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 임경석 (근대사 분과) 「나의 책을 말한다」 코너에 저도 들어 왔습니다. 얼른 책을 내서 저 반열에 들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을 실현했습니다. 기쁩니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원 선생님들의 저술과 나란히 제 책을 올릴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그러나 정작 제 책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니 적잖이 망설여집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는군요. 책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부적절한 듯 합니다. 제 책을 읽어주실 독자분께 김빠진 맥주를 드리는 꼴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집필 동기나 의도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니, 그것도 너무 진부한 듯 해서 내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 책을 쓸 때 내 맘 속에 맴돌던 문제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코너의 독자는 주로 우리 연구회 회원들일 터인데, 그들은 동료 연구자가 작업 도중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 관심이 있을 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 맘속에 맴도는 문제란 역사 글쓰기에 관한 것입니다. 역사 글쓰기는 역사학의 실천성을 추구한다는 우리 연구회의 목표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역사학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화하려면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진 역사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간의 글쓰기 관행은 학계 내의 폐쇄 회로 속에서 연구 실적을 높이는 데에는 도움되겠지만, 역사학의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글쓰기를 혁신하는 문제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왔습니다. 이 책을 쓰면서 저는 다섯가지 요소가 제 글쓰기 속에 농밀하게 녹아 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중 첫번째는 사료에 밀착하는 일입니다. 사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수행하는 일상사입니다. 역사학의 고유한 방법이자 숙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는 중에 제가 활용했던 주 사료군은 일본 관헌 자료와 코민테른 문서, 두 종류였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혁명운동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과 그 운동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들이 남긴 기록입니다. 상이한 시선에서 작성된 두 종류의 사료를 충돌시키면 화려한 불꽃이 피어 오릅니다. 저는 그 불꽃을 그리려고 애썼습니다. 둘째 요소는 언어 표현의 적절성입니다. 좋은 문장을 쓰고자 노력했습니다. 첫번째 요소가 객관 세계를 형상화하는 역사학의 방법에 해당한다면, 이 요소는 형상화의 수단에 해당합니다. 좋은 문장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정확한 문장을 뜻한다고 봅니다. 주어와 술어를 반드시 일치시킨다든지, 잘 알지 못하는 어휘는 사용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에 신경을 쓴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단문을 위주로 하되 장단을 섞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한국인은 일상 언어 생활에서 영어의 관계대명사나 동명사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문과 장문을 중첩시킨 기나긴 문장은 우리 글쓰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문인들 중에도 길고 복잡한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관촌수필』의 이문구나, 단 한 문장으로 소설 한편을 써낸 「방란장주인」의 박태원 같은 분들이 있지요. 혹시 압니까. 저도 수련을 거듭하면 그분들의 경지에까지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들을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 단문을 위주로 하되 장단을 섞는다는 제 방식을 좀더 고집하겠습니다. 그것을 제 문체로 삼고자 합니다. 셋째 요소는 역사적 대상의 합법칙성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역사적 사건과 역사속 인물들의 행위들은 일정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역사적 대상의 상호 관계와 인과율을 발견하고 그를 설명하는 일에 힘을 기울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책을 읽으면서 제가 던진 크고 작은 의문과 그에 대한 저 나름의 해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성취가 적습니다. 이 요소에 관해서 말하자면 저는 우리 회원 선생님들께 많이 배우는 편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수걸 선생님이 지방 정치사 분야에서 수립한 학설과 같은 것을 운동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요소는 거의 모든 역사 연구자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들입니다. 학계에 제출되는 우수한 연구 성과들은 예외없이 위 요소를 고루 구비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러고자 합니다. 위 요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더욱 힘을 기울일 작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에 더하여 두가지를 더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행위와 결합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형상화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식의 상관성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상관성에 대한 저의 옛 이해 방식이 기계적이었음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목하게 됐습니다. 톰슨의 책이 도움을 줬습니다. 톰슨을 통해서 ‘토대와 상부구조’는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비유적인 것임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사이의 상관성을 정태적이자 기계적인 모델로 오인케 할 우려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행위와 그에 결합되어 있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즈음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내면 의식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얼마나 매력있는지 다시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는 역사 속 인물의 성격, 사고, 의도, 선택을 면밀하게 형상화했습니다. 그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읽은 뒤에 제가 써 놓은 독서노트에는 이런 구절이 있군요. “나는 그동안 역사를 쓰면서 한번도 이런 전략을 구사한 적이 없다. 심지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이! 등장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한번도 기울인 적이 없다니……” 저는 그를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역사 서술 속에 사람들의 성격, 생각, 감정, 의지 등을 포함시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일본 파시즘의 논리와 심리」라는 글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아, 파시즘의 ‘심리’를 이렇게 묘사할 수도 있는거구나!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역사 속 인물의 내면 의식을 일부나마 형상화하고자 힘썼습니다. 체포된 박헌영이 경찰과 검사의 거듭된 취조 과정에서 어떻게 말을 바꿔 가는지를 추적했습니다. 그를 통해 진술 번복 과정에 숨어있는 그의 의도와 선택, 의지를 해명하고자 했습니다. 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은 옥중에서 정신 이상이 됐습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노인이 된 김철수는 회고록 속에서 분노와 기쁨을 격정적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그와 같은 감정이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되돌아 보니 아직 성취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다섯번째 요소는 플롯에 관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6대 요소 가운데에서 플롯을 가장 중요하다고 손꼽았습니다. 저는 역사 글쓰기에서도 플롯이 제 1위적이며 가장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고 판단합니다. 왜 그러한지를 논증하는 일은 긴 지면을 요하는 문제이므로 다른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책 속에 두어 종류의 플롯을 도입해 봤습니다. 그 플롯 유형 가운데 하나는 1인칭 시점에 관한 것입니다. 역사 서술을 3인칭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에서 이끌어 갈수는 없는가. 저는 이 질문을 스스로 내걸고 다각적으로 해답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오직 한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가지 예외란 역사가 자신을 화자로 내세우는 경우입니다. 저는 윤자영에 관한 평전을 그와 같은 플롯에 의거해서 썼습니다. 영화 종사자들이 잘 쓰는 말로 하자면 ‘만남’이라는 컨셉을 사용했습니다. 역사 연구자인 내가 역사 속 인물인 윤자영과 네차례 조우하게 된 과정을 글쓰기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또 다른 플롯 유형도 사용했습니다. 실마리 제시형이라고나 할까요. 논의의 단초가 되는 텍스트를 먼저 제시한 뒤에 그를 실마리삼아 역사학적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이 책에 수록된 김철수, 남도부, 안병렬에 관한 글들은 모두 이 플롯 유형에 의거한 것입니다. 이 유형에 착안한 계기가 있습니다. 저는 작가 이문열의 가치관과 행태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데, 예전에 그러한 느낌이 강하지 않았을 때에 『황제를 위하여』라는 소설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실마리 제시 유형의 플롯이 매우 매력있는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셈이지요. 이 책을 쓰면서 제 맘 속을 잠시도 떠나지 않던 관심사에 관해서 이제 거의 다 얘기했습니다. 제 글쓰기의 혁신을 돕는 다섯가지 요소에 관해서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첫번째 요소는 역사적 형상화의 방법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요소는 형상화의 수단에 관한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나머지 세가지는 모두 다 역사적 형상화의 대상에 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각 요소에 대한 좀더 면밀한 성찰을 계속해 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다음 번에는 좀더 만족스런 저작을 내고 싶습니다. 「나의 책을 말한다」 코너에 다시 한번 기고할 기회가 올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