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 김종복(고대사 분과) 연구자는 누구나 자기의 전공 주제에 대해 왜 그걸 택했느냐고 질문받기 마련인데, 발해사의 경우 워낙 사료가 적고 전공자도 희소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더 많이 받는 편이다. 답변도 그때그때 달랐던 것 같은데, 그 답변들을 모아본다면 이번에 낸 『발해정치외교사』를 소개하는 글이 될 듯싶다. 어린 시절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만화책을 포함하여 책읽기에 취미를 붙였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때 읽는 책은 대부분 위인전 아니면 세계명작이다. 흔히 독서를 간접경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위인전과 같은 역사물을 통해 현재와 다른 과거를 엿보고 세계명작이라는 소설을 통해 현실과 다른 허구의 세계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특히 역사소설을 좋아했던 것은 과거와 허구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는 『연개소문』 같은 고대사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을 즐겨 읽으며 국수주의에 가까운 민족주의에 심취했고, 고등학교 때는 『장길산』, 『객주』, 『토지』 같은 조선후기 또는 근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역사소설을 읽으며 ‘민중’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때 역사소설가도 꿈꾸었지만 이내 재능 부족을 절감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소설의 실제 배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점차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대학도 사학과를 택하였다. 80년대 후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지만 한국사에서 관심이 끌렸던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주제였다. 하나는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가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연이어 겪은 조선왕조는 어떻게 망하지 않고 이백년이나 더 존속하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마지막은 유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유교적 지식인은 왜 박은식이나 신채호, 김창숙 같은 사람밖에 없었을까, 그 많은 유학 지식인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하는 점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청소년기에 누구나 느꼈듯이 분단된 약소국이라는 우리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데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세 가지가 특별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시간적으로 고대부터 훑어내려 가며 구체적인 전공을 택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첫째 관심사에서 시선이 신라가 어떻게 승리했는지보다 고구려가 왜 망했는지로 옮겨지면서 자연히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 그 유민들이 세운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광할한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영광스러운 우리 민족이라는 어린 시절의 생각도 잠재되어 있었다. 그럴 즈음 이우성 선생의 「남북국시대와 최치원」(1975)과 김영하 선생의「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시각」(1988)을 읽었는데, 이 논문들은 발해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한편 고대사의 문제의식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앞의 논문이 민족주의에 입각해 분단된 현실과 거기에 매몰된 지식인을 비판하였다면, 뒤의 논문은 한국사에서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온 ‘통일신라’론을 민중적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비판하고 ‘남북국시대’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제시하였고 할 수 있다. 10여년의 시차를 둔 두 논문도 한 사례가 되겠지만,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은 거칠게 말하면 1980년대를 기점으로 강조점이 민족에서 민중으로 옮겨졌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역사학이 고대사나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본격적으로 연구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민중' 중심의 근현대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피지배층을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적극적인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에서 평소 관심을 갖던 발해사를 볼 때 나는 약간의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며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족인데, 피지배층의 입장에 선다면 과연 발해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중국의 발해사 연구가 같은 논리에서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당혹감도 적지 않았다. 주변 친구중에는 짖궂게 발해사를 공부하려면 동양사로 진학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놀리기도 하였고, 사료도 없는 발해사에서 뭐 할게 있냐는 소리도 적지 않게 들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오기가 생겨서 발해사를 민중적 시각에서 한국사임을 증명할 테니 두고 보라고 큰 소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역사학은 사료를 토대로 과거를 복원하고 이해하는 것인데,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발해사를 공부하려고 보니 정말 사료의 부족을 절감하였다. 또한 발해사에 대한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과의 시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지도 자신이 없었다. 석사논문은 그래도 사료가 있는 편인 발해의 등주 공격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썼지만, 과연 발해사로 박사논문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적지 않았다. 이즈음 뒤늦게 접한 이성시 선생의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남북국시대’론의 검토를 중심으로--」(1988)는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에 입각한 발해사 인식을 비판하였다. 앞의 두 논문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지적 충격을 받았는데, 특히 귀속 문제에만 집착하는 연구 경향이 발해사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이 갔다. 발해사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하여 귀속 문제에서 한걸음 벗어나 보니, 발해사 이해의 기초가 되는 정치사의 전개 과정이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이 점에 착안하여 정치세력의 추이를 중심으로 발해 정치사의 전개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였다. 또한 발해의 정치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련하에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제의 일관성을 위하여 대당정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좁혀, 2003년 「발해 정치세력의 추이--대당정책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을 제출하였다. 여기서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정책의 추이를 매개로 발해의 건국 과정을 살펴본 다음, 발해의 건국집단이 8세기 초반 대당정책을 둘러싸고 반당파와 친당파로 분열되었으며, 후반에는 왕권중심의 지배체제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9세기에 발해가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렇지만 발해가 당 못지않게 활발하게 교류한 일본과의 관계나 발해 멸망 과정 및 원인 등은 전혀 다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학위논문을 제출한 후에는 이 주제에 집중하였다. 대일관계는 발해 국서를 둘러싼 발해와 일본의 외교적 갈등과 해소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발해가 거란과 충돌을 벌인 요동 지역이 완충지대였다는 측면에서 발해의 멸망 과정을 검토하였다. 한편 학위논문에서 미진하게 다루었던 발해의 국호 및 책봉호 문제를 통해 대당관계를 새롭게 살펴보기도 하였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결국 정치와 외교를 중심으로 발해사의 전개과정을 개관한 것이므로, 이번에 책을 내면서 감히 『발해정치외교사』라고 제목을 달아 보았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새삼 느낀 것은 발해 자체의 사료가 거의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해사 연구는 그와 교섭하던 당이나 일본의 사료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타자의 시각에 의해 굴절되어 있는 발해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점을 나름대로 유념하여 발해사의 주체적 입장에서 그 전개과정을 복원하고자 애썼는데 그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다. 앞으로 장기적으로는 신라의 대당관계 및 대일관계를 공부하며 발해의 그것과 비교함으로 한국사 나아가 동아시아사에서 남북국시대의 설정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전에 가졌던 조선 후기와 근대사에 대한 관심사의 연장 선상에서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발해를 왜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제일 먼저 주목하였는지, 또 우리를 포함한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삼국이 각자 근대로의 전환기에 발해사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것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하는 문제들도 살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