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세상읽기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범죄도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그 왜곡된 등식에 대하여 BoardLang.text_date 2018.09.19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
|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범죄도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그 왜곡된 등식에 대하여이신우(California State University, Chico 사학과 교수) 낭만과 다양성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선명한 주홍색 금문교와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1960년대 미국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반체제·반문화 운동이 시작된 곳. 지금은 차이나타운, 재팬타운, 러시안힐, 리틀 이태리 등 다양한 이민자 집단거주지와 성소수자의 메카 카스트로 거리가 공존하는 도시. 토니 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의 노래가사처럼 많은 방문객들이 마음을 두고 오는 그 곳. 샌프란시스코. 다양성과 통합을 도시의 기본적 가치로 삼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피난처 도시’(Sanctuary City) 혹은 ‘이민자 보호도시’를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1989년 샌프란시스코 시정부는 중남미 각국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피해 이주한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범죄 혐의가 없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연방정부의 신병 확보와 구금 요청에 협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피난처 조례’(Sanctuary Ordinance)를 통과시켰다. 최근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반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피난처 도시들에 대한 연방 정부의 재정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하자 뉴욕, 시카고, LA 등 다른 대도시들과 함께 연방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늘날 이민자들의 피난처를 자처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00여 년 전 미국에서 반이민 정서와 정책이 처음 시작된 곳이었다. 북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중국인 거리인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도 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중국인 차별과 배제의 결과 탄생한 공간이다. 경기침체와 함께 반중국인 정서가 거세지면서 미국 사회로의 진입이 거부된 중국인들은 안식처를 찾아 차이나타운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혐오정서는 그들의 밀집거주지인 차이나타운을 질병의 온상이자 범죄의 소굴로 그려냈다. 2018년 서울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왜곡된 등식, ‘범죄도시’ 차이나타운. 19세기 말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 왜곡된 등식이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중국인 이주의 시작부터 ‘중국인 배척법’까지 중국인의 미국 이민사는 1850년대 골드러시, 즉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8년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콜로마(Coloma)에서 금이 발견되자,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며, 본격적인 서부 개척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인도 이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많은 개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1860년대에는 동부에서 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 건설로 인해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국인 이민자가 급증하는 계기를 맞았다. 그 결과 1848년 3명으로 시작한 중국인의 미국 이주는 1851년 2,716명, 1870년 63,199명, 1880년 10만 5,465명으로 급속하게 증가했다. 서부 개척과 경제 팽창으로 촉발된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는 1870년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될 무렵 경제 침체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실업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값싼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도 기꺼이 일을 하려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급료 인하와 실업률 증가의 원인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중국인들의 근면함과 검소함을 배우자던 담론은 이제 ‘중국인은 물러가라’라는 정치구호로 대체되었다.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배척의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는 가운데, 1877년에는 반중국인 정서를 근간으로 한 ‘캘리포니아 노동당’(Workingmen’s Party of California)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사진 설명 : 칼 알버트 브라운(Carl Albert Browne)이 그린 1878년 캘리포니아 노동당 당대회 입장권 (왼쪽) 1886년 세탁기 광고 (오른쪽)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세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중국인 정서를 이용해 광고를 만들었다. California Historical Society 소장 이미지. 캘리포니아 노동당은 백인 실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내며 반중국인 정서가 정치화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캘리포니아 노동당 출신 정치인들이 시의회와 시정부에 포진되면서 캘리포니아 주 전체에 걸쳐 중국인에 대한 각종 제재 정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변발 금지 법령’(Queue Ordinance)을 비롯하여, 왜건이나 카트를 이용하는 미국인들과 달리 지게를 사용하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지게 사용 금지 법령’(Sidewalk Ordinance), 모든 성인은 위생과 환기를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공간에 거주해야한다는 ‘위생 법령’(Sanitary Ordinance)이 나오면서 좁은 숙소에서 단체생활을 하던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882년에는 급기야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를 금지하고 이미 미국에 정착한 중국인의 경우 시민권 획득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 제정되었다. 특정 민족이나 집단의 이민을 금지한 법률로는 처음이었다. 중국인 배척법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확대라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캘리포니아 곳곳에 퍼져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백인 자경단원들의 공격을 피해 거주지와 일자리를 찾아 차이나타운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854년 새크라멘토가 하나의 블록에서 시작된 차이나타운은 1880년대에 이르러 주변 15개의 블록을 아우르는 규모로 확장되었고, 중국인 인구 역시 도시 전체 인구의 약 10%를 이룰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언어적 장벽, 사회문화적 차별, 법률적 배제 등으로 미국 사회로의 진입이 거부된 중국인 이민자들이 그들만의 문화와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배타적인 공간으로 그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인들을 국가의 경계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던 샌프란시스코 정치가들은 오히려 도시의 경계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차이나타운을 곧 도시의 ‘공공의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범죄의 경계 그리기 중국인들과 차이나타운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인종적 편견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한 1850년대부터 샌프란시스코 정치가들과 사회지도층들은 지속적으로 중국인 밀집지역의 불결함을 지적하고 시당국의 철저한 조사와 단속, 그리고 위생과 보건법의 집행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들은 중국인들과 차이나타운을 어김없이 ‘과잉’ 혹은 ‘과도’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들의 숫자가 그렇고, 그들이 사는 거주공간의 밀도가 그러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쓰레기가 또한 그렇다는 것이었다. 1880년 샌프란시스코 보건위원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중국인들이 채광과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눅눅하고 오물과 악취가 가득 찬 ‘소굴’에 사는데, ‘시궁창에 사는 쥐 떼’와 같이 ‘상상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수백 명’이 함께 잠을 자는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생활 습관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된 보고서가 차이나타운을 온갖 질병의 온상으로 규정한 것은 놀랍지 않다. 중국인들의 인종적 특성과 생활 습관으로 만일 전염병이 창궐한다면 이것은 도시민 전체의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차이나타운은 도시의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도려내야 할 ‘암세포’라는 것으로 보고서는 결론 맺었다. 차이나타운에서 부패하고 창궐하는 것은 비단 위생과 질병뿐이 아니었다. 중국인 밀집지역이 갖는 열악한 위생 상태와 주거 환경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손쉽게 그 공간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도덕과 윤리 의식 역시 열등할 것이라는 인식으로 연결되었고, 차이나타운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범죄와 퇴폐가 성행하는 범죄도시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러한 담론들은 대부분 차이나타운의 공간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된 과장과 왜곡,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공포와 불안감이 만들어낸,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괴담에 차라리 가까웠다. 즉, 좁은 도로와 열악한 거주공간은 방문자가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미로’ 혹은 ‘보이지 않는 (지하) 세계’로 묘사되었고, 또한 그 곳은 아편에 중독된 남자들과 매춘부로 감금된 여성들이 뒤엉켜 지내는 불법과 죄악의 공간으로 상상, 아니 조사되어 보고되었다. 이러한 공간적인 은유들은 이후 확대 재생산되어 1880년대에 이르면 과학적인 ‘팩트’로 자리 잡았다. 중국인 배척법 제정 이후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와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공화당이 이끄는 시 자문위원회는 차이나타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1885년 ‘차이나타운의 현황에 대해’(On the Condition of the Chinese Quarter)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중국인 이민자들과 차이나타운을 도시의 경계 밖으로 축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이 보고서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편견과 혐오표현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러한 태도는 보고서에 첨부된 한 장의 지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진 설명 : 1885년에 발간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공식 지도’ (코넬 대학교 도서관 소장)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공식 지도’(Official Map of Chinatown)라는 이름의 이 지도는 12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차이나타운의 공간적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지도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읽을 수 없었던 차이나타운의 내부 공간을 거리와 지번에 따라 정리하고, 각기 다른 업종을 서로 다른 색깔로 표시함으로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샌프란시스코 시정부에게 그간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했던 차이나타운을 가시적인 공간으로, 그래서 권력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이 지도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점은 이 지도가 사실 범죄지도에 다름없다는 점이다. 여기 확대된 지도의 일부를 살펴보자. 지도는 차이나타운 안에 존재하고 있던 주거 공간, 공장, 세탁소, 이발소, 식당, 전당포 등 각종 비즈니스에 대한 정보를 담고는 있으나, 모두 같은 색깔, 같은 카테고리로 일괄 처리했다. 반면 매춘, 아편, 도박과 이교도 사찰은 각각 개별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각기 다른 색으로 채색하여 독자들의 주목을 끌도록 했다. 특히 중국인들에 의해 고용된 백인 매춘의 존재는 중국인 매춘과 구별하여 파란색으로 별도로 표시되었는데, 시당국이 그만큼 ‘문제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진 설명 : 일반적 주거지역(살구색), 중국인 매춘(초록색), 백인 매춘(파란색), 아편(노란색), 도박(분홍색), 이교도(빨간색)로 분류하고 각각 다르게 채색했다.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에서는 단순한 지리정보나 정치행정적 경계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정보를 담는 지도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펴본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지도 역시 인종, 장소, 범죄와의 관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공간적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등장한 새로운 지도 제작의 경향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도시의 위생과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이 지도가 차이나타운을 매춘, 아편, 도박과 같은 키워드와 직결시켜 중국인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저출산 극복 대책으로 가임기 여성의 수를 표시한 출산 지도처럼 말이다. <참고문헌> Chinatown declares a nuisance! (San Francisco, 1880) On the Condition of the Chinese Quarter (San Francisco Board of Supervisors, 1885) Nayan Shah. Contagious Divides: Epidemis and Race in San Francisco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Susan Schulten. Mapping the Nation: History and Cartography in Ninteenth-Century Americ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이민자, ‘중국인 이민자의 미국사회로 통합과 차이나타운의 역할,’ “중소연구” 39권 4호,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