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세상읽기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전후(戰後)의 오키나와 도시, 나하 - 항구도시에서 중심도시로

BoardLang.text_date 2019.05.07 작성자 박현


전후(戰後)의 오키나와 도시, 나하 – 항구도시에서 중심도시로


전후 도시 재건의 과정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박현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 (http://www.redian.org/archive/123133)

박현(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원)


 

오키나와는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군인은 물론 일반인 중에서도 사망한 사람이 많았고, 폭격 등으로 도시가 많이 붕괴되었다. 전후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도시 간의 위상에 변화가 발생했다. 기존에 오키나와의 중심지였던 슈리와 항구도시였던 나하의 관계가 그러한데, 전후 도시 재건의 방침을 결정한 미군정부는 나하를 중심으로 도시의 위상을 재편하였다. 그렇다면 전후 나하와 그 주변의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이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후 나하시와 그 일대의 모습

나하시(那覇市) 및 나하 일대는 미군 공습과 미군 상륙 후 일본군과의 대치로 인해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1945년 3월 약 1,500척의 미군 함대가 오키나와 섬 주변에 집결해 포격 및 폭격을 퍼부었다. 4월 1일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섬 동해안 요미탄(讀谷)촌으로 상륙하여, 부대를 둘로 나눠 한쪽은 북상하고 한쪽은 남하하였다. 일본군은 주력부대를 기노완(宜野湾) 가카츠(嘉数) 고지에서 우라소에(浦添) 마에다(前田) 고지를 중심으로 한 중남부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남하하는 미군과 대치하였다. 가카즈 고지에서 슈리까지 약 10km가 오키나와 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다. 미군은 이 10km를 돌파하는 데 약 50일 정도가 걸릴 정도였다.

전후 나하시 및 나하 일대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전쟁 전에 6만 5천여 명의 인구가 있었고 관청, 은행, 상점이 집중되어 있던 나하시는 재와 먼지만이 남았다. 대부분의 토지는 미군이 점령하였고, 점령 초기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은 도기(陶器)를 제작하던 츠보야(壺屋) 일대 정도였다. 1945년 10월 23일에야 미군정부는 민간인이 기존의 거주지로 이동할 수 있게 하였으며, 11월 10일 츠보야로 이주 허가가 내려졌다.

츠보야 마을에는 집과 가마가 남아 있었기에 도기 장인들이 모여 그릇 등의 도기 생산을 시작하는 한편, 집을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 주택 확보에 주력했다. 이후 츠보야 마을에서 미군에 강력히 요청하여 나하 최초의 행정기관(츠보야 구역소區役所)이 설립되었고, 츠보야 마을은 1946년 4월 4일 나하시로 승격하였다. 도기 생산에서 전후 재건을 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하는 경제부흥의 중심이었다.

슈리(首里)의 경우, 슈리 주민들은 각지의 수용소로 흩어져 있었다. 그 중 신문기자였던 나카요시(仲吉)는 승전국이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한 영토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얻어 미군에 오키나와 반환과 슈리시의 개방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이 교섭이 주효하여 12월 14일 44명의 선발대가 슈리에 들어갔다. 선발대는 미군의 협조를 얻어 미군 부대 폐기물자인 건축자재를 활용해 주택을 정비하였다. 이후 학교, 농작물 종(種) 배포, 식량생산 등의 재건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문화 활동을 개시하였다. 왕궁이 있었던 고도의 긍지를 되찾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처럼 슈리는 전통의 류큐문화 부흥을 긍지로 삼았다.

마와시(真和志)는 전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지역이 개방되지 않아, 피난민들은 오키나와전에서 가장 많은 피가 흘렀던 마부니(摩文仁)촌 고메스(米須)와 이토스(糸洲)에 텐트를 펴고 정착했다. 1946년 1월 23일에는 본격적인 이동이 개시되면서 전도의 수용소에 산재되어 있던 주민이 돌아와 계획적인 고향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돌아온 곳에는 연고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유해와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이에 무덤을 만들고 ‘진혼’이라고 새긴 탑을 세웠다. 이후에도 히메유리 탑을 세우는 등, 마와시는 사자를 위로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히메유리 탑은 전쟁에 종군했던 오키나와현립 제일고등여학교와 오키나와사범학교 여자부 학생들을 기리는 위령비로, 1946년 4월 7일 건립되었다.)

오로쿠(小禄)에는 일본군 비행장이 있고 해군사령부가 있어 미군의 공격이 격렬했던 곳이었기에 다른 곳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이 많았다. 오로쿠촌은 미군이 대부분 점령했고, 1946년 2월 일부 지역만이 개방되어 주민들이 귀환하였다. 좁은 땅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큰 부락이 형성되었고, 4월 10일 전후 오로쿠촌이 다시 탄생하였다. 오로쿠촌은 미군의 공격이 심했던 만큼 경작지도 없고 주민들이 생활하는 토지도 작아서,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을 미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caption id="attachment_7062" align="alignnone" width="3107"]나하시 구거주지의 반환추이도(1945-1592)
출처 : 김백영,「오키나와 도시공간의 문화적 혼종성 – 나하시 국제거리의 역사성과 장소성」, 『경계의 섬, 오키나와』, 논형, 2008[/caption]

 

대나하시(大那覇市)의 탄생

대나하시 탄생은 군용지 개방, 도시계획, 시정촌(市町村) 합병 등과 관련되어 있다. 시정촌 합병의 경우, 처음에는 1市2村 합병(나하시, 마와시촌, 미나토촌)으로 시작하였다. 미나토(1)촌이 대부분 마와시촌 구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마와시촌은 이 합병을 거부하였지만, 결국 미나토촌은 미군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다.

다음으로는 2市2村 합병(나하시, 슈리시, 마와시촌, 오로쿠촌)이 문제가 되었다. 주요 쟁점은 나하시와 마와시촌의 경계 설정이었다. 1954년 들어 오로쿠촌, 나하시, 마와시촌 모두 합병에 합의하였지만, 나하시가 흡수합병을 고려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마와시촌이 대등합병을 주장하면서 합병이 무산되었다. 마와시촌이 합병을 반대한 반면 마와시촌을 제외한 슈리시, 오로쿠촌은 먼저 나하시로 편입되었고, 3년 뒤인 1958년 마와시촌도 결국 나하시로 편입되었다.

한편, 전후 미군은 오키나와 전역을 직접지배하면서 거주에 제한을 두었다가 점차 지역을 개방하였다. 1945년 10월부터 기존의 거주지로 귀환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개방하였는데, 나하 지역은 1945년 11월부에 츠보야와 마키시(牧志) 개방을 시작으로 전후 부흥을 시작하였고, 1952년 11월 4일 일부 군용지를 제외한 나하시 전 지역이 개방되었다.

그런데 군용지가 많은 나하시의 특성상, 시역(市域)을 확장하는 방법은 군용지 해방과 인접행정구역 편입 외에 공유수면(公有水面) 매립밖에 없었다. 특히 분묘지가 미군에 접수된 사람들이나 나하항(那覇港) 확장정비를 위해 소유지가 ‘해몰(海沒)’된 지역의 이주지로, 또한 도시계획사업에 의해 퇴거당한 사람들을 위해 매립지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밖에 상공업용지 조성, 사회자본 조성, 나하시의 기채 상환을 위한 재원으로서도 매립지가 필요하였다. 이 시기의 매립공사는 공유수면의 매립허가 ․ 면허 ․ 소유권양도 모두 미군의 권한이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더불어, 나하시에서는 기지 개방이 시작되기 전부터「수도」를 목표로 한 도시계획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미군정부는 1946년 11월 1일 오키나와 민정부(民政府)에 나하 부흥의 설계도를 제시하였다. 미군정부의 의도는 ‘나하를 오키나와의 수도로서 근대적으로 정비해 동양 제일의 근대도시로서 면목을 일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7년 19월 7일자로 특별포고 제22호 및 지령 제44호를 공포했다. 이는 공공의 목적을 위한 토지수용을 규정하고 그 권한을 민정부에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오키나와 민정부는 미군정부의 지시를 따라 도시계획에 착수하였다. 1949년 11월 8일 민정부 공무교통부(工務交通部)에서는 오키나와의 건축 ․ 도로 ․ 항만 ․ 철도 ․ 전기 ․ 수도 부문에 걸친 조사위원을 임명해 실지조사 후 부흥계획안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당시 민정부는 나하시의 도시계획은 민정부에서 수립하고 실시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고, 나하시 또한 민정부가 주체라는 생각 하에 나하시는 측면에서 도시계획 실현을 위해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민정부에서는 도시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도시계획과 및 도시계획위원회 설치를 미군정부에 요청했지만, 미군정부는 도시계획과 설치가 자치체의 권한을 침해하므로 불가하다고 답변하였고, 나하시 도시계획 입안의 권한을 나하시로 옮겼다.

이에 나하시는 도시계획위원회를 설치해 도시계획 마스터 플랜을 검토하였고, 1950년 3월 27일 임시의회에서 도시계획의 대강을 자문하였다. 4월 13일에는 도마(当間重民) 나하시장이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주요 수뇌부에게 도시계획을 설명한 뒤 검토를 거쳐 군정장관의 인가를 받았다. 이후 도시계획을 실제로 진행하기 위해 와세다 대학 교수인 이시카와 히데아키(石川榮耀)를 불러 구체적인 지도를 받았다.

나하의 도시계획은 당초부터 합병을 염두에 두었으며, 1953년 8월 17일「도시계획법」이 성립되고 점차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9월 28일에는「지정도시」로서 인가를 받았으며, 54년 6월 4일에는 마와시를 제외하고 구역으로서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인가를 받았다. 1956년 2월 7일에는 입법원에서 제정된「수도건설법」이 공포되었다. 이는 단순히 나하시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계획하고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동시에 미국 민정부는 나하시의 도시계획사업에 대한 특별보조금 지출을 결정했다. 2월 17일에는 도시계획심의회가 개최되어 나하시 계획구역에 마와시를 포함하기로 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7063" align="alignnone" width="4375"]나하시도시계획도(1952년 도시계획과 작성)
출처 : 那覇市企画部市史編集室 編,『那覇市史』資料篇 第3券1, 1987[/caption]

더불어, 현재 오키나와의 명소 중 한 곳인 국제거리 또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국제”라는 말은 현재의 거리뿐만 아니라 여러 거리에 붙어 있던 이름으로, 지금의 국제거리는 원래「마키시 가도(牧志街道)」,「마키시 대로(牧志通り)」로 불렸다. 1948년 1월 21일 이 거리 가운데에 ‘어니 파일(Ernie Pile) 국제극장’이 만들어졌고, 극장이 유명해지고 주변에 상가가 들어서면서 거리가 번창하였다. 이에 당시 크게 번성하던 어니 파일 국제극장을 따서 “국제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제거리는 1949년 당시 취재차 오키나와를 방문한 미국인 신문기자에게 “기적의 1마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전쟁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거리를 훌륭하게 발전 ․ 부흥시켰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7064" align="alignnone" width="1964"]1950년대 국제거리
출처 : 那覇市歷史博物館 編,『戰後をたどる』通史編 第3卷 現代史 改題, 2007[/caption]

현재 나하와 슈리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할까. 대체로 나하는 ‘오키나와의 중심도시’ 또는 ‘국제거리’, 슈리는 ‘슈리성이 있는 곳’ 정도가 떠오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나하와 슈리의 전후 재건을 미군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면 두 도시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전쟁 이전처럼 슈리가 오키나와의 중심 도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1) 미나토촌은 특별한 인구집단으로, 나하항에서 미군의 항만하역작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거주지였다.

 

<참고문헌>

那覇市企画部市史編集室 編,『那覇市史』資料篇 第3券1, 1987.
那覇市歷史博物館 編,『戰後をたどる』通史編 第3卷 現代史 改題, 2007
김백영,「오키나와 도시공간의 문화적 혼종성 – 나하시 국제거리의 역사성과 장소성」,『경계의 섬, 오키나와』, 논형, 2008.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김경자 옮김,『오키나와 이야기』, 역사비평사, 2016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정영신 ․ 미야우치 아키오 옮김,『오키나와 현대사』, 논형,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