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적 발전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일 모색최종석(중세1분과) ※ 이 글은 『역사와 현실』 100호에 실린 「내재적 발전론 ‘이후’에 대한 몇 가지 고민」을 축약한 것이다. 원 논문도 정제되지 못한 글이었는데, 축약으로 말미암아 본래보다 더 거칠어진 면이 있다. 이 점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리는 바이다(필자). 내재적 발전론의 퇴조와 한국사학의 위기내재적 발전론은 1960년대 이래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정체성론을 비판하고 한국사를 세계사적 발전 과정이라는 보편성을 전제하면서 한국사의 특수성을 밝혀 민족사를 발전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는 역사 인식론・방법론이었다고 정의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 인식론・방법론이라고는 하나 이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고 내재적 발전을 지향하는 관점과 태도에 해당한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근래 들어 주춤하기는 하지만 내재적 발전론은 1960년대 이래로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독점적이다시피 공유되어 온 한국사에 관한 관점과 태도이고, 이와 맞물려 한국사에 관한 논저 대부분은 내재적 발전을 지향하는 관점과 태도에 입각하여 연구된 지적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발전론이 논란의 대상이 된 지는 보수적으로 잡더라도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1960∼70년대에 성립・전개되어 오다가 1980년대에 비판적으로 계승된 내재적 발전론은,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역사학의 조류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되어 민족주의 사학의 퇴조가 현실화되면서 본격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비판은 지속되어 오고 있다. 외부에서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에 대한 관심은 과거에 비해 극히 저조해졌고, 일부는 문제의식의 구태의연함, 민족주의 과잉 경향 등을 이유로 하여 한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냉소적으로까지 대하기도 하며, 내재적 발전론을 토대로 축적된 한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비판・부정하는 논의도 드물지 않다. 한국사학계 내부에서조차 내재적 발전을 지향하는 관점에 대한 공유와 견지는 예전만 못하고 세대가 내려갈수록 그 정도는 심화되며 일각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부정이 제기되기도 한다. 내재적 발전론의 퇴조는 이 자체로 그치지 않고 한국사학계의 위기를 동반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사학 그 자체라고까지 할 수 있어, 양자가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재적 발전론은 동요하고 퇴조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신하여 안팎의 관심과 기대를 끌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이 부재하다 보니 한국사학계에서 여전히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퇴조를 몸으로 느끼면서도, 이와 맞물려 한국사학계가 위기에 빠져 있음을 체감하면서도 그 대안을 만들어 내고 있지 못하는 현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위기가 아닐까? 내재적 발전론의 흥행과 퇴조의 맥락4・19 이전에는 ‘엽전’으로 상징되는 민족적 열등감이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었고, 역사학도 내에서조차 한국사가 매력적이지 않았을 정도이다. 그러다 4・19를 계기로 하여 한국사학계와 이를 둘러싼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4・19를 전후로 하여 ‘민족주의 바람’이 사회 전반에 거세게 불어 닥쳤고, 민족적 열등감을 일거에 떨쳐버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사학계는 민족적 열등감이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의제를 만들어 내었고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를 민족의 주체적 발전 과정으로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서 한국사학계가 제기한 과제는 한국사학계를 넘어서 전사회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한국사학계의 움직임에 대한 외부의 관심과 성원은 뜨겁기만 하였다. 다만 한국사학계의 행보를 향한 지지와 관심은 한국사학계의 탄탄한 학문적 성과와 수준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주체적 발전 과정을 규명하여 식민주의사관이 파놓은 함정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하는 지향에의 공감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경과한 후 한국사학계를 둘러싼 분위기는 바뀌어갔다.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경제 발전, 민주화의 진전 등으로 인해 민족적 자기비하감은 약화・소멸되어 갔고, 오히려 민족적 자신감이 넘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정도로 분위기는 변모하였다. 민족적 열등감을 조장한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든가, 민족적 자존감의 회복 차원에서 한국사를 민족의 주체적 발전 과정으로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든가 하는 의제는 예전만큼의 사회적 관심사가 되지 못하였다. 애초에 한국사학계를 향한 기대와 관심은 한국사학계가 갖춘 높은 학문적 경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민족적 열등감을 떨쳐내고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형성된 것이다 보니, 열망이 충족된 상황이 되자 한국사학계에 대한 관심이 식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한국사학계를 향한 외부의 관심은 대폭 감소되어갔지만, 한국사학계는 그 이후로도 내재적 발전론에 매달렸다.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에서 한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하는 지향이 먼저 설정되었고 연구 성과는 이를 뒷받침하는 식이었기에, 약 20년 동안의 연구 성과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충족되어야 할 연구 주제와 분야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재적 발전론의 지속에는 한국사학계 내에 추가된 새로운 동력, 즉 민중적 민족주의의 역할 또한 작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등장한 민중적 민족주의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속에서 만개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내재적 발전론, 그 중에서도 사회경제사에 천착한 유물사관적 경향의 내재적 발전론이 민중을 변혁 주체로 한 광범한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중적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변혁사론인 민중사학으로 진화하였다. 민중사학적 경향은 민족 내에서 변혁 주체로서 민중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중(민족)의 주체적 발전 과정으로서 한국사를 구성하고자 하고 있어 그 이전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다 민중사학적 경향의 한국사 연구마저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변혁적 전망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대두하게 되면서 내적 동력을 잃어 갔고, 민족주의 비판의 움직임, 역사발전론 자체에 대한 회의, 더 나아가 근대성 비판,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등으로 인해 내재적 발전론을 근간으로 작업해 온 역사 연구의 학문적 토대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사명감’ 시대의 종언앞서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 인식론・방법론이라기보다는 내재적 발전을 지향하는 관점과 태도에 가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1960년대 이래로 한국사학계가 이러한 관점과 태도를 견지한 채 한국사를 연구해 온 데에는,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강렬한 사명 의식이 공유되고 있었던 시대 분위기 탓도 컸다. 1960・70년대에 활발히 활동한 한국사 연구자들은 식민사학 극복, 민족적 자존감의 회복이라는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주체적・발전적 시각에서, 곧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재정립하고자 경주하였다. 1980년대 이후 민중사학적 경향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이전 세대 못지않게 사명감을 품고 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민중사학적 경향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사명감이란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의 수립을 통한 자주화와 민주화에의 기여였다. 이전 세대와 사명감의 내용이 다르기는 하지만 민중사학적 경향의 한국사 연구자들조차 해당 시기의 사명감을 품고 민중(민족)의 주체적 발전적 과정으로서 한국사를 구성하고자 연구 작업에 몰두하였다. 근래 들어 한국사 연구자들이 민족·민중을 위한 사명감을 지닌 채 역사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은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한국사학계에 새로이 유입되는 신진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유(類)의 사명감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사명감이 미미・부재한 연구자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수적으로 증가해 가는 추세이다. ‘사명감’의 시대가 저물고만 것이다. 이 현실 또한 내재적 발전론의 퇴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와 그 해법: 낙후된 학문 경쟁력의 제고표면적으로는 내재적 발전론이 동요하고 이와 맞물려 한국사학계는 위기에 빠져든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학계의 위기는 내재적 발전론의 퇴조에서가 아니라 낙후된 학문 경쟁력에서 기인하였다고 판단된다. 한국사학계의 위기는 마치 경제 분야에서 거품이 잔뜩 끼었다가 터져버린 상황과 유사하다. 여기서 거품이라 함은 1960・70년대에 한국사학계의 실력과 무관하게 형성된 한국사학계를 향한 크나큰 관심과 기대를 의미한다. 실물 생산 경제와 괴리된 채 급성장한 자산시장의 거품이 꺼지는 것과 같이, 한국사학계의 역량을 훨씬 상회한 외부의 관심과 기대도 결국은 식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차는 나지만 한국사학계 내부에서도 소명 의식에 휩싸인 채 민족·민중의 주체적 발전 과정을 규명하고자 하는 분위기마저 가라앉아 버렸다. 한국사학계 안팎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이에 입각한 연구성과를 향한 ‘열정’이 식게 되자,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그 동안 드러나지 않거나 인식되지 않아 온 한국사학계의 취약한 학문 경쟁력, 학문 내적인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즉 1960년대 이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축적되어 온 연구성과의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하에서는 학문 경쟁력을 화두로 하여 내재적 발전론에 내장되어 온 문제점과 위기 극복의 길을 뭉뚱그려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한국사가 대상으로 하는, 장구한 시간을 품은 과거 그 자체는 매우 심각하게 엉켜있는 실타래와도 같이 무수한 요소와 관계가 복합적으로 그리고 비규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세계일지 모른다. 그러한 과거 자체는 어떠한 ‘질서’도 허락하지 않는 혼돈의 세계라고까지 할 수 있다. 복잡다단하다는 식의 용어로도 담아낼 수 없는 ‘엉클어짐’의 세계, 그러나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이야기이고,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여기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해 왔다. 달리 말해, 과거 그 자체를 특정한 틀로 구성해 온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이후로 인식론적 차원에서 구성된 ‘과거’는 존재론적 차원의 과거 그 자체를 결코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인되기 어렵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서 과거 그 자체에 가한 어떠한 질서 내지 구성도 ‘자의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헤이든 화이트 식으로 역사가 문학과 구별되기 어려운 허구의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구성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자의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학문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자의성’이어야 한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역사학의 학문적 경쟁력은 과거 그 자체 혹은 과거의 ‘진실’에 근접해 있는 독점적인 학설과 이를 토대로 축적된 연구성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질서・구성을 다양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적, 학문적 역량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익숙한 방식의 질서・구성과 상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그 무엇’을 고안해 내기 위해서는 이론, 안목, 문제의식, 방법론 등에서 혁신과 깊은 지적 고민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다양한 질서・구성이 경쟁하게 된다면, 상호간 영향을 받으면서도 해당 질서・구성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치열한 지적 고민이 이루어질 것이다. 각각이야 자신의 질서・구성이 보다 타당하다고 자부할 수도, 그리고 이것에 학문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학문 세계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양한 질서 내지 구성의 경쟁・공존은 과거를 질서화하는 데 있어서 지적 역량의 도약을 이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내재적 발전론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듯싶다. 내재적 발전론은 내재적 발전을 지향하는 관점과 태도에 불과하기에 한국의 역사를 대상으로 질서・구성을 고안한 작업과 다소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내재적 발전론을 토대로 연구를 해 온 동안에 어떠한 질서・구성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연히 한국의 역사를 대상으로 한 질서・구성은 존재하였는데, 기본적으로 그것은 극복 대상이었던 소위 식민사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네이션’을 역사 주체로 놓고 현재(근대)의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마련된 자율/타율, 발전/정체의 개념을 무엇보다 중시하면서 ‘네이션’의 일원적인 역사발전 트랙에서의 단계적 경과를 포착하고자 한, 소위 식민사학 이래로의 근대 역사학의 인식체계가 전제되고 있었다. 결국 내재적 발전론에 있어서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활용된 기왕의 것, 즉 소위 식민사학 이래로의 근대 역사학의 인식체계였다. 그렇게 되면서 내재적 발전론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질서・구성을 위한 지적 고민 내지 역량이 간과되고, 주어진 질서・구성 틀을 전제한 채 민족의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추는 지적 태도가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활로 모색의 차원에서 한국사학계의 학문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구성력’ 면에서 비약적인 도약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식민사학・내재적 발전론으로 표상된 근대 역사학의 인식체계라는 익숙한 구성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설득력 있게 ‘한국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각종 고민과 모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론, 안목, 문제의식, 방법론 면에서의 진전이 수반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바이다. 학문적 경쟁력의 시각에서 본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과 위기 극복의 길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치즈와 구더기』 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미시사가인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역사가는 과거 인물과 현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온 동일성에 대한 신념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과거인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는 현격히 다른 사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과거와 현재와의 간극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데이비드 로웬덜은 1985년에 ‘과거는 낯선 나라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사론서를 펴낸 바 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사실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이다. 문화인류학자가 낯선 나라의 문화를 연구하고자 할 때 문화상대주의의 태도 내지 관점을 갖고 그 나라의 문화를 그곳의 가치 체계, 상징 체계 속에서 독해해야 하는 것처럼, 낯선 나라인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 또한 문화인류학자의 접근 방식과도 같이 현재와 현격히 다른 사회에 기반을 둔 행동 양식, 인식 체계 등을 포착하여 해당 시대와 사회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문화상대주의에 관한 정의를 인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독특한 환경과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해당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를 견지한다고 해서, 낯선 문화를 파악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인류학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식과 가치 등마저 상대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낯선 나라의 상식 체계, 행위 양식, 인식 체계 등을 그 문화 내에서 파악하고자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적 고민과 이론・방법론의 적용과 고안 등이 수반될 것이니 학문적 경쟁력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또한 낯선 나라인 과거를, 현재의 인식 체계와 단절적이고 이질적인 과거를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문적 역량을 축적・강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대마저 상대화・역사화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고 상식 체계, 행위 양식, 인식 체계 등을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자 고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또한 내재적 발전론은 아쉬운 점들을 노정한다. 우선 4・19 전후의 ‘민족주의 바람’ 속에서 민족적 열패감을 만들어낸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사를 주체적, 발전적으로 보아야 한다든지, 자주화와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해 민중 주체의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을 수립해야 한다든지 하는 태도・믿음은, 현재적・목적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낯선’ 나라에 다가서기에는 부적절한 면모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시대를 상대화・역사화하여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과거를 현재의 목적 속에 가두는 경향이 있다. 과거는 낯선 나라이다 보니, 또한 현재와 이질적인 에피스테메가 작동하고 있다 보니, 원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역사가의 눈에는 온통 낯선 장면, 낯선 관계, 낯선 행동, 낯선 태도 등등이 들어올 것이다. 역사가는 도처에 널려 있는 낯선 것들을 주목하면서 해당 낯선 것을 그 시대의 인식체계, 맥락 속에서 독해하고자 하는 특별한 지적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재적 발전론의 눈에는 낯선 것들보다는 현재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낯선 것이라고 할지라도 현재적 성격이 강한 설명 틀을 가지고 익숙한 것, 이해 가능한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가령 조선초기 원구제(제천례) 개설을 둘러싼 갈등은 독자적・자주적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원구제를 시행하려는 측과 주자학적 명분 의식 혹은 명 중심의 책봉 체제를 중시하여 제후국에서의 원구제 시행을 참월하다고 하여 반대하는 측의 대립 식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당시의 기록들은 조선 초기 제천례 시행을 둘러싼 논란이 ‘천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경내 산천에 제사해야 한다’라는 식의 유교 명분을 양측 모두 공유하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낯선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제천례 시행을 주장하는 측조차 천자만이 천지에 제사 지내야 한다고 하는 명분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낯선 사실을 당대 맥락에서 독해하려 하기보다는 자주적↔사대주의적이라는 현재적이고 익숙한 이해 틀 속에서 외면하였다. 따라서 한국사학계의 학문적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익숙하게 여겨져 온 것들을 낯설게 만들 수 있는 지적 역량의 제고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연구자가 살아가는 시대와 그 시대의 인식체계를 상대화, 역사화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이 갖추어져야 하고, 탐색하고자 하는 시대를 역사화하고 낯설게 만들 수 있는 지적 역량이 구비되어야 하며,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어떠한 지적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지가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낯설게 만들고 나서 손을 놓는다면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의 감각에서는 낯설게 보이나 그 시대에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당대의 맥락을 포착하고자 고심해야 할 것이다. 이 시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가 자신을 감싼 에피스테메에서 빠져 나와 이질적인 에피스테메에 다가서는 고난도의 지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어려운 만큼 보상은 크지 않을까, 학문 역량의 강화 측면에서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위기 극복을 위한 열쇠들 가운데 하나가 놓여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