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조선 전기 收養ㆍ侍養의 실태와 立後法의 정착」

BoardLang.text_date 2007.08.13 작성자 박경

나의 학위논문 -


『조선 전기 收養·侍養의 실태와 立後法의 정착』

(2007, 이화여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박경(중세사 2분과)


  필자는 가족, 여성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사료를 보면서 조선 전기, 특히 15세기에는 왕실과 고위 관료층에서도 이후 시기와 다른 의식과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 전기에 왕실에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과 목적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행해졌던 수양ㆍ시양자녀 입양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시켰고, 이러한 호기심이 발전하여 이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필자가 수양ㆍ시양자녀 입양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이 계후자(繼後子)를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양자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양자를 계후자와 동일시하는 분들도 있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가계계승에 관한 기록인 족보에 계후자 외에 다른 양자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러한 관념이 형성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계후자는 가계를 계승하기 위해 부측(夫側) 동성 친족 중에서 선정한 양자이다. 따라서 이는 부계(父系) 중심의 가계계승질서의 정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계후자를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양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교적인 제사형태가 정착되고, 이에 따라 적장자(嫡長子)에 의한 가계계승이 당연시되었으며, 부계중심의 가족질서가 강화된 조선 후기 사회를 설명하면서 이 시기에 계후자가 보편적인 양자였다고 한다면,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장자 중심의 가계계승 형태가 정착되지 않아 아들, 딸이 모두 부모에 대한 제사 의무를 지니고 있었고, 부계(父系), 모계(母系)를 구분하지 않고 혈연관계에 따라 친족관계의 친소가 결정되었던 조선 전기 사회에서는 계후자를 세우는 일, 즉 입후(立後)가 드물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 전기까지는 양자를 들이는 일이 적었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이 시기 계후자와는 다른 목적과 성격을 가진 양자녀의 존재를 간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박사논문에서 입후가 확산되기 이전 수양자(收養子), 수양녀(收養女), 시양자(侍養子), 시양녀(侍養女)로 불리우는 양자녀를 입양하는 일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고, 수양, 시양의 성격을 15세기 사회의 특성과 연관시켜 밝혔다. 또한 16세기에 조선 사회에 유교적 가족질서가 정착되어나가면서 상류층 사회에서 수양ㆍ시양자녀 입양의 성격이 변화되고, 입후가 증가되어가는 양상이 나타남을 밝혔다.


사진 1) 金孝之 처 黃氏가 계후자, 수양녀, 시양녀에게 田畓을 許與한 문기 (출전 : 역사정보통합시스템 장서각)

  수양, 시양은 고려시대의 입양 풍속이 계승된 형태로, 조선 건국 이후에 법제적으로 3세 이전의 아이를 입양하였는지, 3세가 넘은 사람을 입양하였는지에 따라 각각 ‘수양’과 ‘시양’으로 구분되었다.

  먼저 15세기 수양ㆍ시양자녀의 입양 대상을 살펴보면, 친족을 양자녀로 삼을 경우 부처(夫妻) 양측의 친족이 모두 입양 대상이 되었고, 부처에 모두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을 양자녀로 삼는 경우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처 양측의 친족이 양자녀가 되었던 것은 계통을 구분하지 않고 혈연을 중시하던 친족관계와 자신에게 재산을 준 조상의 손외(孫外)에 재산을 증여ㆍ상속하지 않으려는 관행 때문에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부(夫)와 처(妻)가 각각 이러한 관행에 부합하는 자신의 친족을 양자녀로 삼으려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처와 입양 대상자간에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각각 양자(兩者)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거나 서로간에 친밀감이 형성된 경우 양부모, 양자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신분의 차이도 양부모, 양자녀 관계 형성의 장애요소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입양 대상에 구애를 받지 않았던 것은 입양 목적이 다양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양육을 위해, 혹은 봉양과 사후 봉사(奉祀)를 바라고 양자녀를 삼는 것과 같은 예상 가능한 목적 뿐 아니라 권력자와 결속을 다지려고 하거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정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양부모, 양자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개인들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양부모, 양자녀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수양, 시양의 관계는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 감정과 필요에 따라 형성된 사적인 관계였다.

  이러한 입양 형태는 유교적 사회질서가 정착되어가면서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 우선 16세기에는 상류층에서 성행하던 정략적 성격의 입양이 감소되어 갔다. 또한 이 시기에는 친족 입양의 형태도 변화해 갔다.

  조선 건국 후 정부는 가묘 설립 독려, 승중자의 재산상속분 증액 등 유교적 제사형태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종 19년에는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의 유교적 제사형태 정착을 위해 입후법(立後法)을 제정하였다.


사진 2) 『경국대전』 禮典, 立後條

  입후법은 입후를 강제하는 법이 아니라 입후의 기준과 절차를 규정한 법이었다. 따라서 입후법 정착을 위한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법 제정 직후에는 입후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유교적 제사의식에 따른 제사를 행하는 집안이 늘어가면서 16세기에는 수양자, 시양자의 입양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자식이 없는 부처가 부측(夫側) 동성 친족 중 소목에 합당한 자를 양자로 삼아 부처의 봉사를 맡기고 처의 재산까지도 증여ㆍ상속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유교적 제사형태가 정착되어가면서 부처가 각각 자신에게 재산을 준 조상의 후손에게 재산을 증여ㆍ상속하던 종래의 관행이 허물어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변화라 할 수 있다. 계통을 구분하지 않고 혈연을 중시하던 친족관계가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이 시기 입후법의 정착을 가로막고 있었던 장애요소가 제거되어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들이 없는 사람이 가계계승을 위해 부측(夫側) 동성 친족을 계후자로 세우는 입후가 정착되어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가족사 연구에서는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의 가족질서가 다르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본 논문에서도 15세기 수양·시양자녀 입양 사례를 통해 조선 후기와는 조선 전기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조선 전기에 이미 입양 형태가 변화해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추적하면서 15세기 말∼16세기에 법의 영향과 사대부들의 의식 변화에 따라 봉사, 재산상속, 입양 형태와 같은 여러 사회운영체제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변화해나가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사회 운영의 주요 시스템 중의 하나인 친족관계의 틀이 변화해 가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법에 의해 어떻게 사회질서가 변화해가는가, 사회 변화에 있어서 각각의 사회운영체제가 어떻게 맞물리면서 서로 영향을 주는가에 대하여 구체적 실상을 밝히는 연구는 앞으로도 더욱 심화시켜 연구해나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