고, 역 이용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포마차자색(鋪馬箚字色)이라는 관서를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 세조는 고려에 직접 토드코순(脫脫禾孫)이라는 감찰관을 임명하기도 하고, 수역(水驛)을 설치하여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 역참을 검열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개입과 간섭을 시도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원의 고려 역참제도 운영에 대한 개입을 고려를 매개로 시행된 원의 국가적 사업의 추진과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즉 원은 고려와의 화친을 통해 고려에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원칙을 약속한 이상, 원칙적으로 고려의 내정에 직접적인 개입을 강화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직ㆍ간접적인 개입의 배경에는 일본원정이나 미곡(米穀)의 장거리 해상운송 등 고려가 매개되어야 하는 원의 국가적 사업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원의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개입은 단순히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 강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원의 국가적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진 출처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역마이용을 위한 증빙이었던 마패 : 위 마패는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마패이며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은 기본적으로 고려의 역로망 중에서도 원과 고려 양국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소통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하지만 일본원정이나 강남(江南)과 고려, 요양행성(遼陽行省) 사이의 미곡 운송 등 고려와 직접 관련된 원의 국가적인 사업이 시행될 때에는 고려의 역로망 운영 전반에 대한 원의 직접개입이 보다 강화되었다. 물론 원의 고려 역로망에 대한 통제 강화가 반드시 원 조정의 직접적인 의도에 의해서만 시도된 것은 아니었다.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의 토드코순 설치 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원에서 설치한 일개 관부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고려의 역로망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원의 일본원정에 고려가 전초기지로 기능하고 있는 이상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의 직접개입은 2차 일본원정의 시기와 1290년대 강남과 고려, 고려와 요동 사이에 대량의 미곡이 운송되었을 때에 보다 명확히 나타났다. 전자의 시기 원 조정은 고려의 남부 일대에 원의 관인(官人)들을 토드코순으로 임명하여 고려의 역로망을 통제하게 하였고, 후자의 시기에는 원의 관리로 하여금 직접 탐라와 압록강구 사이에 수역들을 설치, 관장하게 하여 미곡의 원활한 수송을 지원하게 하였다. 특히 이 수역들은 기존의 고려 역로망과는 관련이 없으나, 요양행성의 기민구제와 군사목적의 식량저장을 위한 원 조정의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새로이 고려에 설치되었다. 물론 수역의 설치를 통하여 진휼미가 고려에 안정적으로 지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고려에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수역 설치의 주목적은 원의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고려 역로망이나 고려에 신설된 수역체계 등은 기본적으로 원의 임박한 국가적 당면목표의 실현과 관련될 때에 원의 보다 강력한 간섭과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때로는 동정원수부의 경우처럼 원 조정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간접개입의 형태로도 나타났지만, 토드코순이나 수역의 설치와 같이 원 조정의 직접개입이 주가 되었다. 그러한 원의 고려 역로망 운영의 개입을 통해서 고려는 치안 유지나 고려민에 대한 진휼 등의 이익을 얻었지만, 그것들은 단지 정책시행의 결과 발생하였던 부수적 효과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원의 간섭과 개입은 철저히 원의 당면한 국가사업과 관련되었기에, 더 이상 원의 이해관계와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즉시 폐기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고려의 사정은 거의 배려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원의 간섭과 개입은 전적으로 고려의 인적, 물적 자원의 투여가 바탕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 역로망 운영의 경우 기본적으로 운영주체는 고려였지만, 원 조정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유사시에는 원의 간섭이 개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 편집자 주 : 이 논문은 제1회 한국역사연구회 학술상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상>으로 선정된 글입니다. (2007년도 시상 대상 : 『역사와현실』제62~65호(2006.12~200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