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광화문, 현대사의 현재진행형 공간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송은영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 (http://www.redian.org/archive/122530) 송은영(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광화문 또는 세종로라는 장소의 중층성 광화문은 경복궁 정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동시에, 세종로와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그 일대를 통칭하는 대유법적 이름이다. 서울 도시공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곳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층적 의미를 축적해온 복합적 공간이다. 조선왕조 육백년 도읍지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성, 정치와 행정과 외교의 중심이라는 정치적 상징성, 시민의 여론이 모이고 폭발하는 장소로서의 공공성이 혼재된 공간이라는 광화문의 명성은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표성들은 광화문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된 것도 아니다. 예컨대 광화문은 2008년과 2016~17년 촛불시위의 중심지였지만,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에서 일어난 시위 공간으로 더 중요했던 장소는 각 대학교와 명동성당과 그 일대였다. 또한 광화문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청와대, 과천, 서초동, 여의도 등과 통치, 행정, 사법, 입법의 기능을 나눠 가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육조거리였다는 역사성만큼은 광화문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의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세종로의 역사성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소환되고 재구성되어 왔다. 광화문이라는 공간을 둘러싼 행위들에서 유독 중시되는 것은 ‘전근대’의 복원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일제의 훼손과 도시개발로 인한 파괴로부터 광화문을 구출하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광화문 일대를 사람들의 기억과 공론장에 소환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과 그 앞의 육조거리라는 역사적 상징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종로를 걷다 그 거리를 답사하는 무리를 간혹 마주치면 알 수 있다. 광화문 답사 가이드는 수없이 반복되는 설명 속에서도 지금 저기 서 있는 미국대사관은 언제 세워졌고 왜 이 도심에 버티고 있는지, 교보, 현대, KT 등 일부 대기업 건물이 왜 이 상징적 거리에 서 있는지,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 한복판에 아직도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곳은 과거의 의정부 터, 저곳은 이조 터, 다른 곳은 한성부 터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전근대 역사에 대한 갈망이다. 광화문 일대와 세종로에서 벌어진 파괴와 창조의 과정은 육조거리의 복원이라는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화문 일대를 둘러싼 철거, 복원, 재생의 역사는 우리가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는지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의 유산을 철거하고, 전근대 조선시대를 복원하고, 시민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재생시키려는 지속적인 시도들은, 도시공간을 정치적 필요성과 역사적 무감각 때문에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관습들을 되돌아보고 광화문 일대를 재구성한 1969~80년대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역사를 복원하는 동시에 지우는 역설의 공간 광화문 앞 세종로는 원래부터 서울의 역사적인 중심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주요 관아가 있던 육조거리였으며, 일제하에도 식민지 통치의 중심지였다. 이 거리의 역사적 중요성 덕분에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들이 나왔으며, 덕분에 한국전쟁 이전의 광화문 일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이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1960년대 이후 현대사 중심의 이 글과 상관없이 조선시대 육조거리는 어떠했으며 일제하에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순우의 성실하고 꼼꼼한 책 <광화문 육조앞길>(하늘재, 1999)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caption id="attachment_6959" align="aligncenter" width="611"]육조 터와 현재의 항공사진을 오버랩시킨 사진. (출처- 서울시.)[/caption] 광화문 일대에서 사라진 역사적 유산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1926년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 내부 시설 일부가 파괴되었던 이 건물은, 수리와 복구를 거쳐 1962년부터 ‘중앙청’으로, 19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가 1916년부터 건설하여 1926년 완공했던 이 건물은 식민지 통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던 1950년대 초반 처음으로 철거 논의가 나오기는 했어도, 이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의가 항상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철거의 당위성이 항상 공감대를 얻었던 것은 아니다. 이 건물을 대체할 만한 다른 관공서 건물도 없었던 상황에서 철거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그냥 계속 사용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많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 건물의 전격적인 철거는 오히려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가 낳은 역사적 필연성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시민항쟁의 결과로 획득한 새로운 헌법 아래서 친일과 독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제기되었고, 그 상징인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1990년 노태우 정부는 수십 년 만에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다시 거론했지만, 1991년부터 경복궁 복원공사만 했을 뿐 이 건물 철거문제에 주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부터는 사정이 달랐다. 1993~95년이 철거 문제가 전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될 만큼 쟁점화된 끝에, 결국 1995년 8월 15일 첨탑 제거를 시작으로 1996년까지 건물이 해체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총독부 건물이 해체될 수 있었던 데에는 복잡한 의제 형성의 역학이 있었다는 하상복의 연구(1)는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태우 정부가 이미 임기의 반 이상을 보낸 상태에서 …(중략)… 실제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어려웠다면 김영삼 정부는 정권을 장악한 바로 그해, 즉 신한국과 개혁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간적 상황에서 그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전혀 다른 여론의 국면을 조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91년 초반” “경복궁을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대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총독부 건물을 없애지 않으면 궁의 복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면 철거에 뒤따르는 “절차와 재정”의 문제보다 철거의 “역사적 당위성에 무게중심을 둔 인식이 압도”했다. 특히 철거가 결정된 1995년 전반기에 언론, 사회단체, 학자들의 찬반 논쟁이 뜨겁게 이어졌지만,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김영삼 정부에 의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부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정치적 스펙터클”로 실행되었다. 그것은 87년 6월항쟁이 낳은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쟁취하기 위한 “상징동원”의 작업이었다.(2) [caption id="attachment_6960" align="aligncenter" width="653"]1996년 10월 철거가 한창 진행되는 조선총독부 건물. (출처-중앙일보.)[/caption]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일제가 훼손한 경복궁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림으로써 민족사적 정통성을 입증하겠다는 정치적 행위였다.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게 아니라,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0년대부터 정치적 선전행위의 일환으로 계속해서 반복된 쇼였다. 예컨대 일제가 해체, 이전했다가 한국전쟁 때 전각이 소실되었던 광화문을 1968년 12월 총독부 정문 자리에 복원한 것이 좋은 사례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전근대의 복원’이라는 열망을 정치적 스펙터클의 창출에 이용하기 시작한 출발점에 해당한다. 광화문은 철근과 콘크리트, 박정희의 글씨로 만든 현판을 통해서나마 복원되었다. 이것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은 이후 드높았던 ‘반일’의 감정을 정권에 대한 저항의 근거에서 지지의 정서로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광화문이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되지 못했기 때문에 2006년 철거되어 2010년 또 다시 복원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한 국민적 지지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도시공간을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장으로 활용한 셈이다. 1968년의 세종로에는 광화문 외에도 반일 감정을 활용한 또 다른 정치적 상징물이 들어섰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물리친 이순신 동상을 세종로 한복판에 세운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은 1966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발족으로 가시화되어, 1968년 4월 28일 제막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반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경남 진해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면, 박정희 정권은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를 선도하는 지도자, 즉 박정희 자신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의 이미지를 함양하기 위해 이를 세웠다.(3) 박정희가 일제가 훼손한 ‘육조거리의 복원’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복원 사업 대신 충무공 동상 건립으로 이를 대신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1968년 광화문의 복원은 실제로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복원하려는 의도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같은 시기에 세종로 일대에 남아 있던 조선의 유산은 마음대로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1967년 현재의 정부종합청사를 짓기 위해 옛 조선보병대 구역에 있던 체신국 분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있던 삼군부 청헌당이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청헌당은 1960년대까지 가장 오랫동안 광화문에 남아 있던 조선시대의 유적이었지만, 정치적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는 웅장한 건축은 아니었다. 광화문을 복원하고 이순신 동상을 세종로 한가운데 세우는 동안, 정작 육조거리의 역사적 흔적은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파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일제하의 건축 유산들이다. 조선총독부를 제외하고 세종로에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1990년 철거된 옛 서울시경 별관 건물이다. 현재의 광화문 열린마당 공간이 공원처럼 비어 있는 것은, 이 옛 의정부 터에 1910년 건설되었던 경기도청 겸 경기도 경찰국 청사 건물을 내무부 치안국(경찰청), 서울시경별관으로 쓰다가 1990년에야 철거했기 때문이다. [caption id="attachment_6961" align="aligncenter" width="623"]광화문 의정부 터(현재 광화문 열린마당)에 1990년까지 남아 있던 옛 경기도청 건물. 그 뒤로 당시 율곡로 입구에 있었던 한국일보사 건물과 타워가 보인다. (https://m.blog.naver.com/s5we/220975466489)[/caption] 세종로에서 용도 상 역사적 흔적을 남기고 있는 유일한 건물은, 미국대사관 옆의 KT 광화문지사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84년에 국제통신센터라는 이름으로 신축된 새 건물이다. 일제는 조선시대 호조 터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운영하다가, 식민지 시기 막바지였던 1940년 이 자리에 전매국 청사를 신축 완공했다. 이 건물은 1944년부터는 경성중앙전신국, 해방 이후부터는 서울중앙전신국이 사용하다가 1979년 철거되었다. 즉 현재 KT 건물이 이곳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 자리에 전매국과 중앙전신국을 만들었던 일제의 유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caption id="attachment_6962" align="aligncenter" width="601"]1961년 촬영된 서울중앙전신국 건물. 1979년 철거되고, 1984년 이 자리에 현재 KT광화문지사 건물로 사용되는 국제통신센터 건물이 세워졌다. (출처- 국가기록원.)[/caption] 1960~70년대에 파괴된 것은 육조거리의 흔적이나 일제의 근대건축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마도 세종로 건물들 중에서 사람들이 왜, 그리고 언제 그 자리에 들어섰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건물은 세종문화회관 건물일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이 건물은 1961년 개관하면서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시민회관은 1970년대 초반까지 광화문 일대의 도시경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시민회관 안에는 1층에 대강당, 2층에 소강당이 있어서 공연, 영화상영, 결혼식 등에 두루 이용되었다. 시민회관은 이름에 걸맞게 광화문에서 가장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이었다. 고급예술을 주로 전담하는 현재의 세종문화회관과 달리, 때로는 마술쇼도 열렸고,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으며, 결혼식을 올리려는 시민들에게도 시설 대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용하는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회관 건물은 1972년 12월 2일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라졌다. 이 건물이 ‘10대 가수 청백전’을 하던 도중 누전으로 큰 화재가 나서 36명이 죽고 62명이 부상당했던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자리에 세종문화회관 건물을 지어서 완공한 것이 1978년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6963" align="aligncenter" width="469"]상영 영화 제목이 붙어 있던 1961년 서울시민회관 모습과 1972년 12월 2일 화재가 난 시민회관 모습. (출처- 서울시, e영상역사관.)[/caption] 그런데 시민회관 화재로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을 건설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세종문화회관을 건설하기 위해 다른 예술적인 건물 하나를 하나 더 철거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혀 있다. 세종문화회관을 새로 짓기에 시민회관 부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시는, 바로 그 옆에 있던 ‘예총회관’ 건물을 부수어버렸다.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건물을 줄여서 ‘예총회관’으로 불렸던 이 건물도 당시에는 매우 유명한 건축이었다. 이 건물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석굴암 다방’이 있었고, 그 앞은 예총광장으로 불리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예총회관 건물은, 1960~70년대 서울의 난잡한 거리에 대해 매사 불평불만이 많았던 소설가 최인훈이 거의 유일하게 찬사를 보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옆구리에는 추상미술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었는데, 최인훈은 “건물에 새겨진 이 장식이 한국에서의 유일한 그리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미술품”이며, “건물 전체가 그 장식 때문에 큼직한 미술품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 예술적인 건물에 새겨져 있던 부조를 만든 조각가 김세중은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현재 예총회관은 대학로로 옮겨갔지만, 최인훈이 유일하게 감탄한 걸작 같았던 이 건물은 지어진 지 십년이 되기도 전에 시민회관 화재 이후 세종문화회관을 더 크고 웅장하게 짓기 위해 철거되어버렸다. [caption id="attachment_6964" align="aligncenter" width="489"]1964년 12월 완공되어 1973년 세종문화회관 건설을 위해 철거된 광화문 예총회관 건물. 옆면의 부조는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으로 ‘창조와 영예’를 상징한다고 한다. (출처- 국가기록원.)[/caption] 세종로 일대의 도시경관은 1960~70년대 도시개발과 정치적 필요성의 산물이었다. 여러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조선시대의 유적이든, 일제의 근대 건축이든,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예술적 건축이든 무차별적으로 제거되거나 철거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시민들의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 시대가 바로 1960~70년대였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거리는 육조거리가 아니라 이 시기의 역사적 유산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도심 고층화의 꿈이 실현되는 장소 광화문 거리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폭격으로 너무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명동이 상업과 유흥의 거리로 각광 받는 1950년대 후반까지도 세종로는 옛 영화를 회복하기 부족한 듯 보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세종로는 조금씩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세종로의 부활을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중앙청 개소식(1962)보다 더 일렀던 쌍둥이 빌딩의 완공이었다. 쌍둥이 빌딩은 현재 세종로 양쪽에 서 있는 건물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이다. 한국전쟁 때 이전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어버린 세종로 동편 자리에 세워졌다. 1961년 9월 한국정부와 주한미국경제원조처(USOM)의 합자로 완공된 이 쌍둥이 빌딩들 중 하나는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다른 하나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 두 건물의 외관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이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이 되기 전 이 건물은 1961~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용했고, 그 이후 1986년 2월까지는 경제기획원의 자리였으며, 다시 이후에는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가 사용하다가, 현재 리모델링하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6965" align="aligncenter" width="584"]1961년 9월 완공된 광화문 쌍둥이 빌딩. 왼쪽 건물은 1961년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기획원, 문화공보부를 거쳐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오른쪽 건물은 미국 대한원조기관(유세이드USAID) 건물로 사용되다가 1970년 12월부터 미국대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다.[/caption] 바로 옆 건물은 미국원조기관인 유세이드(USAID)가 사용 중이었는데, 여기에 미국대사관이 이전한 것은 1970년 12월이었다. 그 전까지 미국대사관은 을지로 반도호텔 맞은편에 있던 옛 미쓰이(三井) 빌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하에 지어진 4층짜리 오래된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국대사관은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이 건물로 이사를 해버렸다. 이 건물은 AID의 원조자금과 한국정부의 출자로 한국정부 소유의 땅 위에 지은, 소유권이 엄연히 한국정부에 있는 건물이다. 미국대사관은 미국의 대한원조기관이 한국에 존재하는 한 이 건물을 무기한 사용할 수 있다는 협정과, 미국의 원조기관이 대사관 산하 기관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어 이 건물로 옮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래 협정 내용은 직접 원조기능을 실행하는 기관을 지칭하는 것이었지, 미국대사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민들도 모르게 행해졌던 미국대사관 이전 이후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논란이 일었으나, 미국 원조기관이 다 떠난 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대사관은 한국정부 소유의 이 건물을 무기한 점유하고 있다.(4) 이 쌍둥이빌딩을 시작으로 세종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지우고 196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정치적 중심이자 서울의 도로가 뻗어가는 도시공간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1960년대부터 진행된 그 과정은 역사의 재건이라기보다는 현대도시의 번화가에 적합한 고층건물, 대형건물, 전시적 건물들을 새롭게 지어나가는 변화의 과정이었다. 그 기저에는 언제나 고층화된 현대도시에 대한 꿈이 있었다. 1966년 당시 서울에는 1966년 6-9층 건물이 111개, 10층 이상 건물이 18개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에 6-9층 건물이 487개, 10층 이상 건물이 122개로 늘어났다.(5) 1966~71년 사이에 지어진 고층건물들로는 한국일보사 건물 12층, 18층 높이의 조선호텔, 조흥은행 본점 18층, 대한항공의 한진빌딩 23층 등이 있지만, 이 시기 서울의 고층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은 청계천로에 김중업의 설계로 세워진 유리 마천루의 31층짜리 삼일빌딩 등이다. 청계천 2가 사거리에 세워진 삼일빌딩은 여의도 63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이름을 날렸다. 이 건물들은 도심 고층화가 막 시작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6) 1967년 기공하여 1970년 완공된 22층 높이의 정부종합청사는 광화문 일대 고층화의 시작이자 상징이었다. 지하 3층, 지상 19층, 탑상 3층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이름 없는 미국 건축회사에게 설계를 맡겼다가 준공 직후부터 잦은 사고와 엉망인 환기시설, 비효율적인 동선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현재까지 여전히 광화문 서편 첫머리를 지키고 있는 이 정부종합청사 건물이 광화문 고층화의 시작점이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caption id="attachment_6966" align="aligncenter" width="554"]1970년 정부종합청사의 막바지 공사 중인 모습. (출처-김천길 전 AP통신 기자.)[/caption] 반면에 세종로에서 정부종합청사와 대각선 끝에 있는 교보빌딩은, 광화문 거리 고층화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1981년 6월 1일 개장한 교보문고가 지하에 있어서 오늘날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건물이 되었다. 1977년 착공되어 1980년 사용 승인을 받은 이 건물은 교보생명 창업주가 일본 주미대사관 건물 설계자 시저 팰리에게 똑같이 지어달라고 주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건물 지하에 교보문고를 만들려고 했던 회장의 뜻은 잘 전해지지만, 이 터를 어떻게 해서 교보생명 신용호 회장이 구입하게 되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창업주가 1958년 개업 당시부터 “서울의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좋은 사옥을 짓겠다.”(7)는 야심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1972년부터 교보생명의 전신인 ‘대한교육보험’이 전매청 자리에 ‘매머드급 호텔 건립을 구상’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교보빌딩 자리는 원래 고층 호텔을 짓기 위해 매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74년 착공 당시 기사를 보면, “메머드 호텔을 세운다는 구상이 있었으나 용도를 바꾸어 오피스 빌딩을 건립키로 한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8) 대한교육보험이 “1971년 4월 ‘구 상공부 부지’를 정부로부터 매입한 후 그동안 건축억제조치로 묶여 있다가 지난 8월 12일 경제각의에서 건축이 승인”되었는데,(9) “이곳 한곳만은 억제대상에서 해제하여 기공식을 보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제 이유는 이곳이 미관지구일뿐더러 중앙청을 잇는 서울의 심장부이면서도 공터로 놓여 있어 서울시 등이 억제대상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요청해왔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은 ‘광화문 고층화’를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건물을 정부종합청사보다 더 높게 40층으로 짓는 것을 우려해서 23층으로 줄였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높이의 고층빌딩을 승인한 것도 결국 광화문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고층화, 현대화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연원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맞은편 세종문화회관 왼쪽에 있는 현대빌딩은 지하 4층, 지상 16층으로 짓는 데 만족한 것과 비교된다. 이 현대 빌딩에는 1976년 초 현대그룹 산하 기업체들이 입주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10) [caption id="attachment_6967" align="aligncenter" width="540"]1977년 교보빌딩(당시 이름 대교빌딩) 건축이 시작될 무렵의 광화문. (출처- 대산신용호기념사업회.)[/caption] 1960년대 중반부터 세종로에서 진행된 변화의 핵심은 고층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서 서울시의 개혁을 담당한 실무가들은, 중세도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거나 전후 재건 시에도 17~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을 되살린 유럽의 도시에서 서울의 모델을 찾지 않았다. 1960-70년대 서울시청 실무가였던 손정목은 도시 재개발이 곧 도시의 ‘고층화’라고 이해했음을 밝히고 있다.(11) 그들은 암묵적으로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메트로폴리스처럼 고층 건물들이 집적된 도시의 모습이 현대도시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쪽에서는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복원이라는 정치적 쇼를 활용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광화문 일대를 전근대 역사로부터 완전히 탈피시켜 현대적인 고층도시로 탈바꿈시킨다는 상반된 꿈이 동상이몽처럼 이 공간에서 펼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근대의 복원이라는 환상과 정치적 상징동원 최근 광화문을 둘러싼 논의들은 도시공간을 민주주의 계승자를 표방하는 정치적 정통성의 확립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판단이 공유되자, 오세훈 시장이 광화문광장을 조성하더니, 전임시장들의 치적을 비판하며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광화문광장을 더 확장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눈에 보이는 건설사업이 가장 체감하기 쉬운 업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시장이, 서울역 앞 고가도로인 ‘서울로’ 도시재생 사업만으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내놓은 공약일 것이다. 더구나 2016~2017년 내내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진 촛불시위의 현장을 더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계획이니, 정치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촛불시민들의 마음을 얻기에 적합한 공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광화문이라는 도시공간은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최전방에 놓인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을 잇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도저 방식으로 무지막지하게 개발한 도시공간들을 이전 상태로 복원하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복원’은 새로운 창조이다. 이명박이 복원한 청계천이 조선시대의 청계천 모습이 아니고, 오세훈이 건설한 광화문광장이 조선인들이 자동차 걱정 없이 활보하던 그 거리가 아니듯이, 그들의 복원은 새로운 설계였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창조를 ‘복원’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일제가 훼손하기 이전 또는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파괴되기 이전의 공간이용방식을 되살리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물이 흐르는 청계천변을 다시 산책할 수 있게 하는 것, 시민들이 육조거리의 대로를 다시 걷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복원’이라는 표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오세훈 전 시장은 광화문 앞 세종로를 자동차 중심이 아닌 시민 중심의 공간으로 바꾸고 육조거리의 역사성을 회복하겠다는 목표 아래 광화문광장을 만들고 해치 상도 복원시켰다. 박원순 시장이 다시 목표로 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2년 전이었던 2016년 “세종로에는 옛 육조거리를 재현하되 현대적으로 해석해 1층이 아닌 2∼3층 건물을 건축해 카페나 관광상품 코너를 입점시켜 관광객을 모으면 세계적인 명물이 되지 않을까 한다.”(12)고 밝혔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논의를 거듭한 후 2018년 4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새로 조성되는 ‘역사광장’ 계획에는 경복궁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월대의 복원, 해태상의 원위치 복귀, 의정부와 육조 터를 역사거리로 조성하는 방법 등이 포함되었다. 현재의 광화문광장을 차선을 줄이고 광화문광장을 3.7배 확장하겠다는 이 계획의 중점 목표 역시 보행자 중심 공간의 복원, 육조거리의 복원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불타오른 촛불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정통성 확보의 노력이 전근대 시기인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복원으로 정당화되는 논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caption id="attachment_6968" align="aligncenter" width="585"]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기본계획안에 따라 앞으로 변형될 세종로 모습. (출처 - 서울시 )[/caption] 광화문과 세종로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행위이다. 식민지 시기에 일제가 광화문 일대에서 역사를 지우고자 했던 노력들이 도시공간의 단순한 개편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치적 행위였던 것처럼, 역사를 다시 살리려는 시도들도 정통성 얻기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 간의 정치적 다툼의 일환이다.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만 돌아봐도 광화문 복원을 둘러싼 논쟁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와 보존을 둘러싼 갑론을박, 세종로 한복판에 광장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의견충돌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 논의들의 끝은 항상 대통령이나 서울시장 같은 최고책임자들의 결단이라는 정치적 결정으로 귀결되었다. 이 결정들은 국민과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통치행위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광화문의 역사성을 둘러싼 국민적 의식은 사실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대통령과 시장이 바뀐다 한들 앞으로도 지금처럼 광화문 일대에 대한 정치적 수정 작업이 계속된다면, 전근대 조선시대의 역사만을 복원하거나 보존해야 할 역사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광화문이 한국 현대사의 꿈과 오류, 이상과 실패를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 그 자체라는 점이다. 1968~80년대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아래서 조성된 세종로의 도시경관은 전근대 건축이나 유럽의 고전적 건물 같은 전통적 아름다움은 없지만, 그 자체가 벌써 50~60년 이상 경과한 한국 도시변화의 증거물인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 그 자체가 역사적 유적이 되는 건물들이다. 일제하 건축 정도까지만 간신히 보존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관료와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1960~8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도 역사적 유산의 일부라는 깨달음이 아닐까. 그리고 세종로에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원형을 복원하겠다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아이디어는, 차라리 대기업 소유의 건물들과 미국대사관 건물들을 어떻게 시민들이 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아닐까. 일본 제국주의가 변형한 도시공간은 그 이전대로 회복해야 하며,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 세운 현대사 속의 건물들은 계속해서 파괴해도 경제적 낭비라는 문제 빼고는 별 문제가 없다는 시각은 이대로 지속되어도 좋은가?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현대사는 보존할 필요가 없는 헐값의 역사인가? 다른 장소들의 현대사는 무수히 파괴하면서 광화문의 전근대 역사만 다시 소환하면 역사적 순수성의 회복이 이루어지는가? 역사의 ‘복원’이 ‘보존’이 아니라 사실상 ‘재해석’이라는 이름을 빌린 ‘새로운 창조’라면, 우리는 지금도 광화문을 계속해서 변형하고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의 이름을 빌려 파괴를 반복하는 이 과정에 제동을 걸어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의 광화문과 세종로 거리가 사실 1968~80년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유산이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또는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는 김수영의 옛 시구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전시적 건축뿐만 아니라 역사의 우연 속에 조성되었던 평범한 근대 도시경관들까지도 모두 우리 전통의 일부임을 상기시킨다. <주석> 1.하상복, <의제형성의 정치학-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과정의 분석>, <<현대정치연구>> 41호, 2011, 159~160쪽. 2.하상복, 위의 글, 171쪽에서 참조. 3.박계리, <충무공 동상과 국가 이데올로기>, <<한국근대미술사학> 제 12권 12호, 2004 참조. 4.이상의 내용은, 「미 대사관 이전 시비」, 경향신문, 1971년 10월 13일 참조. 5.손정목, <<한국 현대도시의 발자취>>, 일지사, 1988, 365쪽. 6.이규목, <서울 근대도시경관 읽기>, <<서울 20세기 공간변천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1, 138-139쪽. 7.<광화문 글판으로 친숙한… ‘교보생명 사옥’>, <<서울경제>>, 2017년 1월 20일. 8.<면모 바뀔 서울의 얼굴>, <<매일경제>>, 1974년 8월 30일. 9.<총 2만평 27층 대교빌딩 착공>, <<매일경제>>, 1974년 8월 30일. 10.<재벌기업 이사 한창>, <<경향신문>>, 1976년 1월 24일. 11.손정목,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2>>, 한울, 2005, 103-104쪽과 165-168쪽 참조. 12.<<매일경제>>, 2016년 5월 4일. <참고문헌> 박계리, <충무공 동상과 국가 이데올로기>, <<한국근대미술사학> 제 12권 12호, 2004. 손정목, <<한국 현대도시의 발자취>>, 일지사, 1988. 손정목,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2>>, 한울, 2005. 이규목, <서울 근대도시경관 읽기>, <<서울 20세기 공간변천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1. 하상복, <의제형성의 정치학-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과정의 분석>, <<현대정치연구>> 41호,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