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 신병주(중세사 2분과) 조선시대 사상사를 보는 일반적인 시각은 어떨까? 우선 다가오는 것이 주자성리학에 대한 지나친 집착일 것이다. 주자성리학의 발상지인 중국에서 보다도 훨씬 더 주자학을 신봉했던 나라, 주자학의 관념철학, 의리론과 명분론에 모든 운명을 걸었던 나라, 특히나 중ㆍ고등학교 교과서를 장식했던 이기논쟁이나 사단칠정논쟁과 같은 이론논쟁 들은 조선시대 사상사는 ‘이론적이고 논쟁적이다’라는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이황이나 송시열 등 조선시대를 주도해갔던 학자들의 모습에서도 학문에 모든 것을 걸었던 지성, 선비의 고고한 이미지는 떠오를지언정 이들이 민생 문제에 적극성을 가지고 현실을 타개해갔던 모습은 얼핏 떠오르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후기 실학은 성리학의 모순점을 극복하는 오아시스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성리학자와 실학자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리학과 실학의 구분점을 찾는 작업도 아리송해진다. 결국 조선시대 사상사연구에서 성리학 그것도 지나치게 주자성리학 관점으로만 파악하는 기존의 연구 시각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론의 도입의 필요성이 요청된다. 필자는 우선 조선 중ㆍ후기 사상사의 흐름을 보다 다양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기존에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것 보다 조선시대 사상사의 폭과 넓이는 훨씬 더 크다는 점이 부각되면 보다 생동감 있게 조선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흐름의 단서는 조선중기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했던 남명학파의 사상에서 일단 포착할 수 있다. 성리학의 이론논쟁을 盜名欺世(이름을 도둑질하여 세상을 속임)하는 행위로 비판하면서, 실천적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남명의 敬義 사상은 문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의병장이 바로 남명의 문인들이었다. 남명학파는 首門인 정인홍이 광해군대 정국의 실세로 참여하면서, 남명학파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현실에 구현되었을 때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주었다. 남명학파와 함께 조선중기 사회가 상당 부분 개방적인 성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잣대가 되는 것이 화담학파이다. 개성을 중심으로 학문을 형성한 화담 서경덕의 사상은 自得으로 형성된 만큼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개성이 가지는 해안적 기반이나 상업 중시 성향 이 문인인 이지함에게 이어진 점과 화담의 문하에서 서기, 박지화 등 도가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인물이 배출된 것 등도 조선중기 사상사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필자는 16세기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사상적 흐름에서 조선중기 사상사가 기존에 이해되어진 것 보다는 多岐한 측면이 있음을 전제하고, 이러한 흐름이 두드러진 정치세력이나 학자그룹 들을 따라가 보았다. 17세기 전반의 북인관료들은 주전론, 은광개발 등 상업적 마인드가 강했으며, 이는 전란 후 피폐해진 國富를 농업 경제만이 아닌 상업, 유통 분야에서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지함, 김신국 등에게서 두드러진 國富증대책은 마치 서양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國富論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17세기 중ㆍ후반의 근기남인 학자에게서는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사상적 흐름을 계승한 측면이 두드러졌으며, 17세기 후반 소론 학자들은 절충적 성향을 가지고 현실 가능한 정책을 수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흐름들은 조선후기 사상사가 의리론과 명분론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박학과 개방성의 측면은 18ㆍ19세기에도 이어졌다. 18세기 학자 이익이나, 19세기의 학자 이규경의 학풍과 사상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잘 구현되고 있다. 『성호사설』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단순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전통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려는 시대의 지향을 담은 것이었다. 이 책은 이제까지 사상사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학자그룹들의 학풍과 사상을 통하여 조선 중, 후기의 사회가 좀더 다양성을 견지한 사회라는 점과 개방적인 측면이 있음을 조명하였다. 이러한 연구가 정치적으로 失勢하여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많은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조선사회를 보다 역동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