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20세기 서울 도축장의 역사김윤미(한국 도시사 연구자) 마장동축산물시장. 축산물 단일품목을 취급하는 시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국 소고기 유통량의 9.8%가 이곳을 거쳐 나가고, 내장, 소머리와 같은 부산물의 30~40%, 수입육의 60%가 이곳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고 하니, 이쯤이면 규모, 거래량, 기능면에서 최대라는 수식어를 강조할 만도 하다. 마장동축산물시장은 도축장에서 방금 나온 소고기, 돼지고기와 각종 부산물들을 거래하는 장터로 시작됐다. 살아있는 소, 돼지를 거래하는 가축시장(1958년 개설)과 거래된 가축을 도살하는 도축장(1961년 개설)이 축산물시장 형성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지금은 마장동에 있던 가축시장과 도축장 두 시설 모두 사라졌으니, 어찌 보면 장터만 남은 셈이다. 그나마 서울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가락동 축협공판장의 도축장까지 2011년 충북 음성으로 이전하면서, 이제 서울 시내에서 살아있는 소와 돼지, 그리고 이를 도살하는 모습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다. 서울의 가축과 도축장은 100년 사이 어떻게 사라져간 것일까. 전근대 도축, 군자원포주(君子遠疱廚) 조선은 육축(六畜)이라고 해서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다. 19세기까지도 서울의 뒷골목에서 가축을 키우고, 잡는 걸 목격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닭이나 개와 같은 작은 가축들은 개인이 알아서 잡았다. 문제는 소나 말과 같은 큰 가축들이었다. 특히 소는 농사에 이용되었고 말은 군사·교통상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개인도 국가도 ‘함부로’ 도살하지 않았다. 도살해서 판매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사람이 도축해야만 했다. 조선 후기 한양에서의 도축은 전문 도축자인 ‘백정’이 푸줏간이나 도사(屠肆)라고 불리던 ‘현방’에서만 할 수 있었다. 군자원포주(君子遠疱廚).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을 멀리해야 한다는 통념처럼, 도축을 전문으로 하는 백정은 천민에 속했고, 한양 내 도축과 판매를 독점하던 현방은 20여개 정도로만 유지되었다. 관영 도축장의 등장, 동대문밖(신설동)과 서대문밖(아현동) ‘대한도수장’ 도축 행위와 장소에 대한 규정이 새로운 관점에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갑오개혁기부터였다. 가장 먼저 민간의 도살을 규제하기 위해 ‘포사규칙’이 공포(법령 제1호, 1896년 1월)되었다. 이 법령은 사실 위생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민간의 도살에 따른 세금, 즉 포사세를 중앙정부의 관리 하에 두기 위한 목적이 컸다. 도축장 설치와 운영에 관련한 좀 더 자세한 규정은 1900년을 넘겨서야 마련된다. ‘도축장취체규칙(1902)’, ‘도살장규칙(1909)’, ‘수육판매영업단속규제(1909)’ 등이 통감부 시기를 거치며 시행되었는데, 이때부터 도축 장소와 도축 행위는 쓰레기, 식품위생, 질병 등과 같은 공공위생 차원에서 함께 고려되었다. 민간 도축장 관리를 위한 규제 마련과 더불어 검토된 것이 관영 도축장의 건설이었다. 먼저 1908년 8월, 서부도축장이 서대문 밖 합동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개장한 지 3개월 만에 새로운 부지 검토에 나섰다. 부지 면적이 협소해서 시설 확충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검토 대상 권역은 동대문 밖과 서대문 밖이었고, 도축장 부지 선정에는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었다. (1) 주거지와의 이격 정도, (2) 적당한 구릉지 (3) 도축장 관련 시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면적, (4) 전차선로와 도로 등의 교통여건, (5) 세척에 사용할 충분한 용수와 수질, (6) 위생상 위해유무 등이었다. 이에 따라 결정된 장소가 지금의 아현동, 신설동이었다. 두 지역은 도성의 동서쪽 각각의 대문으로부터 비슷한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으며 규모도 비슷했다. 다만 아현동이 소뿐만 아니라 돼지를 도축하기 위해 탕박(피부를 벗기지 않고, 뜨거운 물에 통째로 넣어 털이 빠지도록 하는 도축 방식)설비를 갖춘 것과 달리 신설동은 소 도축에 치중했다. 두 도축장은 ‘대한도수장’이라는 동일한 명칭 하에 국가가 직접 관리감독에 들어간 첫 관영 도축장이었다. 현저동에서 숭인동으로, ‘경성부립도축장’의 통합과 이전 1910년 한일병합 후 신설동과 아현동의 대한도수장은 조선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이속되었다. 그리고 1914년 부(府) 제도가 실시되면서 경성부가 이를 승계해 본격적인 관리감독을 하게 된다. 예산을 받아낸 경성부는 아현동, 신설동의 관영도축장을 비롯해,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총 6곳을 폐쇄 또는 매수하였다. 목적은 관영·사설 도축장 통폐합(일원화)를 통한 효율적인 관리감독이었다. 새로운 경성부립도축장은 1912년 정해진 ‘도살규제시행세칙’의 제5조에 따라 위치와 구조가 결정되었다. 먼저 입지는 제5조 1항 ‘사원·궁궐·관청·학교·공원·병원·음료하천 및 인가가 밀집되어 있는 장소에서 20간(약 216m)이상 거리를 둘 것’이라는 규정에 맞춰야 했는데, 시가화율이 높은 경성부 행정구역 범위 내에서 이 조건에 맞는 부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서대문형무소에 연접한 현저동 도축장이 입지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경우였다. 이와 더불어 도축장 내부의 각종 시설, 그리고 시설별 이격거리와 규모, 바닥재질, 내벽재료 등을 지정된 기준에 맞춰 조성해야 했다. 하지만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도축장의 내부에서 벌어지던 모습은 이 같은 위생규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축장을 참관하고 너무 놀란 것은 설비가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그저 ‘공허’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신설한 것은 좋은데, 막상 신설한 뒤에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부영도축장 한 곳을 참관했을 뿐이지만 너무 놀라 전율할 만큼 내용은 빈약하고, 불완전한 정도를 넘어 비위생적인 데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도부(屠夫)」, 『대지를 보라』, 아키마 기후, 1924 도축장 입지와 시설의 규모가 확연히 바뀐 것과 달리, 도축장 담장 내부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못했던 것은 작업 방식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간의 변화와 달리 도축과정은 여전히 행위자인 도축자 개개인의 숙련된 기술에 온전히 맡겨진 작업이었고, 몸에 배인 도축행위와 관습은 쉽게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무축생불 보리심 공양보탑(南無畜生佛菩提心供養寶塔)’ 도축실 앞마당에는 떼를 입힌 흙무덤이 있고, 그 곁에 높이가 열 자는 넘을 것 같은 불탑 한 기가 하늘로 우뚝 치솟아, 피비린내 나는 바람에 씻기고 있다. – 「도부(屠夫)」, 『대지를 보라』, 아카마 기후, 1924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을 옮겨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목구조인 도축장의 시설이 급격히 낡아버린 데다, 도축장에서 흘러나온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이면 주변 지역에 골칫거리가 된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는 수도 및 배수 등의 설비가 위생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 개장한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은 개장한 지 8년만인 1925년 숭인동의 동묘 근처로 이전하게 된다. 숭인동 도축장은 남쪽으로 청계천 하류를 면하고 있어 수도 및 배수 조건이 현저동보다 훨씬 양호했다. 무엇보다 동묘, 청계천 등이 완충 역할을 함으로써 주변 인가에 끼칠 수 있는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또한 1923년 가축시장이 개설되어 있던 곳이어서 거래와 도축의 물리적 거리를 혁신적으로 좁힐 수 있었다. 경성부 내에서 도살된 소의 수만 2만 5천 마리에 달하던 당시로서는, 소의 주요 공급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가축을 들여오고, 방금 도축한 신선한 고기를 경성부내로 유통시키는데 있어서 숭인동이 최적지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성부의 시가화 지역이 확대되면서 숭인동은 더 이상 경성부 외곽의 경계지역만은 아니었다. 경성부는 1936년 행정구역 경계를 확대하고, 1937년 경성시가지계획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숭인동 가축시장 및 도축장의 입지 또한 재고되었다. 이전 지침은 ‘운전이 편한 가축시장’, ‘원격지(遠隔地) 도축장’. 가축시장과 도축장의 입지 조건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위생상 부적격시설에 해당되니 되도록 중심지에서 멀리 두되, 현재와 같은 운송 및 수도시스템이 부재했던 당시에, 그래도 신선한 고기를 취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가까이에 입지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새로운 가축시장과 도축장은 왕십리 부근의 마장동으로 확정되었다. 행정구역이 확대된 그 거리만큼 밀려난 것이었다. 마장동은 숭인동 시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경성부 동쪽 경계에 가까웠으며, 청계천 하류에 인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은 도로 확장을 비롯해, 경원선 철도, 왕십리선 전차, 기동차 등 여러 가지 운송 노선이 생기면서 경성 동쪽 교외지역 교통의 결절지로 부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마장동 서울시립도축장의 등장과 시카고 모델 일제강점기 수립됐던 마장동 이전 계획은 한국전쟁 이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우선 서울시는 예산 5백만 환과 ICA(미국대외경제원조처) 원조를 활용하여 마장동 청계천변의 판잣집을 철거하고 약 8천 평에 이르는 부지에 가축시장을 준공하였다. 마장동 도축장은 이보다는 3년 늦은 1961년에서야 개장하였다. 4·19, 5·16 등의 시대적 격변과 최신 설비 구축에 따른 예산 마련 때문이었다. 도축장은 가축시장에 들어간 예산의 60배에 이르는 3억 환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동양 최대의 도살장’, ‘하루 8시간에 소 300마리, 돼지 200마리 도축’, ‘최신 냉동 및 육가공시설의 도입’ 등 보도에서 나타나듯 마장동 도축장은 설비 구축에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 당시 도축장의 제반 설비와 구조는 미국의 공장형 도축장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많은 건축자재와 기계, 냉동시설의 대부분을 미국의 원조를 통해 들여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설비가 들어갈 도축장 설계와 작업라인 또한 미국 최대의 도축장인 시카고 도축장 사례를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도수장 설계 당시 … 시청의 건축과장이 “Slaughter House in Chicago”라는 책을 추천했다. 이 책에 의하면 시카고 도축장은 그 규모가 거대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도살장에 들어갈 각종 기계를 원조받기로 했으나, 도면을 확인해보니 시카고 도살장은 숭인동 창고보다 스케일이 훨씬 컸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도축장의 도면을 직접 그리게 되었다. … 나는 상인들이 기다리는 통로에 특별히 크레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사실 미국의 도축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며, 큰 기업에서 도축한 소를 48시간 냉장시킨 후 반출하거나 냉동시키는 방식이었다. 설계자 이광노(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2013년 11월, (출처: 마장동, 서울역사박물관)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헨리 포드(Henry Ford)가 1908년 T-모델 자동차 조립라인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제조업 전반에 비용 절감과 생산성 강화라는 혁신을 불러온 이 시스템은 사실, 1867년 시카고의 도축 및 육류가공공장에 도입된 시스템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된 것이었다. 시카고의 대다수 도축 및 육류 가공공장은 컨베이어와 킬링 휠(Killing Wheel)이 장착된 기계화 공정을 도입하였다. 공장은 가축의 도살부터 시작해서 최종 가공제품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하나의 작업라인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원재료에서 최종 제품으로 가공하기까지의 복잡한 작업공정을 ‘입고, 도축, 부산물 분리, 발골, 정형, 중간가공, 완제품’ 등으로 최대한 잘게 나눠, 작업자에게는 공정별로 단일 작업만 수행토록 하였다. 고도로 분업화된 공정이었기에 비숙련자도 생산 작업에 쉽게 투입될 수 있었다. 이처럼 여러 단계의 공정을 통해 나온 최종 결과물을 익명 집단의 제품으로 만듦으로써, 소비자는 혐오감을 상쇄하고,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반면, 숙련된 도축·가공기술, 전통 장인의 정신, 윤리, 가치를 완벽하게 배제함으로써 가축은 이제 완벽한 상품이 되었다. 자동차가 부품조립을 통해 완성된 제품이라면, 고기는 원재료 분해를 통해 완성된 상품이었다. 마장동축산물시장의 탄생과 확산 소비시장 규모에 격차가 있었던 만큼, 마장동 도축장의 규모는 시카고의 도축 및 육가공공장에 비해 작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도축장 운영이었다. 시카고는 육가공사업을 하는 대기업들이 도축에서 육가공까지 그 모든 작업라인을 통합, 운영하는 형태였다. 즉, 살아있는 가축의 입고부터 마지막 제품까지의 모든 공정이 민간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마장동 도축장은 경성부시기의 통폐합을 거치면서 공공에서 운영을 하는 방식으로 변해왔다. 가공과 판매 등 도축 외의 공정만이 민간 시장의 영역이었다. 물론 개장 이후 입찰을 통해 경영권을 이관하지만, 개설 당시 명칭은 ‘서울시립’이었다. 공공성은 여전히 강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마장동 도축장에서 출고된 각종 육류와 부산물들이 도축장 앞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먼저 도축장을 따라 숭인동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상인들이 가축시장과 도축장에 인접한 가옥들을 임대해 상점을 차리기 시작했고, 사회 전반의 고기 소비량이 증가하는 만큼 육가공 및 유통업에 종사하는 마장동 인구도 늘어갔다. 이들은 도축만 하지 않을 뿐이지 기술자이면서 상인이었다. 도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고기를 발골·정형하고, 소머리, 내장 등 부산물을 세척해 이를 판매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마장동축산물시장은 점차 그 규모를 더욱 키워나갔다. 고기 소비가 늘어난 만큼 도축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자 밀도살이 나타나기도 했다. 서울시는 밀도살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1974년 가축시장을 폐쇄하고 서울시내에서의 가축 거래를 금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서울 서부지역의 고기 수요를 충족시킬 독산동 도축장을 개장하였다. 1986년에는 서울 동남권역 경계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에 도축장을 개장함으로써 서울시내 육류 도축은 마장동, 독산동, 가락동의 3자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 냉장 및 냉동설비를 갖춘 운송수단의 발달로 지방에서 도축된 고기의 서울 반입이 무제한 허용되면서 서울에서 도축하여 공급하는 육류량은 점차 감소했다. 결국 1998년 마장동, 2002년 독산동, 2011년 가락동 도축장은 폐쇄되거나 지방으로 이전되는 수순을 밟는다. 사라진 도축장, 남은 축산물시장 문명은 많은 고기를 소비함으로써 발전해왔지만, 생산에 대한 유혈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한다. 20세기는 서울 곳곳에 흩어져있던 핏물을 한곳에 모아 그것을 떼어내 잘 안보이도록 서울 밖으로 버려나가는 시기였다. 현저동, 숭인동, 마장동, 독산동, 가락동. 서울이 확장할 때마다 도축장은 경계에서 서성이다 결국 사라졌다. 그러나 축산물시장은 지방 도축장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교통인프라, 유통망, 냉장냉동 수단 및 운송기술 등의 여건이 숭인동에서 마장동으로 이전하던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한국사회의 축산물 소비량과 고급화된 축산물 소비성향은 물류비용의 증가를 흡수하고도 남았기에, 축산물시장은 여전히 확산 중이다. 다만 그 속에서도 위기감은 있다. 육가공작업의 첫 번째 공정인 도축이 서울에서 사라진 이후, 시선을 외면하고 싶은 그 다음 단계 공정을 사람들은 여전히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의 두 번째 단계인 부산물 세척장, 발골 및 정형 작업장을 상대로 한 현대화라는 최근의 과제는 그렇게 현재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