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대한제국 한성부, 19세기 워싱턴을 벤치마킹하다

BoardLang.text_date 2019.08.1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대한제국 한성부, 19세기 워싱턴을 벤치마킹하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워싱턴 견문기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이신우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25457)

이신우(California State University, Chico 사학과 교수)


 

지난 4월 서울시는 지금의 광화문광장을 확장하여 그 일대를 새로운 국가상징 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조선왕조의 육조거리를 복원함으로서 역사적 상징성을 회복하고, 지난해 촛불집회를 통해 얻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장이라는 정치성 상징성을 더해,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초석으로 삼겠다는 취지이다 (해방 후 광화문 일대의 파괴와 복원을 둘러싼 정치학에 대해서는 최근 레디앙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다. 송은영. “광화문, 현대사의 현재진행형 공간” 참조 바람).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서울시의 다양한 사업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역사와 복원을 통한 서울의 재창조라면, 또 다른 하나의 축은 세계화와 관광산업의 활성화일 것이다.

광화문광장 (재)조성사업은 물론, ‘세계디자인수도 서울’ 선정,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막을 연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국제 순례지 선포까지.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내걸었던 슬로건과 중점 사업은 달라도 그들이 펼쳐온 사업의 공통점은 서울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도시, 세계인이 찾는 관광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도시의 재생과 복원을 통해 역사와 전통이 숨 쉬는 서울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실은 세계화라는 축과 맞닿아 있다.

사업의 구상은 대개 해외순방과 함께 시작되었다. 런던, 뉴욕, 파리, 로마, 시드니, 도쿄 등 세계의 ‘선진’ 도시들을 이른바 ‘벤치마킹’ 하기 위해서이다. 전 세계 어느 곳도 손쉽게 오고 가는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으니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시마다, 특히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상징거리마다 축적된 역사적 층위와 현재적 맥락이 상이한데, 각기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서울시장이 이끄는 서울시는 해외순방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이해했으며, 이후 그들이 전개했던 서울시 사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caption id="attachment_7303" align="aligncenter" width="1411"]사진설명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2006년 뉴욕 방문을 통해 교통 개혁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2008년 유럽 순방을 통해 디자인 도시를, 그리고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2012년 도쿄 순방을 통해 도시 안전과 2017년 유럽 순방을 통해 도시 재생을 벤치마킹했다고 밝힌 바 있다 (출처: 순서대로 연합뉴스, 서울시, 헤럴드 경제)[/caption]

이 글은 같은 질문을 19세기 후반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을 이끌었던 한성부와 경무청 관련 관원들에게 던져보고자 한다. 19세기 후반의 서울도 지금의 서울과 같이, 아니 훨씬 절박하게, 세계화와 근대화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개항 후 한성을 찾은 외국인들이 벌거벗은 산, 기울어진 초가, 허물어진 성벽, 거리를 가득 채운 오물과 악취를 거론하며 조선의 후진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성의 경관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896년을 기점으로 내무대신으로 박정양, 한성판윤으로 이채연, 한성소윤으로 이계필, 경무관으로 이종하 등이 임명되면서였다. 그들은 기존의 도로를 확대 정비하는 한편, 덕수궁 중심의 방사선 도로를 신설하고, 전등과 전차, 그리고 각종 기념비와 공원 등의 공공시설을 설치했다. 덕분에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짧은 기간이나마 근대적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7304" align="aligncenter" width="1374"]사진 설명 : 초대 주미공사 일행과 주미공사관 건물. 주미공사관은 1889년 백악관에서 북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로건 서클(Logan Circle, 건립 당시에는 Iowa Circle)로 자리를 옮기고 1905년 외교권이 박탈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강제 매입되었다가 2012년 문화재청이 재매입하여 2018년 5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시스템, 국외소재문화재재단)[/caption]

흥미로운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들이 ‘대조선주차미국화성돈공사관’의 관원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체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독립신문은 박정양, 이채연, 이종하 등이 함께 워싱턴에서 근무했던 것을 지적하며 이들이 이끌 한성부의 도시사업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울의 주민들은 이채연이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을 축하한다. 그가 진보적인 개명 관료라는 평판은 이미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워싱턴에 오랜 기간 거주하면서 도시운영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워싱턴은 여행자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하며, 시 당국의 도시 운영이 탁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수도의 운영 시스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그가 얻은 지식을 그의 나라에서 펼칠 꿈을 갖고 있다… 우리는 부디 그가 워싱턴의 랑팡과 쉐퍼드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10월 15일)

뿐만 아니라 독립문과,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독립공원의 조성을 주도했던 서재필과 윤치호 역시 워싱턴에서 거주하거나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이 ‘도시 가운데 최고의 도시’로 꼽았던 워싱턴은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워싱턴의 무엇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초대 주미전권공사였던 박정양이 남긴 미국 견문기 미행일기와 미속습유를 통해 그들의 행적과 시선을 따라가 보자.

 

 

미국의 수도, 화성돈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이며, 콜럼비아주에 속한 지방이다. 서기 1800년에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필라델피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미국이 당초 독립할 때에 공을 세운 대통령 워싱턴의 이름으로 이 수도의 이름을 붙였다. 이 수도는 개항장이 아니므로 물화와 인민이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도가 된 후 88년 동안 가옥의 건축과 상점의 설치가 나날이 더욱 늘어나서 현재 인구가 20만 3천여 명이나 되고, 주재하는 각국 공사관이 31개나 된다.”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행일기』, 푸른역사, 2015년, 57쪽)

워싱턴의 정식 명칭은 워싱턴 D.C. (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1790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의해 수도로 정해지고,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피에르 샤를 랑팡에 의해 그 기본적인 골격이 갖춰진 계획도시이다. 랑팡의 도시계획은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라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도시공간에 표현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을 골라 국회의사당을, 다음으로 높은 곳에는 백악관을 위치시켰다. 그 외의 작은 언덕에는 연방정부의 주요 기관을 배치하거나, 원형 혹은 사각형의 광장을 설치하여 당시 연방정부를 이루고 있었던 15개주로 하여금 각 주를 대표하는 위인들과 영웅들을 위한 기념공간으로 조성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도시의 가로망은 이렇게 선정된 주요 건물과 기념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랑팡은 격자형 가로망과 방사형 가로망을 병행시킴으로써 끝없이 반복되는 격자형 도로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고 도시에 흩어진 다수의 중심지를 향해 시선과 동선이 모이도록 계획했다. 다수의 중심지를 잇는 방사형 도로들이 수렴하는 곳은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이었다. 여러 개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정부가 모여 이루는 하나의 강력한 연방정부. 미국의 정치적 이상을 수도 워싱턴의 도시공간에 구현한 셈이다.

[caption id="attachment_7305" align="aligncenter" width="1459"]사진 설명: 랑팡의 워싱턴 설계도 (출처: 유치선 · 이수기, 「대한제국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재평가: 근대도시계획의 보편적 특성을 중심으로」 『국토계획』 50권 3호, 2015 에서 재인용) 남북전쟁 이전의 국회의사당 (출처: Library of Congress)[/caption]

 

 

워싱턴은 지금 변신 중 – 도로, 하수도, 조경


랑팡의 계획이 완성되는 데는 1세기가 넘게 걸렸다. 랑팡의 경질과 재정난으로 인해 그의 설계도에 존재했던 수많은 공원과 광장은 동상과 기념비 대신 먼지 가득한 빈터로 남았고, 도로는 가축들의 배설물과 진흙으로 질퍽거렸다. 당대인들에 따르면 워싱턴은 하나의 도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여러 개의 마을이 모여 있는 것에 가까웠다.

남북전쟁(1861-1865)을 겪으면서 워싱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도로, 수도, 위생 등의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 시설이 1860년 61,000 명에서 1864년 200,000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한 인구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도시실태조사를 맡았던 육군 공병단 소령 미클러의 보고서에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 ‘심각한 위생 상태,’ ‘범죄,’ ‘오물,’ ‘악취’ 등의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19세기 후반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 여행자들의 서울에 대한 묘사를 떠오르게 한다.

초대 주미공사관 관원들이 워싱턴을 방문한 1870년대 후반은 워싱턴이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을 때였다. 수도로서 실망스러운 워싱턴을 떠나 다른 곳으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공론화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시정부가 1871년 공공사업 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도시정비에 나섰던 것이다. 공공사업 위원회는 당시 워싱턴의 젊은 사업가였던 쉐퍼드의 리더십 아래 세 가지 사업에 집중했다. 바로 도로 정비, 하수도 건설, 식수 사업이었다.

“알파벳 26자로 남북으로 세로로 뻗은 길의 번지를 정하고 1 · 2 · 3 · 4 등의 숫자로 동서로 가로로 뻗은 길의 번지를 정한다. 집집마다 반드시 번호를 내거는데, 아무개 가街, 아무개 번番이라고 불러 도시를 구획하고 고찰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도 가로는 정井자로 구획하여 어지럽지 않다. 이미 집을 짓기 전에 도로를 구획하고 인민이 구획을 어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통의 요충지인 5거리, 도로와 양쪽에 인도가 있는 3가닥의 길, 십자로, 쌍가雙街 등이 어느 곳이든 똑같은 형태고 있다.”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속습유』, 푸른역사, 2018년, 152쪽)

“밤에 공사관원들과 밖으로 나가 시가를 유람하였다. 물화의 번성함과 가로등이 밝게 빛나 비치는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도로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한 길은 차와 말이 다니는 곳인데, 모두 돌가루로 기름을 발라 단단하게 붙여서 비가 와도 진창이 되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다. 좌우의 두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인데, 모두 벽돌을 비늘처럼 깔아서 진흙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미행일기』, 120쪽)

공공사업 위원회가 3년간 일궈낸 성과는 눈부셨다. 146헥타르에 달하는 도로와 100헥타르에 달하는 보도가 새로 포장되었고, 총 198킬러미터에 달하는 하수도가 신설되었다. 도로의 정비는 당시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마차와 자전거, 그리고 1860년대 등장한 철도 마차 (전기가 아닌 마력을 이용한 전차)가 확장되는 데 큰 몫을 했다. 전기에 의해 움직이는 전차는 1888년에나 개통되었는데, 박정양은 당시 시험 운행 중인 전차를 타보고 미국이 부강한 이유가 ‘국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는 일에 정밀함에 정밀함을 더하고 궁극적으로 사려하여 마침내 이를 완성”시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caption id="attachment_7306" align="aligncenter" width="1397"]사진 설명 : 워싱턴 전차 노선도(1880) 와 펜실베니아 에비뉴를 달리는 철도 마차(출처: Library of Congress)[/caption]

“길 양쪽 곁에 여러 종류의 나무를 10보 정도 떨어지게 심어 그늘이 짙고 푸르러서 사람들이 여름날의 폭염을 알지 못하고 다닌다. 이어서 화원에 갔다. 화원은 워싱턴 내 십자 길거리마다 철살로 둘러친 곳인데, 그 넓이가 혹 1궁(弓) 혹 몇 궁으로 서로 다르다. 그 안에 온갖 나무와 별별 꽃을 심고, 혹 연못을 파서 물을 채우거나 물을 끌어들여 위로 내뿜게 만들어 매우 볼만하다. 또 곳곳에 의자를 설치하여 인민들이 놀면서 쉬게끔 하고, 남녀가 서로 손잡고 노약자를 부축하고 이끌며 삼삼오오 왕래하는 것이 일상이다.” (『미행일기』, 121쪽)

식수 사업은 도시의 인프라를 향상시키는 동시에 도시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때 도로변과 공원 부지에 심어진 7만 그루의 나무는 20여년 후 박정양, 이채연, 서재필, 윤치호 등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1880년대 후반이 되면 도시를 대표하는 경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잡지였던 센츄리에 따르면 식수와 조경에 관한 한 워싱턴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세기 후반 서구의 많은 (산업) 도시들이 탁한 공기와 매연으로 몸살을 앓을 때 도로를 뒤덮을 정도로 무성한 나무, 잘 가꾸어진 잔디와 정원,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싱그러운 녹음은 워싱턴의 주민과 방문객 모두가 사랑하는 도시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워싱턴이 근대 문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식수 사업 덕분이었다.

 

 

기념비의 도시


“도로가 교차하는 곳마다 광장이 있는데, 광장에는 군복을 갖춰 입고 말을 탄 장군의 동상이 있다. 이는 미국의 전공(戰功)이 있는 인물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속습유』, 푸른역사, 2018년, 152쪽)

19세기 후반 워싱턴이 부끄러운 수도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관광 도시이자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실상부한 공간으로 성장하는데 또 하나의 동력이 되었던 것은 동상의 건립이었다. 뉴욕에 있던 영국의 국왕 조지 3세의 동상을 쓰러뜨리고 민주공화국으로 태어난 미국은 건국 초기 위인과 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세우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서부개척과 남북전쟁, 즉 팽창과 통합을 통해 국가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립되면서 동상 건립에 대한 거부감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1890년에 이르면 워싱턴은 ‘동상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도시 곳곳에 많은 동상과 기념비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국무부의 남쪽 맞은편에는 워싱턴 기념비가 있어서 가 보았다. 높이가 550척이고, 너비가 55척이며, 사면 너비가 모두 어긋하지 않고, 대리석으로 담장을 마련하였는데, 위로 솟아 허공에 떴고, 돌문과 8개의 창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엘리베이터로 사람을 오르내리게 하였다. 이는 한 나라 인민이 그 독립의 공업을 잊지 않고 이를 새겨 놓은 것이다.” (『미행일기』, 91쪽)

그 중 가장 중요한 상징물을 꼽자면 두말할 필요 없이 워싱턴 기념비이다. 이 기념비는 워싱턴의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로버트 밀즈가 도안한 것으로, 1848년 건설이 시작되어 1885년 장장 170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조 오벨리스크로 완성되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기념비가 아무런 장식도, 문구도 없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재현한 형태로 완성된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과 타협, 그리고 미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부심과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남북전쟁과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던 기념비 사업이 1870년대 후반 재개되었을 무렵 미국은 세계 최초의 민주 공화국과 팽창하는 제국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었고, 이것은 기념비의 최종 설계안을 결정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대인들이 기념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조지 워싱턴 개인의 업적이나 통치의 정당성이라기보다는 통합된 근대 국가로서의 미국이었는데, 문제는 과연 어떤 건축 양식과 디자인이 그들이 바라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할 것인가에 있었다.

사업의 재개와 함께 논란도 시작되었다. 혹자는 거대하고 육중한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닮은 기념비가 미국의 건국 가치를 훼손한다며 규모의 축소를 주장했고, 혹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원래의 설계안이 통합과 팽창을 통해 달라진 미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보여주기에 너무 ‘검소’하다며 좀 더 화려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많은 건축가들이 그리스·로마, 혹은 유럽의 ‘전통적’ 건축 양식을 차용한 수정 설계안을 제출했지만, 이번엔 그 어느 것 하나 ‘근대적’이지도, ‘미국적’이지도 않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caption id="attachment_7307" align="aligncenter" width="1355"]사진 설명 : 밀스의 도안 (1840년대); 사업이 중단된 워싱턴 기념비 (1860년대); 사업이 재개되었을 때 제출된 매튜의 도안 (1870년대). 인도의 파고다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출처: Kirk Savage. Monument Wars)[/caption]

‘근대’와 ‘미국’을 동시에 담은 영원불변의 기념비. 기념비 재건축을 책임졌던 케이시는 이 쉽지 않은 과제를 건축 양식이 아닌 근대 과학기술을 통해 풀었다. 즉 최종안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오벨리스크 형태를 유지하되, 높이를 더 키워 현존하는 건축물 중 가장 높은 건축물로 만들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기술인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방문객으로 하여금 기념비의 꼭대기에 설치된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직 워싱턴 기념비만 길이가 555피트로 허공으로 솟아서 다른 산과 비교하여 가장 높으며, 그 위에 올라가서 원근을 내려다보는 것이 장관이라 할 만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념비로 가니 관람하러 온 사람이 매우 많다. 비 밑에 돌문이 있어 들어갔더니… 정중앙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기계를 사용하여 오르내리게 함으로써 사람이 힘들지 않게 하였다… 그 위에 서니 갑자기 하늘 위로 날아올라간 것처럼 느껴진다… 최상층에 도착하여…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도로의 종횡이 바둑판같고, 가옥이 빽빽하게 있는 것이 조약돌을 쌓아놓은 듯하다. 미국 수도 일국이 눈 아래 있고… 사방을 돌아보니 수백 리가 완연히 지척에 있다. 비가 높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황홀하여 마치 두 눈의 힘으로 천 리를 달려 갈 수 있을 듯하다.” (『미행일기』, 150~151쪽)

[caption id="attachment_7308" align="aligncenter" width="1190"]사진 설명 : 완성된 워싱턴 기념비와 내셔널 몰(1902년). 워싱턴 기념비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출처: National Mall Coalition)[/caption]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념비에 오르는 것은 박정양뿐 아니라 방문객 누구에게나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의 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워싱턴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지상에 있을 때 그렇게 감탄했던 광활한 미국의 자연과 물질문명이 마치 장난감 같이 보이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광경. 마치 소인국에 간 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향수병을 겼고 있었던 박정양은 그 순간 한성을 떠올렸다. 사방이 이렇듯 한눈에 들어오니, 한성도 멀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이내 헛된 생각임을 깨닫고 기념비를 내려왔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한성과 워싱턴 사이의 지리적 거리만큼, 조선과 미국의 근대화 속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는지 모른다. 워싱턴 기념비는 그렇게 미국의 우위를 시공간적으로 경험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박정양의 기록으로 보아 그들이 워싱턴 체류기간 동안 도로 정비, 위생 개선, 식수 사업, 그리고 특히 기념 공간과 상징 공간 조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또 한성부와 독립협회에서 펼쳤던 사업들(특히 식수 사업과 공원 조성사업)을 보면 유사점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워싱턴 경험이 대한제국 성립 전후한 시기 이루어졌던 도시개조사업에 과연 모델이 되었는지, 만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다.

정부의 튼튼한 재정은 물론, 강력한 행정력과 공권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도시개조사업이다. 워싱턴의 경우도 한 세기나 걸리지 않았는가. 19세기 말 나라 안팎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던 조선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에는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행일기』, 푸른역사, 2015.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속습유』, 푸른역사, 2018.
김광우, 「대한제국시대의 도시계획: 한성부 도시개조사업」 『향토서울』 50, 1990.
한철호, 「대한제국 초기 한성부 도시개조사업과 그 의의: ‘친미’ 개화파의 치도사업을 중심으로」 『향토서울』 55, 1999.
유치선 · 이수기, 「대한제국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재평가: 근대도시계획의 보편적 특성을 중심으로」 『국토계획』 50권 3호, 2015.
Joseph R. Passonneau. Washington Through Two Centuries: A History in Maps and Images (The Monacelli Press, 2004)
Kirk Savage. Monument Wars: Washington, D.C., the National Mall,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Memorial Landscap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