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는 E. H. 카라는 분 때문에 역사학도들에게 생긴 이상한 선입견 하나가, 역사는 해석의 문제다, 라는 관념이 아닐까 한다.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그의 헷갈리는 서술과 함께, ‘역사가와 그의 사실’이라는 제목이 붙은 <역사란 무엇인가>의 한 장(章)은, 어떤 역사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 책을 쓴 역사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거역하기 힘든 조언을 통해 역사 공부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한껏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의 견해와 달리 나는 역사학의 핵심은 해석이 아니라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에서는, 해석이 없어도 사실은 남지만, 사실이 없으면 해석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의 모든 논쟁은 기본적으로 사실을 둘러싼 기억 투쟁의 성격을 띤다. 역사는 인간의 조건인 만큼 조선시대에도 기억 투쟁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몇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가 있었다. 사화란,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민본정치·공도정치를 추구하던 정치세력을 세조의 찬탈 이후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한 공신들이 탄압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무오사화(1498·연산군4)이다.
사관 김일손의 사초에, 항우에게 살해당한 진나라 의제를 애도하며 지었다는 김종직의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 실렸는데, 이것이 바로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을 시해한 일을 비유했다며 이극돈이 연산군을 부추겨 김일손 등을 죽였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그나마 성종 때 정계로 진출했던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 이는 역사기록인 사초로 인해 당한 사화여서, 역사 사(史) 자를 쓴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사화는 당대 역사에 대한 기억-투쟁의 극단적 형태이다. 그러나 기억-투쟁은 사실을 둘러싼 각 주체 간의 미묘한 신경전과 논쟁도 포함된다. 그것이 확대되면 처벌 및 탄압이나 학살 같은 비극적 상황으로 번지는 것이다.
건국 200년이 지나면서 조선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조선 문명의 흔적을 남겼던 실록 편찬의 변화도 그중 하나였다. 그 변화란 ‘수정’ 또는 ‘개수’라는 이름으로 이미 편찬된 실록을 다시 편찬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누리집( sillok.history.go.kr)에서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실록(고종, 순종을 합치면 27대)의 원문(사진, 텍스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누구나 실록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금만 부지런한 독자라면 누가 쓴 어떤 책이 부실한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첫 화면에 보면 이상한 게 있다. 다른 실록은 모두 한 종인데, 선조·현종·숙종·경종 시대의 실록은 두 종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맞다. 이들 시대에는 실록이 두 종 남아 있다.
사실은 보완하고, 해석을 수정하라
<선조실록>의 수정은 실록 역사에서 처음 있는 ‘역사 고치기’였다. 인조반정 이후 <선조실록>이 무사(誣史·무함의 역사)라는 논의가 제기되어 수정이 시작되었으나, 호란 등으로 <선조수정실록>의 완성은 20여 년이 지난 효종 때 완성되었다. ‘수정’이란 말은 ‘부분 재편찬’이란 뜻이다.
<현종실록>은 남인들이 주도하여 편찬하였는데, 경신년 환국(1680)으로 정권이 바뀐 뒤 서인이 주도하여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였다. ‘개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전면 재편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종실록>보다 <현종개수실록>의 양이 더 많다.
한편 <숙종실록>의 수정에는 ‘보궐정오’라는 표현을 쓴다. 빠진 데를 추가하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다는 뜻인데, 고친 것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숙종실록>에 대한 보궐정오는 1728년(영조4)에 이광좌·윤순 등 소론이 편찬하였다. 아무래도 노론과 소론이 분당될 때의 과정과 배경에 대한 서술에서 두 실록의 차이가 크다.
<경종실록>의 수정은 영조를 지나 정조 때인 1778년(정조2)에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마침 <영조실록>이 편찬되고 있어서 함께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경종실록>이 소론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정조와 노론의 입장에서 역사를 다시 편찬한 것이었다. 특히 1721~22년 벌어진 노론 탄압인 ‘신임사화’에 대해 부정확하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겠다는 취지가 강하였다.
아직 학계에서 실록의 개수(수정)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실록 개수의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네 차례의 실록 개수를 다 언급할 수는 없으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예로 들어 알아보겠다.
<선조실록> 수정은 대제학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주관하였는데, 기본 방향은 ①사실의 보완 ②해석의 수정이었다. (이식의 문집이 간행된 뒤 남은 원고를 모은 ‘간여본’이 규장각에 남아 있고, 이를 통해 실록 수정의 전말을 알 수 있다. 古 3428-67Aa-v.1-9. 또 <선조수정실록> 맨 뒤에 부록으로 범례, 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은 유례없이 긴 기간(8년) 지지부진하게 편찬되었다. 그 사이에 편찬 책임자가 이항복에서 이이첨으로 바뀌면서 안팎으로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잠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사료 부족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경복궁, 창덕궁 등이 불타면서 홍문관에 보관하던 책, 춘추관의 실록이 불에 탔다.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 중 하나인 <승정원일기>도 불에 탔다. 기록을 담당하던 사관 조존세와 김선여, 주서 임취정과 박정현 등은 사초를 태우기도 했다. 들고 가기 무거웠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지 이들은 광해군대에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므로 <선조실록>의 수정은 사라진 기록을 보완한다는 실제적 목적이 컸다.
수정 책임자였던 대제학 이식은 ‘역사를 편찬하기 위한 강령’을 만들어 편찬 원칙을 세우는 한편, 곳곳에 편지를 보내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동서의 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중 행재소 이외의 기록, 이를테면 의병활동, 수군활동, 민간 동향이 대폭 보완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봉 조헌 등의 의병활동, 이순신 장군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많이 나와 있다.
술만 마셨다 vs 효성스럽다
또 다른 수정 방향은 ‘해석의 수정’인데, 이는 주로 사론, 즉 사관의 논평을 수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유성룡과 이항복에 대해,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는 각각 “어머니를 봉양한다면서 술만 마셨다, 국정에 한 일이 없다”, “기축옥사 때 정철과 함께 서울, 영남, 호남의 사림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반면 방납으로 부를 축적하고 민폐를 끼쳤던 기자헌에 대해서는 덕망이 있다고 썼고, 편찬 책임자인 이이첨 자신에 대해서는 영특하고 기개가 있다고 평론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유성룡에 대해 “학문이 깊었고 효성스러웠다, 임진왜란에 공이 크다”, 이항복에 대해 “기축옥사 때 이항복의 주선으로 살아난 사람이 많다”고 고쳐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실록 수정은 이 사론, 사평 때문에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실록을 수정 또는 개수하면서 이전 실록을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한 뒤에 <선조실록>을 왜 그대로 남겨두었을까 하는 소박한 의문 정도는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역사학도라면 한번쯤 품어보았을 것이다.
<선조실록>을 수정할 때라고 해서 ‘잘못된 역사’로 낙인찍힌 <선조실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조실록>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원본과 수정본이 공존하게 된 것은 ‘주묵사’(朱墨史)를 수정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중국 송나라 고종이 사관 범충에게 <신종실록>을 수정하게 한 적이 있었다. 범충은 실록을 수정하면서 <기록의 차이점 비교>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한 것은 붉은 글씨로 썼다. 이렇게 하면, 원래 기록과 수정할 기록, 뺄 기록이 모두 남는 셈이었고, 무엇을 빼고 더하려고 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선조실록>을 수정한 사람들,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한 이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전 실록에서 근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남은 기록과 견문에 의해 바로잡았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이 무고와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면서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 시말을 확인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니, 후대에 이 기록을 보는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이식에 이어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마친 채유후의 후기)
후대의 눈을 믿고
고증하고 고쳤지만 다 고치지는 못했으니, 두 실록을 보고 후대 사람들이 판단하라는 말이다. 사실 ‘주묵사’는 고친 기사와 원래 기사를 구분하는 편리한 방법 이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편의성’을 실무 당사자의 편의성이 아니라, ‘역사를 수정하는 태도’라는 사회적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수정 작업마저도 ‘후대 사람들의 판단’에 맡겼다. 둘 다 남김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눈을 믿음으로써.
오항녕 전주대 교수·역사문화콘텐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