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경(국가와 사회반원)
발표: 송기중(충남대) 2. 17세기 후반~18세기 초 강화유수부 군향곡의 이전과 의미 발표: 조낙영(서울대) 3. 균역법 시행 이후 훈련도감의 재정운영 양상 발표: 최주희(한중연) 4. 균역법 실시와 어영청 재정운영의 변화 발표: 송기중(충남대) 5. 18·19세기 금위영의 역할과 재정운영 발표: 유현재(서울대) 6. 장용영 내영의 위상변화와 재정확보과정 발표: 박 범(고려대) 7. 17~18세기 도감의 雇價마련과 군문재원 활용 발표: 나영훈(한중연) 2016년 5월 30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서관) 132호에서 한국역사연구회 중세2분과의 ‘국가와 사회반’이 「조선후기 중앙군문의 역할과 국가재정」이라는 제목 아래 공동연구발표회를 진행하였다. 이 발표회는 재정을 경제사의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사회사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더 나아가 연구대상을 확대하며 분석의 틀을 확장하자는 목표 아래 ‘중앙재정사연구반’이 ‘국가와 사회반’으로 바뀐 후 처음 성과를 보이는 자리였다. 이에 많은 연구자 선생님들게서 발표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셨던 것으로 안다. 필자 역시 사회경제사를 공부하는 일원으로서 발표자 선생님들이 중앙군문 연구를 통해 어떻게 사회경제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할지 기대하고 발표회에 참석하였다. 발표회는 송기중 선생님의 총론 발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송기중 선생님은 군사사의 사회사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군문재정의 성격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기조를 바탕으로 각 선생님들의 발표 주제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덧붙였다. 이를 통해 국가 재정에서 군문 재정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한 평가가 적극적이게 되고 사회경제사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제1발표로 서울대학교 조낙영 선생님의 「17세기 후반~18세기 초 강화 유수부 군향곡의 이전과 의미」가 이어졌다. 제목과 달리 내용의 중점은 17세기 전반에서 후반 강화 유수부의 군향곡 축적과 지출의 분석에 놓여 있었다. 우선 조낙영 선생님은 17세기, 청이라는 대외적 위기감 속에서 강화도 위주의 해상 방어체제가 구축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강화 유수부가 최고 16만석에 달하는 군향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상당한 양의 비축은 단순히 군사들을 먹이는 식량만이 아니라 진휼곡 및 호조 경비로도 활용되었다고 하시면서 강화 유수부 군향의 호조 비상창고로서 의미를 강조하였다. 때문에 18세기, 외곽의 보장처 중심이 아닌 서울 중심의 수도 방어론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강화 유수부의 군향이 호조로 移劃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주희 선생님의 제2발표는 「균역법 시행 전후 훈련도감의 재원확보 양상」라는 제목 아래 훈련도감이 장번군의 정규군인으로 운영되어 재정 부담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를 재정적 측면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최주희 선생님은 훈련도감의 설립 초기 세입 마련책에 대해 『訓局謄錄』, 『訓局總要』등을 분석하고 이러한 체제가 균역법 이후 어떤 변화 과정을 겪는지 『均役事目』등을 통해 설명하셨다. 특히 균역청의 훈련도감 급대가 다른 중앙군문과 달리 손실액을 거의 모두 보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는 어영청·금위영의 군액 감액 및 상시적인 停番과 맞물리면서 ‘국왕 호위, 왕실과 관료와 都民의 안위 도모’라는 중앙군문의 역할이 훈련도감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훈련도감에 많은 재원이 집중되기는 하지만 이는 왕조국가가 할 수 있는 재정부담 최소화의 정책적 노력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충남대학교 송기중 선생님의 「균역법 실시와 어영청 재정 운영의 변화」라는 제목의 제3발표가 이어졌다. 송기중 선생님께서는 어영청의 네 가지 병종 중 고립군인 경표하를 제외한 나머지 향군, 별파진, 경기사의 재원 확보책 변화에 대해 주목하였으며 이것이 균역법을 거치면서 어떠한 방식으로 급대되었는지 『均役事目』의 내용을 통해 분석하였다. 그리고 균역법의 결과 어영청이 재원 구조의 독립성을 일부 상실하고 균역청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직접 입역하는 어영군의 처우가 상대적으로 악화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고 나서 제4발표로 서울대학교 유현재 선생님의 「조선후기 금위영의 역할과 재정운영」이 이어졌다. 유현재 선생님은 금위영의 재정 확보와 지출의 성격을 분석하며 금위영의 재정적 측면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르면 금위영은 ‘호수-보인제’와 주전에 의해 재정을 확보하였으며 이를 통해 도성의 수비와 수축, 금송, 준설, 도성 보수 등의 일상적 지출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금위영은 19세기에 들어서면 停番이 상시화 되면서 호조에 加入의 형태로 재정을 지원하는 기능을 더욱 우선시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어진 제5발표는 고려대학교 박범 선생님의 「장용영 내영의 위상변화와 재정확보 과정」이었다. 박범 선생님은 장용영이 ‘재정의 절약’을 당면과제로 삼은 정조의 재정관에서 다른 중앙군문과 달리 제도에 기반한 수입원을 마련하기 곤란하였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재정원을 마련해갔는지에 주목하였다. 장용영의 본격적인 재정 마련은 정조 12년, 장용영에 향군 및 제조가 설치되면서부터였는데 이때 재정을 총괄하는 직위에 있던 선혜청당상이 장용영 제조를 例兼함에 따라 장용영은 선혜청당상이라는 개인의 능력과 직임에 기대 각종 ‘소소한 물자’를 자신의 재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인물에 입각한 재정 확보였기 때문에 보다 안정성과 항상성을 높이기 위해 평안도 둔전 개발과 환곡 운영이 시도되었고 이 과정에서 장용영 제조와 평안병사의 연결고리가 중요해졌다고 하였다. 따라서 18세기 중반 이래 강화된 호조의 평안도 재정 흡수는 장용영에 의해 더욱 본격화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 제6발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나영훈 선생님의 「17~18세기 도감의 雇價 마련과 軍門財政의 활용」이었다. 나영훈 선생님은 산릉이나 영건 등의 대규모 사업이 발생할 때 설치되는 都監이 필요한 비용을 주로 어디에서 마련하는가에 주목하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17세기 이후 각종 의궤류의 재정 부분을 분석하고 17세기 전반에는 그 비용의 부담을 주로 호·병조가, 17세기 후반부터는 중앙군문이 주요하게 담당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군문이 도감의 주요한 재정원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17세기 이래 5군영이 정비되고 자체적·독립적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던 점, 북벌의 기치 소멸 및 기근의 발생으로 군사재정의 군사적 목적 이외의 활용 가능성 확대 등을 제시하였다. 18세기 중엽, 균역법을 시행할 당시 조선의 군액은 거의 50만명에 달하였으며 이는 당시 절대주의 왕정 체제 아래 군사력을 키워나가던 유럽의 군액을 훨씬 웃도는 숫자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 군액의 상당한 비중이 納布軍으로 국가의 부세 수입의 의미를 강하게 띠는 존재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조선의 중앙군문은 확실히 군사적 측면 이외에 재정적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번 공동연구회발표는 기존에 주목받지 않았던 군문의 재정적 역할과 성격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발표를 들으러 오신 선생님들께서도 이러한 공동연구 발표회의 문제의식에 대해 동의하고 관련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여러 토론을 제기해주셨다. 공통적으로는 중앙군문이 재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사적 성격을 제외한 채 재정아문으로 볼 수 있는지, 중앙군문과 재정아문은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지, 군문의 재정적 역할이라는 관점을 18세기 이후, 19세기에는 어떻게 투영시켜 바라볼 것인지, 이상의 연구들이 군사사와 재정사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선생님들의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필자 역시 군문의 재정적 위상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동시에 군문과 재정아문과의 관계를 꼭 ‘호조에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란 측면으로 국한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발표회의 특징은 ①중앙군문의 재정 확보에 초점을 맞추며 ②군문이 비용을 지출하더라도 그것은 호조로의 이획, 가입이라는 측면이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래도 ‘군문의 지출=군사력=호조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음=수탈적 성격’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군문의 군사적 역할에 대한 서술이 없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군문의 지출을 군사력과 그 이외의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해본다면 군문의 재정적 측면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평가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발표문에서도 언뜻 드러났듯 군문의 군사력 자체도 사회에서 수행하는 대내적 역할이 있으며, 그 이외에도 군문은 각종 사업-도성 수축, 준천 사업, 행행시 도로 정비 등-에 자신의 재정을 활용하며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지출 양상 분석을 통해 확장된 의미에서의 군문재정 연구를 기대하게 되었다. 한편 군문의 재정적 역할과 위상의 분석이 심화될수록 19세기까지 조선의 국가 경영이 유지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국가와 사회반’이 이와 관련한 연구를 19세기의 맥락 속에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의 연구 활동 역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