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 -「일제하 의사계층의 성장과 정체성 형성」

BoardLang.text_date 2008.01.15 작성자 박윤재

나의 논문
「일제하 의사계층의 성장과 정체성 형성」
(『역사와 현실』 63, 2007)


박윤재(근대사분과)


이 글은 1893년 내한한 의료선교사 에비슨의 에피소드로부터 시작한다. 이미 캐나다에서 교수로 활동한 에비슨은 자신을 도와줄 의료조수이자 서양의학을 배울 의학생을 모집한다. 그가 처음 주목한 대상은 젊은 양반들이었다. 일정한 교육을 받았기에 그만큼 새로운 의학을 더 쉽게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그들이 ‘더럽고 지저분한’ 의학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의학이 중인층의 학문이었다는 사실을 에비슨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발길을 일하기 좋아하는 ‘하류층’에게 옮긴다. 그 결과, 그가 가르친 첫 제자 중에는 전통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백정도 있었다.


에비슨  묘비 - (이미지 출처 :
)

  에비슨을 좌절시켰던 한국사회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서울시의사회의 전신에 해당하는 한성의사회는 1933년 자신의 기관지인 ‘한성의사회보’를 발간한다. 그 회보의 서문에서 의사들은 자신들의 학문이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따라서 세인의 존경과 숭배를 받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의사는 더 이상 ‘넘버 쓰리’가 아니었다. 누구나에게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받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이 글을 쓴 첫 번째 목적은 에비슨의 에피소드와 한성의사회보의 서문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추적해보자는데 있었다. 그리고 크게 세가지 점에 주목하였다. 과학과 위생개념의 발전, 의사규칙의 반포, 안정적인 수입이었다.

  과학시간을 통해 익히 들어보았을 코흐, 파스퇴르 등에 의해 서양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바로 세균학의 발전이었다. 그동안 인류를 괴롭혀왔던 전염병의 원인이 명확히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 뒤에서 서양과학의 발전이 함께 하고 있었다.

  1876년 개항을 통해 서양문명과 직면한 한국사회에 서양과학은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은 ‘과학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과학은 새로운 문명시대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의학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세균학의 발전이 전염병의 퇴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1941년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전까지 의사들은 세균에 맞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서양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있었고, 그 지식에 입각하여 각종 위생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예방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각종 소독과 청결활동이 뒤따랐다. 몇몇 전염병은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였다. 그 길을 연 의사들을 사람들은 경외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의 지위향상을 결정지은 것은 과학보다는 법이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의사규칙’의 반포를 통해 서양의학을 자신의 공식적인 의학으로 천명하였다. 한국인들의 질병과 건강을 관리해왔던 한의학은 ‘의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학문으로 전락하였다.

  서양의 역사를 보면, 의사들은 다른 유사업종과 경쟁을 통해 의료분야에서 독점권을 획득해나갔다. 하지만 한국의 의사들은 그런 일에 시간과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그 일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 (이미지 출처 : 두산대백과사전)

지위가 향상된 의사들에게는 안정된 수입이 뒤따랐다. 여학생들은 남편감으로 의사를 선호하기 시작하였고, 학부모들은 자식을 의학교에 보내고자 하였다. 일부 의사들은 전통적인 부자인 지주의 뒤를 이어 신흥 부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주요 병원이었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과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외래는 1회당 적게는 0.4원, 많게는 1원, 입원은 적게는 30여 원, 많게는 50여 원의 진료비를 받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금액은 의사들의 수입을 안정시키는 주요 재원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쓴 두 번째 목적은 전통적인 의사에 비해 지위가 향상된 식민지시기 의사들의 정체성을 파악하자는데 있었다. 식민지인으로서 그리고 상인으로서 의사의 정체성이었다.

  비록 지위가 향상되었다 해도 식민지시기 의사들에게는 식민지민의 고통이 있었다. 그들은 의료정책 수립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일본인에 비해 진로나 영업활동에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차별은 한국인 의사들을 일본에 동화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였다. 한성의사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일본인 의사단체인 경성의사회와 합동하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 그 제안을 거절한 배경에도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감은 의사들을 ‘민족의 선구자’로 나서게 할 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문 영역에서, 즉 의료의 영역에서, 예를 들면 위생 보급과 서양의학 확산에 기여함으로써 민족적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였다. 그 기여는 부분적이지만 동시에 중대한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식민권력 역시 위생 보급과 서양의학 확산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의사들이 비록 민족적인 지향을 가지고 활동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민족적’이라고 평가받기 힘들었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비록 선생님으로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식민지시기 의사들이 한국인들의 전적인 신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진료비에 있었다. 의료소비자들은 의사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으며 심지어 돈 때문에 진료를 거부한다고 비판하였다. 더욱이 한국인에게는 대가와 상관없이 진료를 해주는 ‘인술’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진료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의사들이 실비병원의 수립 등 여러 방안을 추진하였지만 한계는 분명하였다. 서양의학은 교육, 진료면에서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료비와 관련하여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일반 소비자들은 일상적으로 의료를 소비할 수준의 경제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진료혜택을 확대시키기 위한 제도의 마련에 의사들은 참여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 일부 남아 있던 자신들을 돌보던 자비로운 ‘어른’으로서 의사의 모습은 영업 이익을 취하는 일반적인 ‘상인’의 그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 상업화되고 있었던 한국사회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이상이 내 글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식민지시기 새롭게 성장한 여러 계층들의 형성과정, 위상, 정체성 등을 살펴보자는 ‘일제시기 엘리트 연구반’의 공동 연구 노력 중 하나인 이 글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식민지시기 의사들의 성장배경을 정리하고 그 정체성을 식민권력과 소비자라는 대응 관계 속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생각은 있다. 더욱이 식민지시기에 형성된 의사들의 정체성이 해방 이후 국가권력이나 소비자와 관계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 정체성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최근의 사건은, 내 생각에는, 2000년 의사파업이다. 이 파업은 식민지시기부터 이어진 국가권력의 종속에서 의사들이 탈피하고자 한 본격적인 시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인들이 더 이상 의사들에게 전통적인 가치인 인술을 기대하지 않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의사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시기와 달리 그 정체성의 형성에, 국가권력보다는 소비자들의 의지와 힘이 더 많이 개입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글을 발표하고 난 후 다음에 이와 같은 글을 쓴다면 반드시 포함시켜야지, 생각한 것은 비교의 시각이었다. 의사들의 성장이 세계사의 공통된 현상이라면, 더욱이 서양의사들의 성장이 적어도 동아시아사의 공통된 현상이라면, 외국과 비교는 한국의 사례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사가 아닌 세계에서 소비될 수 있는 한국사를 쓰자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그 흐름에 동참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알고 지내던 늦깎이 석사생이 자신의 ‘따끈한’ 석사논문을 보내왔다. 식민지시기 의사들의 정체성을 다룬 논문이었다. 내 글이 큰 참고가 되었다는 인사치레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을 끈 것은 각주와 참고문헌에 인용된 다양한 철학, 사회학 서적들, 외국어로 된 서적들이었다. 내가 앞으로 읽어야 할 목록이기도 했다. 학문은 이렇게 서로 함께 도우며 발전시키는 것인가 보다.

※ 편집자 주 :
이 논문은 제1회 한국역사연구회 학술상 <우수논문상>으로 선정된 글입니다.
(2007년도 시상 대상 : 『역사와현실』제62~65호(2006.12~20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