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BoardLang.text_date 2006.12.08 작성자 조재곤

 나의 책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2005, 푸른역사)


                                                        조재곤(근대1분과)



21세기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 근대화 과정을 심각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때 정권 담당자 차원에서 강조되었고 지금까지도 ‘핫 이슈’로 남아있는 ‘세계화’ ‘국제화’가 과연 우리에게 올바르게 접맥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근대사의 전개과정이 서구와는 달리 외세의 압력이라는 커다란 바위에 봉착하였던 것이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봉건적인 여러 가지 유제까지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같은 조건이 모두 해결되어야만 우리의 발전도 자연스럽고 역사의 합목적적 발전방안과 유사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두 가지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각층에서 노력하는 가운데 가장 큰 문제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압박이었고, 그 결과 36년간에 걸친 그들의 식민지가 된다는 사실에서 모순이 극대화된 것입니다.


또한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미소의 냉전구도 아래서 북한의 경우 김일성 1인 지배체제가 형성되었고 남한은 이승만에 의한 친미 반공정부가 형성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남한에서는 과거 일제에 협력 내지 적극적 친일활동을 펴던 자들이 재기(再起)하였고 이들이 과거 자신들의 행적에 대한 별다른 반성과 참회가 없이 각 방면에서 과거와 유사하거나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빈 공간을 차지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화인사들과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마련하면서 자신들의 행태를 합리화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나아가 자신들의 과거 활동 전반은 현재의 경제성장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국가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대중에게 선전하였습니다. ‘대동아 공영권’과 ‘반미’를 외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그늘 아래서 성장하던 자들이 해방 이후 역설적으로 ‘배일’과 ‘친미반공’을 새롭게 부르짖으며 자기 활로를 모색하는 모습들은 이후 우리들의 가치관을 크게 왜곡시키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곤 하였습니다.


이와는 다르지만 ‘민족주의’라는 단선적인 시각만을 강조하면서 결과만을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민족과 반민족’ 또는 ‘친일과 애국’ ‘협력과 저항’ 등을 주요 대립구도로 설정하였고, 그 잣대에서 계기적 입장과 환경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도외시하면서 ‘선 굵은’ 연구 성과물들을 꾸준히 만들었지요.


우리 내부에서도 분명한 규정을 하지 않더라도 음양으로 이러한 이해방식이 뿌리 깊게 녹아 있다고 보입니다. 광폭한 일제 식민지와 민족 내부의 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우리의 현실에서는 큰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일도양단(一刀兩斷)’ 식의 평가나 민족만이 중심이 되는 잣대에서는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 매우 어렵게 될 뿐더러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경직된 논리제시와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많은 후학들에 의해 드라이한 역사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개화를 위해 불철주야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자신들을 전혀 이해하지 않았던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정치적 공간에서 활동하면서도 입장 차이가 컸던 인물들에까지 공격의 화살이 종종 날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홍종우와 김옥균에 대한 평가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역사상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조건에 규정되어야 한다고 저는 평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에서는 당시의 활동과 후일의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근대사에서 그 흐름에 걸 맞는 주체들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역행하는 사람들이 현대사를 ‘독단’하였다는데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점에서 혼란이 따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또 앞의 경우와는 입장을 달리 하지만 오늘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인물의 평가 문제를 과거의 고정화된 관념에서 출발하여 한 인물을 과대 포장함으로써 그와 견해를 달리하는 자에 대해서는 충분한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지 전개상 역사성을 전혀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후자는 역사의 평가에 있어서 희생물이 되는 셈이지요.


그 같은 예는 김옥균과 홍종우의 상반된 역사적 평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주요한 역사적 개념을 규정하는 북한에서는 그간의 여러 차례 변경을 거쳐 갑신정변을 ‘근대 부르주아 혁명운동’으로 설정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남한사회에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들 간에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최초의 혁명적 진보적 개혁운동으로 보고,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는 한편 봉건제 청산을 위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전개하였다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김옥균의 외세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변혁주체로서의 일정한 역할은 인정하는 편입니다.


반면 이와 대비시켜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홍종우는 대다수 사람들이 갑신정변 주도인물인 김옥균 암살범이자 독립협회와 대척점에 있던 황국협회를 주도하던 반(反)개화, ‘테러리스트’로만 이해되고 있던 인물입니다. 당연히 그 평가는 부정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의 평은 대체로 공명심과 관직을 얻기 위한 일환으로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하였다고 말하고 있었지요.


때문에 최근까지도 그를 ‘자객’ ‘민씨정권의 앞잡이’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는데 활약한 자’ 혹은 ‘난동자’ ‘흉도’ ‘흉한’ ‘간적(奸賊)’으로 규정, 보수반동 성향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을 뿐 그의 활동과 사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식민지화 과정에서 그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일제 측과 식민지 시대까지 생존하여 그들의 비호 아래 지배력을 행사하던 일부 친일 문명개화론자 및 이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의 악의적인 왜곡, 그와 결부된 이후 연구자들의 이해부족, 개화지식인에 대한 ‘환상’ 등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인식은 온존하고 있지요. 물론 조선조 말기 관인사회에서 그에게 고위관직을 통한 ‘출세’의 욕구가 적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부터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자생적 근대화를 추진해 나가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가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때문에 김옥균과 홍종우의 차이는 개화와 수구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처하는 방식과 국내 현안의 해결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김옥균과 문명개화론자의 입장에서 홍종우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지요. 그러나 반대로 홍종우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해보는 방식은 어떨까요?


전문 연구자도 바꾸기 힘든 것이 고정된 사상(史像)인데 하물며 이들의 연구에 의해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촉매를 받는 일반 독자들은 더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스테레오 타이프’를 조금 탈피하여 당시 시대상황과 관계 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해 볼 때 우리 근대의 역사상에 대한 기존의 인식 틀은 과연 객관 타당한 것이었던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제는 총론은 물론이고 각론별로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 캐릭터로 일관된 홍종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이전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파리에서 몇 년간 생활하면서 선진문화를 직접 경험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이의 현실적 적용 모색에 대단히 적극적이었습니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하였지요.


그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귀국 후 ‘황제국’으로서의 국가체제 마련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대표적인 ‘황실파 관료’로서 각 방면에서 자주적인 근대적 개혁을 입안 추진하고 국정수행에 건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화인사들의 집결체인 독립협회 주도세력들과 방법론 차이로 큰 마찰을 보이기도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활동은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대한제국이 황제국으로서의 명실상부한 역할을 수행할 때 그의 역할 역시 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제의 영향력이 우리를 크게 압박하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운명과 더불어 그의 활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필자는 책에서 그 동안 김옥균을 개화파로, 홍종우를 수구파로 보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두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아울러 홍종우에게 씌운 ‘수구’의 멍에를 벗기고, 근대 변혁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관통한 그의 활동과 현실인식, 대안 등을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세계화’라는 화두를 되짚어보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동안 편견과 무지에 의해 역사의 ‘미라’가 된 그에게 심장을 박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