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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황금 반도와 식민의 역사

BoardLang.text_date 2019.03.11 작성자 박준형

황금반도와 식민의 역사


해협식민지의 역사 : 열대의 다민족 · 다문화 사회들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박준형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 (http://www.redian.org/archive/123133)

박준형(근대사분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와 ‘황금반도’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남긴 여행서들 중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은 가장 대표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비숍 여사는 생애 대부분을 대영제국의 황금기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와 함께 하였다.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멤버이기도 했던 그녀는 평생에 걸쳐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는데, 이 위업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실현한 영국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caption id="attachment_7049" align="alignnone" width="560"]비숍 여사(왼쪽)와 그녀가 찍은 금강산(오른쪽).[/caption]

비숍 여사가 한국을 찾은 것은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까지 네 차례의 여행을 통해서였다. 이 시기 한국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1894년 초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봉기는 급기야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계기로 청일 양국이 군사적 개입을 시도함에 따라 한반도는 외국 군대들이 횡행하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해를 넘긴 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나, 삼국간섭을 겪은 일본은 세력의 만회를 꾀한 끝에 왕비 시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6년 초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였다. 그리고 1년 뒤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황제의 지위에 오르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비숍 여사는 이 기간 동안 서울과 같은 도시는 물론 금강산의 자연을 둘러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국경 너머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은 “여행해 본 나라 중에서 가장 흥미 없는 나라”라고 할 정도로 좋지 못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시대의 격동, 그리고 그러한 격동까지 이겨낼 것 같은 시베리아 조선인들이 보여준 가능성은 끝내 그녀를 한국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다. 주한영국총영사로 재직했던 힐리어(Walter C. Hilier)가 그녀의 저서를 ‘진보’ 속에 사라지고 말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라고 평한 것은 지금 볼 때 참으로 적절한 말이었다.

비숍 여사가 한국 여행에 앞서 출간한 책으로는 『미국에 온 영국 여인(Englishwoman in America)』(1856), 『하와이군도(The Hawaiian Archipelago)』(1875), 『일본 미답의 길(Unbeaten Tracks in Japan)』(1880) 등이 있다. 『황금반도와 그 쪽으로 가는 길(The Golden Chersonese and the way thither)』(1883)도 그 중 하나였는데, 이 책은 일본 여행 후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급작스런 행로 변경으로 이루어진 즉흥 여행의 결과였다. ‘황금반도’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반도를 가리킨다. 그 남쪽 끝의 싱가포르, 얼마 전 북미 정상 간의 세기적 담판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곳에서부터 그녀의 ‘황금반도’ 탐험은 시작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7050" align="alignnone" width="565"] 『황금반도』의 표지(왼쪽)와 코끼리를 탄 비숍 여사의 모습을 그린 삽화(오른쪽)[/caption]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는 ‘아시아’라는 하나의 권역으로 묶여 있다. 그러나 최근 경제지들에서 동남아시아를 ‘기회의 땅’이라 명명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에 대한 낯설음은 단순히 ‘동남’과 ‘동북’이라고 하는 문자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보려는 경향 자체가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사적 고려에 의해 태동된 것임을 떠올린다면, 그러한 낯설음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 지역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9%를 차지한다는 사실마저도 뜻밖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황금반도’는 한국과 달리 그 자체로서 이미 비숍 여사를 매료시켰다. 그런데 그녀가 ‘황금반도’를 여행하던 시기는 영국의 식민지 전략이 ‘거점 지배’에서 ‘영역 지배’로 이행하는 또 다른 격동의 시대였다. 이러한 ‘격동’들의 체험이야말로 ‘동남’과 ‘동북’ 아시아가 공유하는 지반일 것이다. 만약 그 위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와 ‘황금반도’의 상이한 경험을 말할 수 있다면, 생각지 못했던 역사적 가능성들과도 대면하게 되지 않을까. 그럼 이제부터 ‘황금반도’가 말하는 오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해협식민지의 전사(前史)

‘황금반도’의 격동을 말하기에 앞서 그 격동을 야기한 기원들 중 하나인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영국 동인도회사는 1600년에 설립되었다. 설립 근거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수여받은 특허장에 있었는데, 아프리카 희망봉과 남아메리카의 혼곶 사이의 무역독점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비해 설립 시기는 앞섰지만 능력에서는 크게 뒤쳐져 있었다. 자본금은 18배, 1610년까지 띄운 무역선의 숫자만도 3.5배의 차이가 났다. 영국이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향신료의 산지인 몰루카제도는 물론 집산지인 말라카까지도 점령한 상태였다. 결국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밀린 영국은 발길을 돌려 인도에서 면포 수입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였다.

분명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를 아시아무역의 거점으로 구축해 갔다. 마술리파탐과 수랏을 시작으로 마드라스, 봄베이에 상관을 설치하였고, 17세기 말에는 벵골 지방으로 진출하여 캘커타에서의 요새 및 상관 건설권도 획득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영국은 확실히 섬유제품 무역에서 경쟁국들보다 우위에 섰다. 영국에게 있어서 18세기 전반은 번영과 안정의 시기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프랑스가 지원하는 벵골 태수와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플라시전투, 1764년), 또 그 전쟁의 승리로 벵골 등지의 징세권을 새로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및 행정에서의 막대한 비용 증가로 인해 도리어 본국 정부의 구제를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상사(商社)에서 영토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그리고 벵골 지방의 지배자에서 전 인도의 지배자로 변신해 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동남아시아에서의 거점 확보도 재차 시도되었다. 이는 인도 동해안 지역의 불안한 방비 상황과 광둥을 오가는 무역선들의 기항지 요구 등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건설된 거점이 바로 말레이반도의 페낭이다.

[caption id="attachment_7051" align="alignnone" width="565"]영국의 해협식민지(1811년 제작 지도 위에 작성. 지도는 Cheah Boon Kheng, Early Modern History 1800∼1940, Archipelago Press, 2001, p.8에서 인용)[/caption]

 

해협식민지➀: 페낭

조지타운은 아시아계의 도시다. 중국인, 버마인, 자바인, 아랍인, 말레이인, 시크교도, 마드라스인, 클링인, 출리아, 파시교도 등 아시아계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들은 정크선이나 증기선, 다양한 아랍 선박을 타고 여전히 페낭으로 몰려든다. 아시아계 이주자들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궁핍에 빠지지도 않으며, 저마다 고유의 의상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한 채 페낭에서 질서를 지키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다. 홍해에서 중국해까지, 메카에서 광저우까지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잡다한 유색 인종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까닭이 궁금하다면, 클링 선원 한 명이 짧은 영어로 내게 한 말이 답이 될 것이다. “영국 여왕 좋아. 노동자들 돈 벌고, 재산 안전해.” (이사벨라 L. 버드 비숍 저 · 유병선 역,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반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7, 274쪽)

영국 동인도회사의 컨트리 트레이더(Country Trader, 동인도회사로부터 아시아 역내 무역의 허가를 받은 사무역(私貿易) 상인)였던 프란시스 라이트(Francis Light)는 1771년에 말레이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커다의 술탄을 상대로 항만 양도 교섭에 나섰다. 당시 부기스인들의 공격으로 고심하고 있던 술탄은 항만 양도의 대가로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으나, 동인도회사가 그를 거절함에 따라 교섭도 결렬되었다.

그 사이 이웃나라 시암(현재의 태국)에서는 버마의 공격을 받아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톤부리 왕조를 거쳐 랏따나꼬신 왕조가 들어섰다(1782년). 커다의 술탄은 버마와 시암의 새 왕조로부터 동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 받았다. 이에 외국 간 전쟁에 말려들 것을 우려한 술탄은 페낭 할양을 조건으로 재차 동인도회사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결국 페낭은 1786년에 정식으로 영국에 할양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7052" align="alignnone" width="565"]페낭의 콘월리스 요새(필자 촬영).[/caption]

프란시스 라이트는 페낭 섬 동북쪽에 별 모양의 요새를 건설하였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이 요새는 라이트 일행이 상륙 후 처음 정착한 지점을 말해 주기도 한다. 요새의 이름은 벵갈 총독의 이름을 따서 콘월리스(Charles Earl Cornwallis Ⅱ)로 붙여졌으며, 몇 차례의 수축(修築)을 거듭하면서 식민 통치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요새 남쪽의 킹 에드워드 광장 한 가운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시계탑이 세워졌고, 그 주변에는 해협식민지 관청들이 들어섰다. 시가지로 조성된 조지타운의 도로 패턴(즉 동쪽의 비치 스트리트, 북쪽의 라이트 스트리트, 남쪽의 출리아 스트리트, 서쪽의 피트 스트리트) 또한 라이트에 의한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조지타운 내 도로들을 다양한 커뮤니티에 할당했는데, 이에 따라 말레이인들은 출리아 스트리트 남쪽에 자리를 잡았고, 유라시아인들은 비숍 · 처치 스트리트, 중국인들은 차이나 · 마켓 스트리트, 그리고 유럽인들은 북쪽의 해안 지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이 점령한 페낭은 점차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그러나 정작 영국 동인도회사의 페낭에 대한 관심은 줄어만 갔다. 첫 번째 이유는 페낭이 해군기지 건설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역 거점으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점차 명확해졌다. 낮은 관세와 느슨한 규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도서부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그 위치가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페낭의 교역량은 1810년대까지의 증가 후 감소 추세에 들어갔다.

[caption id="attachment_7053" align="alignnone" width="568"]페낭의 도시계획도(왼쪽 위, Cheah Boon Kheng, Early Modern History 1800∼1940, Archipelago Press, 2001, p.40에서 인용)와 페낭의 다양한 종교시설들(필자 촬영).[/caption]

 

해협식민지➁: 말라카

“배 위에서 본 말라카의 첫인상은 아주 흥미로웠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인 도시의 하나인 말라카는 포르투갈인에 의해 건설되어 네덜란드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지금은 영국의 관할 아래 있지만, 실질적 지배자는 중국인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반도』, 140∼141쪽)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발발과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쳤다. 프랑스 혁명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네덜란드는 해외식민지를 대(對)프랑스 동맹국인 영국에게 인도하였다. 영국은 1795년에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동맹국으로서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직후 그것의 접수에 나섰다. 이어서 프랑스 지배 하의 자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전개하여 1811년에는 그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7054" align="alignnone" width="564"]네덜란드 광장의 현재(왼쪽 위)와 과거(왼쪽 아래). 세인트 폴 성당의 과거(오른쪽 위)와 현재(오른쪽 아래). (과거 사진은 Wendy Khadijah Moore, Malaysia: A Pictorial History 1400∼2004, Edition Didier Miillet, 2004, p.125쪽에서 인용, 현재 사진은 필자 촬영)[/caption]

유럽인이 당도하기 이전의 말라카에는 본래 수마트라 팔렘방 출신의 힌두 왕자인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가 세운 술탄 국가가 있었다. 파라메스와라는 마자파힛 왕조의 팔렘방 정복을 피해 싱가포르, 무아르, 조호르 등지를 전전하다가, 1402년에 말라카에 정착한 후 파사이 출신의 공주를 맞이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한 것은 이로부터 100여 년의 시간이 경과한 1511년의 일이다. 포르투갈은 말라카강 하구의 세인트 폴 언덕에 요새를 축조하여 거점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요새는 1641년에 네덜란드에 의해 무너졌다. 그리고 백수십년 뒤 말라카는 또다시 그 주인을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바꾼 셈이다.

영국의 자바 점령 직전에 토마스 스탠포드 래플즈(Thomas Stanford Raffles)라는 인물이 말라카에 상륙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으로서 자바 점령을 공작하기 위함이었는데, 동남아시아에 영국의 ‘신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그의 구상은 이 과정에서 제출되었다.

이 구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자바 점령을 통해 페낭에서부터 자바 및 몰루카제도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해역에서 군사적 우위를 점한다. 그와 함께 유력한 토착 왕국의 항시(港市)를 무역 거점으로 육성한다. 그리고 국왕들은 과거 이 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체제에서와 같이 영국의 동인도 총독을 대왕으로 받든다. 이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이른바 ‘영국의 평화’를 실현한다는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래플즈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견제를 위한 네덜란드와의 협조를 중시하여 1816년과 1818년에 각각 자바와 말라카를 네덜란드에 반환했기 때문이다. 이후 영국의 ‘신제국’은 말라카해협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라인이 아니라,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홍콩과 상해 쪽을 향하는 라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향 전환과도 맞물려 토착 왕국의 항시들을 육성하는 대신 후술하는 바와 같이 다름 아닌 래플즈 그 자신에 의해 싱가포르가 ‘건설’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7055" align="alignnone" width="565"]말라카 도시계획도(1744년 제작)(왼쪽 아래, Wendy Khadijah Moore, Malaysia: A Pictorial History 1400∼2004, Editions Didier Millet, 2004, 28쪽에서 인용)와 현재의 말라카강 하구(오른쪽 아래) 및 요새 반대편의 거주구역(위, 이상 필자 촬영)[/caption]

더구나 ‘신제국’에 있어서 영국의 파트너가 된 것은 래플즈가 경계를 마다하지 않던 중국인이었다.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이 말라카강을 사이에 두고 요새 건너편에 새로운 거주지를 조성할 때, 술탄 측을 지원한 이슬람계 주민들은 모두 추방된 데 반해, 중국인들은 상업상에 유리한 강 하안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네덜란드가 새로운 지배자로서 등장했을 때에도 중국인들은 다시 그 파트너로 초청을 받았다.

래플즈는 이처럼 원주민을 억압하고 중국인을 지원해 온 기존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중국인은 토착세력이 아닌 까닭에 벌어들인 돈을 본국에 송금해 버릴 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의 사회를 형성하여 토착세력을 구축해 버리므로 상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경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신제국’의 자유무역항들은 관세수입을 대신하여 여전히 중국인들의 징세청부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신제국’은 자유무역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화교네트워크에 의한 독점과 공생관계에 있던 것이다. 래플즈가 건설한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의 화교센터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역설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해협식민지➂: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영국 해협식민지의 수도이자 총독 관저가 있는 곳이다. 상업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해 수비대와 방어 시설을 갖추고 군함들도 수시로 순시한다. 중국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시끌벅적한 다인종 이민자 사회에 ‘영국의 북소리’가 질서를 부여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반도』, 127쪽)

영국의 자바 및 말라카 반환에 크게 반대했던 래플즈는 결국 말라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거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말레이어는 물론 그 문학과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17세기 초 조호르 왕국에서 편찬한 책에 등장하는 고대 도시 ‘싱가푸르’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가 싱가포르에 상륙한 것은 말라카 반환 이듬해인 1819년이었다.

래플즈는 싱가포르를 ‘건설’함에 있어서 민족 간 분리계획을 도입하였다. 그는 6개의 주요 민족 집단(즉 유럽인,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아랍인, 부기스인)에 따라 지구를 구획하였다. 가장 좋은 토지는 관청 및 광장 지구에 할당되었다. 그 다음으로 좋은 토지는 유럽인 지구에, 그 다음은 기본적인 불신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지구에 할당되었다. 게다가 중국인 지구의 경우에는 중국인들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성(省)별로 다시 분할되었다. 아랍인, 말레이인, 부기스인 지구는 유럽인 지구 동쪽 편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인도인 지구는 유럽인 지구와 중국인 지구를 가로지르는 싱가폴강 상류에 조성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7056" align="alignnone" width="564"]싱가포르 도시계획도(1822년 제작)(위, Cheah Boon Kheng, Early Modern History 1800∼1940, Archipelago Press, 2001, p.38에서 인용). 지도에는 민족별 거주지구가 표시되어 있다(①관청 및 광장 지구, ②상업지구, ③유럽인 지구, ④중국인 지구, ⑤아랍인 지구, ⑥술탄 및 말레이인 지구 ⑦부기스인 지구) 래플즈가 상륙했다고 하는 장소(아래, 필자 촬영)에는 래플즈 동상이 세워져 있다.[/caption]

1824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들은 영국의 싱가포르 영유를 공식화해 주었다. 게다가 영국과 네덜란드는 각각의 거점이던 수마트라의 벵쿨루와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를 교환함으로써, 말라카해협의 동쪽과 서쪽을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의 세력권으로 상호 인정하였다. 1826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싱가포르, 말라카, 페낭을 통합하여 ‘해협식민지’라는 행정단위를 발족시켰다.

싱가포르가 말라카해협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더해감에 따라, 해협식민지 발족 당시 페낭에 설치되어 있던 총독부는 1832년에 싱가포르로 이전되었다. 1858년의 영국 동인도회사 폐지와 함께 인도가 본국 인도성(Indian Office)의 관할이 되면서 해협식민지도 인도성 소관이 되었다가, 1867년에 식민지성(Colonial Office)으로 이관되어 그 직할령(Crown Colony)이 되었다.

영국은 본래 영토적 지배보다는 무역 거점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861년부터 1874년까지 3차례에 걸친 ‘라룻 전쟁’은 영국의 정책 전환을 초래하였다. 주석광산 개발권을 둘러싼 중국인 파벌 간의 분쟁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페락의 술탄 계승 문제와도 결합되면서 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불간섭에서 적극간섭으로 정책을 전환하였고, 결국 1874년의 팡코르 조약을 통해 대타협을 성사시켰다. 다만 이와 함께 페락에는 영국인 이사관(Resident)이 주재하게 되었고, 페락의 술탄은 말레이인의 종교와 관습 이외의 모든 사항에 대해 이사관의 조언을 따르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후 슬랑오르, 네게리 셈빌란, 파항에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1896년에는 이 국가들을 연방화하고 슬랑오르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 연방정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이래로 조호르, 커다, 페를리스, 켈란탄, 테렝가누 등도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지만 연방에 포함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경계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반도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7058" align="alignnone" width="564"]페라나칸 맨션(필자 촬영). ‘海記棧’이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페낭의 중국인 비밀결사 중 하나인 ‘海山’의 리더가 사용하던 사무실 겸 주택이다. 1895년경에 세워졌으며, 중국식, 말레이식, 서양식이 병존 혹은 혼합된 웅대하고 화려한 장식들을 볼 수 있다.[/caption]

 

‘황금반도’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싱가포르는 민족적 카테고리를 바탕으로 성립된 사회였으나, 사실 민족적 카테고리의 경계는 애매하기만 했다. 예컨대 ‘말레이인’은 도래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민자일지라도 모두 ‘원주민’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행정상의 민족 분류는 통치 권력의 힘을 배경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어 갔다. 각 민족에게는 민족다움이 요구되었고, 그 실현을 통해 경계의 애매함은 소거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나 영국의 파트너로서 징세청부를 지배해 온 ‘중국인’ 후예들의 경우에는 다른 중국인 ‘동포’들에 의해 말레이어밖에 할 줄 모르는 추락한 ‘중국인’이라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생활문화나 언어가 말레이화 · 영국화한 ‘중국인’을 가리켜 ‘페라나칸(Peranaka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는 중국과 거주국 중 어느 한 쪽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전제들을 거부하고, 한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그의 행동에 작용하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요인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국가와 개인 간의 권리 및 의무와 관련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 연구자에게 있어서 페낭은 기존의 시각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소재들의 보고가 되었다.

위의 연구자에게 페낭이 그러했던 것처럼, ‘황금반도’ 또한 한국 및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의 보고가 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시아 각국의 치열했던 독립투쟁의 역사는 일본의 패전을 곧 한국의 독립으로 간주하는 인식에 의문을 던진다. 또한 다민족 · 다문화사회를 실현해 온 원리들은 예멘 난민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최근 논쟁에 새로운 사고틀을 제공해 줄 것이다.

비숍 여사는 마지막 기착지인 페낭을 떠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대의 꿈에서 깨어나고 있고, ‘황금반도’는 추억이 된다”고. 그러나 열대의 현실은 오히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꿈을 깨우고 말았다. ‘황금반도’는 말한다. “나는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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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隆, 『海の帝國-アジアをどう考えるか-』, 中公新書, 2000
篠崎香織, 『プラナカンの誕生-海峽植民地ぺナンの華人と政治參加-』, 九州大學出版會,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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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ah Boon Kheng, Early Modern History 1800∼1940, Archipelago Pres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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