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이어 1880년에는 함경남도 원산, 1883년에는 인천이 개항됐다. 부산과 원산에는 일본과 청국의 전관조계가, 인천에는 청일 양국의 전관조계와 더불어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됐다. 일본전관조계에는 일본인만이, 청국전관조계에는 청국인만이 거주할 수 있었고, 각국공동조계에는 청일 국민뿐 아니라 구미 국가 사람들도 거주했다.
이들 조계를 가리켜 흔히들 ‘나라 속의 작은 나라’라고 부른다. 조선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조계 내 행정은 전관국 영사나 외국인들의 자치기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조계가 외국 영토였던 것은 아니다. 외국인들은 조선 정부로부터 땅을 빌렸을 뿐이어서 일정액의 지대를 조선 정부에 납부해야만 했다. 문제는 땅을 빌리는 기간에 제한이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외국인에게 영원히 빌려준 땅인 조계는 내 땅인 듯 내 땅 아닌, 치외법권의 장소였다.
내 땅인 듯 내 땅 아닌
조선인들은 조계 내에서 거주할 수 없었다. 조선에 앞서 개항했던 중국에도 상하이를 비롯한 각지의 개항장에 조계가 설치돼 있었는데, 조선과 달리 각국의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들도 조계 내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대신 조선에는 조계로부터 4km 범위 내에 ‘잡거지대’가 설정됐다. 본래 조계 밖은 ‘내지’라 하여 외국인 거주가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잡거지대에선 조선의 지방행정에 따른다는 조건하에 외국인 거주가 허용됐고, 결과적으로 이곳에 한해 조선인과 외국인은 이웃하며 살게 되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러했다.
그런데 조계 안과 밖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조계는 자연발생적 촌락이 아니라 계획된 도시였다.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접안 시설이 구축됐고, 바둑판처럼 구획된 거주지 사이로는 도로가 곧게 뻗었다. 도로를 따라 가로등이 세워지고 상하수도 같은 근대적 설비들이 들어섰다. 건물을 세울 때는 도시 미관은 물론 화재 방비까지 고려됐다. 나아가 공원에서는 나날이 성장해가는 도시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조계는 극락세계, 조계 밖은 지옥”
이에 반해 조계 밖에선 개발 없는 도시화가 진전됐다. 조계 설치로 본래 거주하던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 상거래를 통한 이익이나 항구의 일자리 등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이 조계 밖 잡거지대에 조선인 마을을 형성했다. 거주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지만 도시 설비는 수반되지 않았다. <독립신문>의 한 논설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조계와 그 밖의 조선인 마을을 각각 극락세계와 지옥에 비유하면서 “조선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에다 가두어놓고 들볶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를 볼 때 요즘 유행하는 ‘헬조선’이라는 말은 의외로 오랜 기원을 갖는지도 모른다. 지옥 같은 현실은 이처럼 천국을 이웃하며 살아야 하는 상대적 박탈 속에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외국인들에게 조계 밖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이주안내>라는 책은 일본인들에게 한반도 이주를 적극 권장했는데, 흥미롭게도 조계보다는 내지를 추천했다. 조계는 이미 상당한 자본이 투여됐고 물가도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내지는 창업에 큰 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활비도 일본의 3분의 1 정도면 충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외국인은 조약상 엄연히 내지에서 거주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외국인의 내지 거주는 더욱 확대됐다. 이러한 무법 행위는 일본의 식민권력에 의해 제도화됐다. 그리고 무법이 합법화된 곳에서 식민지 지배는 현실이 되어갔다.
조계가 철폐된 것은 1914년이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국병합’이 이루어진 것은 그보다 4년 앞선 1910년의 일이지만, 조선총독부는 조계 철폐를 곧바로 단행하지 않았다. 조계는 청일전쟁 이후 부산, 원산, 인천 외에 진남포, 목포, 군산, 마산, 성진 등지에 추가로 설치됐다. 통치의 일원화를 위해서는 치외법권 장소인 조계의 철폐가 필수였지만, 일본이라 해도 구미인들의 이권이 얽힌 조계를 손쉽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우선 조계 내 경찰권만을 회수하고 그 외 외국인들의 기득권은 모두 종전과 같이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동시에 조계 철폐를 대비한 지방행정제도 개편에도 착수했다. 1914년은 바로 그 작업이 일단락된 해였다.
조계 철폐와 함께 새로운 지방행정제도로서 현재의 ‘시’ 정도에 해당하는 ‘부’ 제도가 실시됐다. 부의 경계는 대체로 조계와 그 주변의 시가지를 포함하는 형태로 정해졌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구분을 전제로 했던 조계와 달리, 부는 도시와 시골의 구분만을 남겼다. 그러나 부 제도 실시를 앞두고 조선에 거주하던 한 일본인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도시 주변부에서 아예 도시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