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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장의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신채호 부인으로 헌신적 삶… 나석주 의거 땐 의열단 도와

BoardLang.text_date 2019.04.13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신채호 부인으로 헌신적 삶… 나석주 의거 땐 의열단 도와


③ 전문직 여성으로 만세운동 주도 박자혜 / 곳곳 한국인 간호사들과 태업 이끌어 / ‘간우회’ 조직 결성… 日경찰 주목받아 / 당국 감시에 북경으로 가 의대서 공부 / 신채호 만나 결혼 육아·생계 위해 귀국 / 남편 영어의 몸 되자 옥바라지에 온힘 / 해방 2년 남겨두고 셋방서 쓸쓸히 숨져

 

한국역사연구회의 역사콘텐츠 전문브랜드인 ‘역사공장’은 세계일보에 여성독립운동가 열전을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예지숙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90218003388)

예지숙(한신대 한국사학과 외래교수) 


 

박자혜(1895~1943)는 독립운동가로서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며, 그간에는 신채호의 부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가 독립운동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 데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박자혜는 궁녀로 사회에 입문하였으며 당대에 흔치 않은 전문직인 산파이자 간호사로 성장하였다. 비범한 독립운동가가 아닌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가던 그녀의 삶은 3·1운동과 신채호와의 만남으로 송두리째 변하였다. 여기에서는 20세기 초반을 살다간 박자혜의 삶을 개인·여성이라는 면에 집중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caption id="attachment_7099" align="aligncenter" width="500"]박자혜 여사 사진[/caption]

 

직업여성으로 성장한 박자혜

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출생하였다. 여기서 출생 연도와 출생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음을 밝혀둔다. 4세의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10년까지 궁녀로 일하였다. 한번 궁에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고들 하지만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궁에서 나온 박자혜는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들어가 여학생이 되었다. 1914년에 기예과를 2회로 졸업하고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산파 교육을 받았다. 졸업과 함께 산파면허증을 획득하였고, 1916년쯤부터는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한국에서 산파 면허제도는 1914년부터 실시되었다. 산파는 당대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새롭고도 드문 전문직이었다. 우선 산파는 간호사로 병원에 취직할 수 있었다. 개업할 수도 있어 결혼의 제약에서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근대적 위생을 실현하는 의료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만한 직업이었다. 한 신문기사에서는 산파의 직업적 가치를 ‘새 생명의 탄생을 취급하는 것이므로 그 사회적 중요성은 실로 크며, 인간사회의 운명을 위하야 가장 축복받아야 할 거룩한 직업’이라고 치켜세웠다. 경제적 이득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역할 때문에 일제 시기 활약한 여성명사 중 산파를 직업으로 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일례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유명한 정종명도, 진주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하여 모자보건사업을 한 한신광도 산파였다.

 

3·1운동이 몰고 온 변화

박자혜는 궁인, 학생, 간호부로 생활하면서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고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여성주체로 성장하였다. 이때까지 그녀의 삶에 민족의식·정치의식의 영향이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3·1운동 전까지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목도하지도 않았고, 민족의식에 접속할 만한 사회집단에 가까이 있지도 않았다. 우선 사립 조산원양성소의 교육은 전문인을 양성하고 더 나아가 근대적인 의학을 보급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졸업생들은 신문에 사진이 나오고 이력이 소개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출산위생을 책임질 재원으로 각광받았으며, 위생으로 대표되는 근대문명을 전파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또한 박자혜가 근무한 조선총독부의원의 경우에도 의료 인력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전체 간호사 중 한국인 간호사의 비중을 보면 1916년 23%, 1917년 16%, 1918년 8%, 1919년 10% 정도였다. 조산부양성소도, 조선총독부의원도 일본이 주도하는 근대문명의 우월성이 압도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거나 제국주의의 부당성을 인식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caption id="attachment_7100" align="aligncenter" width="500"]1928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박자혜 여사 산파원 기사[/caption]

그러나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시위는 직업인 박자혜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만세시위를 경험하였다. 연일 만세시위가 계속되고 부상자들이 실려 오자 박자혜의 정치적 각성이 시작되었다. 박자혜는 병원에 실려 온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3월 6일 오후 6시 동료 간호사들을 모아 함께 시국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고 10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또한 다른 병원의 한국인 간호사들과 연락하여 태업을 주도하였으며 ‘간우회’라는 간호사 조직을 만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행동을 하면서 박자혜는 일본 경찰에 주목을 받았다.

 

신채호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

만세운동에 가담하면서 당국의 주목을 받은 박자혜는 병원을 그만두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서 공부를 하던 중 1920년 이은숙의 소개로 신채호(1880~1936)를 만났다. 이은숙은 우당 이회영의 부인이며 이주 독립 운동가들의 삶을 담은 『서간도 시종기』를 쓴 인물이다. 신채호는 1895년에 조씨 부인과 결혼했지만 1910년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밭 5마지기의 재산을 주며 친정으로 돌려보내 ‘실질적인 이혼’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박자혜가 신채호와 같이 산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신채호는 자신은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알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921년 첫 아이를 출산한 박자혜는 1922년에 임신 5개월의 상태로 육아와 생계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극장 뒷골목에 소재한 인사동 122번지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아이들과 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산원은 요청이 있을 때 산모의 집으로 왕진을 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월수입 40원 정도는 올린다는 말도 있었지만 실상 수익은 시원찮았다. 근대 의학이 출산에 개입하는 정도도 낮았고 계몽적인 수준이었으며 산파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수요도 크지 않았으며 조산원이 도시에 집중되어 실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편이었다. 육아와 가사노동에 경제생활까지 전담한 박자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caption id="attachment_7101" align="aligncenter" width="500"]여성 독립운동가 박자혜 여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결혼 기념 사진[/caption]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박자혜는 신채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부의 연을 이어 갔다. 1926년 12월 나석주의 의거 때에는 서울 지리에 어두운 그의 길잡이가 되어 의열단 활동을 도왔다. 박자혜가 신채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쯤이었다. 1928년이라는 주장도 있음을 여기서 밝힌다. 실명의 위기에 빠진 신채호가 아이가 보고 싶으니 북경에서 들어오라고 하여 그곳에서 한 달간 같이 생활했다. 비록 오랜 기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신채호는 소매동냥이라도 해서 아이들을 외국 유학시키고 싶다는 살가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기쁨도 잠시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영어의 몸이 되자 박자혜는 옥바라지까지 하게 되었다. 대련의 가혹한 추위에 지친 신채호는 조선 솜을 두껍게 넣은 옷을 넣어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한 달 벌이보다 훨씬 비싼 『국조보감』 같은 책을 부쳐 달라기도 했다. 가난한 형편에 이를 감당하지 못한 박자혜는 끝끝내 죄스러워한 듯하다. 1936년 2월 21일 신채호가 뤼순감옥에서 옥사한 후 박자혜의 삶은 더욱 어렵고 고독하였다. 상주라고 손님들이 찾아오지도 않았고 신채호 생전에 가끔 들르던 인간관계도 뜸해졌다. 1943년 박자혜는 셋방에서 쓸쓸히 사망하였다.

 

박자혜의 선택과 의지

3·1운동에 동참하기 전의 박자혜는 열혈의 독립운동가보다 보통의 한국인들의 모습에 더 가깝다. 일상의 고단함을 겪으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한국인들은 1919년 3월에서 4월에 벌어진 다양한 저항을 경험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였다. 3·1운동을 외면하였더라면 그녀의 삶은 일제가 주도하는 세계 속에서 평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그녀의 행보는 보다 과감해졌다. 북경 유학을 감행하였고 신채호와의 사랑을 선택하여 독립운동가의 고단한 삶에 함께 하였다. 그녀의 의지와 선택은 사회인으로 직업여성으로 살아온 그간의 삶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20세기 초 일찍이 직업인·사회인으로 성장한 박자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인생을 펼쳐나간 주체적인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