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정치사상사』(태학사, 2013) 도현철(중세1분과)
이 책은 이러한 문제 의식 하에 3차례 간행된『삼봉집』의 형성의 문헌 자료와 자료 인용의 특성을 살펴 이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림 1] 『조선전기정치사상사』(태학사, 2013) ⓒ태학사 『삼봉집』정조본은 다른 개인 문집과는 달리 동시대의 몇몇 인물이 문집 간행에 참여한 사실이 명시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즉 저(著), 선(選), 비(批), 정(訂), 주(註) 등 참여 성격을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권1, 권2의 시는 정도전이 쓴 것 가운데 성석린과 권근이 선별하고 교정한 것이다. 그렇다면『삼봉집』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이러한 체제로 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정조대 학사들이『삼봉집』을 삼간(三刊)하면서 추가한 것인지 규명되어야 한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권근과『삼봉집』과의 관련성이다. [그림 2] 『삼봉집』(봉화정씨문헌공파대종회 소장본) ⓒ문화재청 인터넷 문화유산정보 권근은 『삼봉집』 권1의 부와 시에 ‘비(批)’,『경제문감』에 ‘정(訂)’,「심기리편」과「심문천답」에 ‘주(註)’를 한 인물이다. 이밖에 권근은『삼봉집』의 서문 뿐만 아니라「심기리삼편」ㆍ「심문천답」ㆍ『감사요약』ㆍ『불씨잡변』ㆍ『경제문감별집』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정도전과 권근은 고려말에 왕조 개창에 대해 찬반이 엇갈렸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치적 현안 문제에 대하여 견해 차이를 보였다. 여선교체기에 정치적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현격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권근이 정도전과 결합하여『삼봉집』편찬에 관여한 이유는 무엇이고, 얼마만큼 관여했는지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경제문감』은 경제(經濟)에 귀감이 되는 문장을 모았다는 의미인데, 경제의 귀감이 되는 문장의 출전이 무엇인지도 밝혀져야 한다.『경제문감』은『조선경국전』과 함께 새로운 왕조의 정치체제 ․ 권력구조의 기본 골격을 완성한 것이므로,『경제문감』의 출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도전의 지향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저서를 내용적으로 검토 ․ 분석하는 것이 직접적 접근방법이라고 한다면, 그의 저서에 인용된 전거를 분석하여 그의 사상적 토대와 배경을 규명하는 것은 간접적 접근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용된 전거를 분석하여 그것들에서 보이는 공통된 인식의 토대를 추출해 낼 수 있다면, 직접적 접근방법을 통해 정립된 정도전 사상의 연원과 그가 지향했던 정치 사회적 비전을 보다 확고하게 조망할 수 있는 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정도전은 자기 정체성의 기반인 정통 주자학뿐만 아니라 주자학에서 배격한 사공학(事功學) 계열의 저술도 적극 활용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정도전은『삼봉집』을 집필하면서『주례정의』ㆍ『산당고색』ㆍ『서산독서기』등에서 전체의 60퍼센트, 즉 5분의 3 이상의 전거를 밝히지 않고 원용하였다. 이는 역성혁명기 혹은 조선 건국기라는 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에서 의도적으로 전거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리학적 정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한 정도전은 그와 관련된 집대성된 연구 성과가 필요했고 당시 그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사공학 계열의 유서(類書)뿐이었다. 성리학을 정학·정통의 지배 이념으로 강화해야 할 왕조 교체기에 주자가 정면으로 비판한 왕안석 등 사공학 계열의 성과를 드러내놓고 활용하는 것에 정도전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 출사한 권근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정도전과 협력하고자 하였다. 정도전의 새로운 국가 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고자 정도전의 구상이 담긴 주요 저서에 서문을 쓰면서 그것이 갖는 의의를 설명했다. 서문에서 권근은 성리학적 도통론의 입장에서 정도전의 학문적 특성을 밝히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불씨잡변』의 서문에서는 정도전이 불교의 해를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제시하여 맹자를 계승하였다고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권근은『경제문감』의 인용전거 표시가 부정확함을 알면서도 이에 편승하였다. 예컨대『경제문감』의 ‘도전안(道傳按)’은『주례정의』의 ‘우안(愚按)’ 곧 저자인 왕여지(王與之)의 말에서 온 것인데, 권근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였다. 『경제문감』에는 ‘봉화 정도전 저, 권근 정’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저자인 정도전이 어떤 이유로 전거를 잘못 표시하였고, 권근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동조하고 수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3] 삼봉집 경판고(봉화정씨문헌공파대종회 소장본) 14권 7책 분량의 총 228판 목판으로 정조 15년(1791) 발행 ⓒ문화재청 인터넷 문화유산정보 성종 연간에『삼봉집』이 중간되어 널리 읽히지만 정도전의 사상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천하의 통사는 오직 문묘뿐이라고 한 정도전이지만, 문묘에 배향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적 가치도 인정받지 못했다. 정통 성리학에 충실한 사림파가 등장하고 선조 이후 주자학의 시대가 도래한 뒤에도 그런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경장을 주장한 이율곡이나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퇴계 역시 정도전을 주목하지 않았다. 16세기 사림파가 들어서면서 조광조(1482~1519)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의리와 명분, 실천을 중시하고 인륜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런 입장은 제도와 법제를 강조한 정도전의 사상과 일치되기 어려웠고, 실천적 절의 정신이 강조되면 될수록 정도전과 조준, 윤소종 등 조선의 개국 공신들은 조선 성리학에서 배제되었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성리학의 절의가 더욱 강조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을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중국 송나라 사회의 산물인 성리학을 14세기 고려 현실에 맞춰 변형하면서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였다. 또한 『주례』를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의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정치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의 구상은 조선 왕조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 성리학 지배질서의 원형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특히『경제문감별집』에 보이는 성리학적 군주상은 15세기의『고려사』, 17세기의『휘찬여사』, 18세기의『동사강목』의 사론으로 반영되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