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론의 역사성과 비현실성

BoardLang.text_date 2016.10.14 작성자 peace21@snu.ac.kr

핵무장론의 역사성과 비현실성


 

김태우(현대사분과)



이 글은 현대사분과 김태우 선생님이 <창비주간논평>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eekly.changbi.com/?p=7302&cat=5)


 

최근 한국 핵무장론이 새누리당 핵심 인사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미 지난 1월 원유철 전 원내대표가 “우리도 자위권 차원의 평화핵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발언했던 사례를 비롯해, 최근 김무성 김문수 남경필 등과 같은 여당의 주요 인사들이 미국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무장의 필요성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새누리당 의원 모임(핵포럼)’을 중심으로 한 여당 인사들의 경쟁적인 핵무장론 제기는 사실상 최근의 여론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전국 성인 10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조사자의 58%가 한국의 핵무기 보유 주장에 찬성했고, 34%가 반대했다고 한다. MBC 또한 9월 12~13일 전국 성인 1003명에 대한 조사 결과, 전체의 65.1%가 자체 핵무장에 찬성했다고 보도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핵무장론 찬성 여론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던지면서, 핵무장론에 대해 논하기 전에 반드시 상기되어야 할 몇가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이 사실들은 북한 핵실험의 역사적 성격, 한반도 핵문제의 현재적 해결 방안, 핵무장론의 비현실성 등에 대해 일말의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핵무기와 관련하여 상기되어야 할 몇가지 역사적 사실들은 아래와 같다.

핵무기와 한반도


첫째, 한국은 세계 두번째의 원폭피해국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일본은 1945년 8월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자폭탄 투하에 의해 세계 제1의 원폭 피해국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폭격으로 한국인들이 세계 두번째의 원폭 피해 국민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은 대중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지는 않다. 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는 수만명의 조선인 징용노무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현장에서 희생되었던 것이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당시 총 피폭자 69만여명 가운데 약 7만명이 조선인이었으며, 23만여명의 원폭 사망자 가운데 약 4만명이 조선인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북한의 핵개발 이전까지 한반도 핵폭격 위협은 미국의 전유물이었다. 대표적으로는 한국전쟁기 원폭 위협과 1950년대 후반 한반도 전술핵무기 배치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한국전쟁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군의 전쟁 개입을 통해 전세가 급속히 역전되자 공개적 기자회견(1950.11.30) 자리에서 원폭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트루먼은 “원자폭탄의 사용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고려되어왔다”고 대답했다. 불과 5년 전 동아시아에서 실제 원폭 투하를 강행했던 트루먼의 발언은 당대 북한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겨준 위협적 경고였다. 더불어 1958년 미국의 국방비 감축 조치의 일환으로 추진된 한반도 전술핵무기 배치 또한 당대 북한에 커다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당시 북한은 전술핵 폭격에 대비하여 ‘전국토의 요새화’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1963~64년 소련과 중국을 향해 핵무기 개발 협조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면서 핵개발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셋째, 애초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1990년대 체제 존속의 위기로 내몰렸던 극한의 경제위기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세계 자본주의체제로 포섭되기를 거부한 채 미국과의 힘의 대치를 이어나갔다. 북한은 그같은 힘의 대치를 위해 1990년대 중반 전체 국민소득의 35%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할 정도로 군사 부분에 상당한 경제적 비용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규모 군사비 지출은 당대 경제위기와 맞물리며 북한체제 존속에 커다란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북한 지도부는 체제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장기적인 저비용 고효율의 경제적 수단으로서 핵무기 개발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넷째, 북한 핵무기 개발은 ‘힘의 대결’이 아닌 ‘협상’의 방식을 통해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 1994년 한반도 전쟁위기를 극복한 김일성과 카터의 극적 합의 이후, 같은 해 10월 제네바합의를 통해 미국은 경제제재의 완화와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북한은 핵동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1994년 미국 공화당의 중간선거 압승 이후 클린턴 정부의 대북 약속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종국에는 미국의 약속 이행을 종용하는 북한의 도발과 미국 공화당 정권의 등장과 함께 미국과 북한 사이의 핵협정들은 부시 정부에 의해 일거에 폐기되어버렸다.

다섯째, 한국의 자체 핵무장은 국제적 약속의 파기, 동맹과의 관계 손상, 국제적 경제제재 등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요컨대 한국 핵무장은 기존의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한미원자력협정 등에 위배되며, 최근 미국의 ‘핵무기 없는 세상’ 정책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1982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자리에서 극소량의 플루토늄 추출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2004년에 뒤늦게 확인됐을 때,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전통적 우방국들이 한국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까지 주장하며 강하게 대응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에너지 자원 국외 의존도가 95%에 이르는 에너지 약소국이자, 무역의존도가 약 90%에 이르는 무역국가이다. 국제적 경제제재는 곧 심각한 경제 및 안보 위기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핵무장론의 ‘비현실성’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접근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우리는 핵에너지와 핵무장에 대한 평화적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는 세계 두번째의 핵무기 피해국이며, 전술핵 배치와 같은 ‘힘의 대결’ 정책이 한반도의 비평화적 현실을 가속화시켰음에 반해, 카터와 김일성의 대화와 같은 평화적 선택이 핵문제 해결에 가장 근접했던 ‘현실적 접근법’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자체 핵무장이 필연적으로 수반할 국제적 경제제재 조치까지 고려해보면, 핵무장론의 현실성에 대한 주장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