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속의 백제 정치제도』(일지사, 2013)

BoardLang.text_date 2013.08.26 작성자 정동준

『동아시아 속의 백제 정치제도』(일지사, 2013)


 

정동준 (고대사분과)


   학위논문을 낸지 벌써 4년 반이 흘러 책이 출간되었다. 아예 출간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1~2년 내에 출간하는 최근의 추세를 감안하면, 꽤 많이 늦었다. 학위논문의 미발표 논문들을 공간하는 데에 시간을 소비한 데다가, 일부는 일본 학술지에 발표하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요구하신 추가사항까지 반영하느라 더욱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책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고, 다시 1년 가까이 작업한 끝에 가까스로 출간할 수 있었다.



[그림 1] 『동아시아 속의 백제 정치제도』(일지사, 2013)  ⓒYES24 인터넷 서점(   책 표지 그림은「양직공도 백제국사조」

   학위논문을 책으로 낼 때 시간을 끌면 힘들어진다는 말을 절감한 세월이었다. 새로운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물론, 드물게는 새로운 자료까지도 등장하여 수정․보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본래 내용의 수정․보완도 해야 하였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요구하신 지방통치제도 문제를 반영해야 했으며, 전체적인 체제와 문장도 다시 손보게 되었다. 그렇기에 학위논문과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학위논문에서 많은 부분이 수정․보완되었다는 것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웹진에는 이미 “나의 학위논문”을 통하여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한 바 있기에, (/webzine/read.php?pid=28&id=515) 학위논문의 내용을 다시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필요한 때에 부분적으로 다시 거론하는 것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수정․보완되고 추가된 부분을 위주로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박사학위논문과 제목이 바뀌었기에, 각 장절의 제목도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지방통치제도에 해당되는 내용은 물론 보론이 추가되었고, 거기에 박사학위논문에서는 소략하게 다루었던 율령 반포 부분을 일본 유학 중에 작성한 논문의 내용을 요약으로 하는 것으로 하여 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다.

   또 책으로 출간하다 보니 머리말이 추가되었는데, 두 번이나 일본에 유학하여 그 동안 워낙 신세진 분들이 많아서 본의 아니게 길어졌다. 그렇더라도 머리말의 절반 이상은 책을 작성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것이기에, 머리말로서 손색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먼저 목차의 경우 1장은 ‘좌․우보(左․右輔)와 좌장(左將)․좌평제(佐平制)의 성립’에서 ‘초기 관제(官制)의 성립’으로, 1장 1절은 ‘좌․우보의 설치’에서 ‘백제 국가의 형성과 좌․우보의 설치’로 바꾸는 등, 각 장절 및 세부 목차를 보다 구체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국가 형성’ → ‘대왕전제체제(大王專制體制)의 성립’ → ‘22부사(部司)체제’ → ‘6좌평(佐平)-18부체제’라는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방통치제도는 한성시대의 지방통치체계가 2장 1절의 맨 뒤에, 담로제(檐魯制) 관련 내용이 3장 1절에 추가되었고, 5방제(方制) 관련 내용이 3장 3절로 새롭게 삽입되었다. 이러한 추가작업을 통해 각 시기별로 변화하는 지방통치와 그것의 제도화과정, 그리고 중앙정치와의 관련성을 설명할 수 있었기에, 박사학위논문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림 2]  나주 신촌리 금동관(羅州 新村里 金銅冠, 국보 295호)  ⓒ정동준 

한성시대의 지방통치체계는 부(部)나 촌(村)보다는 성(城)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지방관을 파견하기보다는 유력한 지방세력을 임명하여 현실적 지배력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출발하였다고 추정되었다. 또 모든 성이 지방통치의 단위가 아니기에, 군사적 방어거점으로서의 성과 지방통치의 거점으로서의 성을 구분할 것을 제안하였고, 그 구분기준은 병사 이외에 민(民)이 거주하는가였다. 따라서 축성에 뒤따르는 사민(徙民)은 성을 지방통치의 거점으로서 활용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으로 주목되었다.

   담로제는 봉작제(封爵制)를 한시적 지방통치의 방편으로 활용한 왕ㆍ후제(王ㆍ侯制)와 달리,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 지배의 형태로서 5방제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다만 지방관 파견의 초기적 형태이기에, 그 대상이 자제(子弟)ㆍ종족(宗族)으로 제한된 것이었다.

   5방제는 군사적으로는 방(方)-군(郡)-성, 행정적으로는 방․군-성․읍(邑)의 통속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각 단위의 지방관은 방이 방령(方領)과 방좌(方佐), 군이 ‘군장(郡將) 3인’으로 표현된 군장․군령(郡令)․군좌(郡佐), 성이 성주(城主) 또는 도사(道使), 읍이 도사와 읍좌(邑佐)라고 추정되었다. 특히 방과 군의 직접 지배는 실현되었으나, 성․읍의 경우 절반 이상이 여전히 유력한 지방세력을 임명하여 현실적 지배력을 인정하는 방식으로서 지방관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보론은 4장 1절에서 중요한 사료로서 사용되는『한원(翰苑)』 인용『괄지지(括地志)』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논문을 추가하였다. 이것은『동방학(東方學)』과 함께 일본의 동양학 양대 학술지로 평가되는『동양학보(東洋學報)』에 게재된 일본어 논문을 번역하면서 일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그 내용은『한원』 인용『괄지지』는 624년~630년대 초반의 백제 정세를 전하는 동시대적 성격의 사료이기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다만 현존하는『한원』이 필사본(筆寫本)이어서 필사과정에서 오사(誤寫)가 많기에, 교감(校勘)을 통해서 바로잡아야만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였다.


[그림 3] 『한원』번이부 (太宰府 天滿宮 寶物館 소장)  다자이후(太宰府) 텐만구(天滿宮) 홈페이지()

율령 반포 부분은 박사학위논문에서 서진(西晉)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영향으로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 전후에 된 것이라기보다는 진한율령(秦漢律令)의 바탕 위에서 아신왕(阿莘王)․전지왕대(腆支王代) 즈음에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의 율령 반포가 태시율령이 아닌 후한(後漢) 또는 조위(曹魏)의 소위 ‘원시율령(原始律令)’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고,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은 중국문명의 매개자(媒介者)로서 낙랑군(樂浪郡)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임을 논증한 논문이 올해 1월에 게재 확정되었기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입장을 수정․보완하였다. 참고로 고구려․백제의 율령 반포에 대한 논문은 올해 6월에 일본의『국사학(國史學)』이라는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이 밖에 4장 1절 부분은 일본의『조선학보(朝鮮學報)』에 게재한 논문을 번역하였는데, 번역과정에서 수정ㆍ보완한 것도 있지만, 논문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한국고대사가 상대적으로 낯선 일본의 독자들을 위해 많은 설명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또 심사자가 추가적인 실증을 통한 논거의 보완을 요청하였기에, 새로운 사료가 추가된 것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수정․보완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미발표 논문 중 일부와 지방통치제도 관련 및 보론 부분 등의 발표를 전부 일본 유학 중에 하다 보니, 일본 유학 중에 나온 새로운 국내 연구성과가 충실히 반영되지 못하였다.

다만 박사학위논문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시론적 성격이 강하고,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의 폭을 넓히고, 그렇게 폭이 넓어진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시도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