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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정동 20년(1885~1905), 근대 서울의 문턱 ‘공사관 구역’

BoardLang.text_date 2018.06.04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정동 20년(1885~1905)
근대 서울의 문턱 ‘공사관 구역’,


서양 외교관들의 입지관


 

김윤미(한국 도시사 연구자)


 

19세기 중반 구미 열강들이 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표방한 것은 ‘무형의 제국’이었다. 타 열강의 정치적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통상과 영향력만을 확대함으로써 반(半)식민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통치의 무거운 부담이 따르는 영토 획득보다는 실리를 찾겠다는 의미였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통상조약의 체결이었다. 협정저율관세, 자유무역, 치외법권, 해군기지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적 제국주의의 구현. 아편전쟁 직후 영국이 중국과 맺은 남경조약(1842년)은 이러한 ’개항장 체제(Treaty Port System)‘ 구축의 시작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동아시아 내에서 조선은 구미 열강들에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다. 1876년 일본이 체결한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구미 열강에게도 통상조약 체결의 계기가 생겼지만, 조선은 어차피 중국의 속국일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중국이라는 넓은 시장의 개척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년간 일본의 주도로 부산(남해), 원산(동해)이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거주와 통상을 위한 거류지 설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열강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 5개국이 차례로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은 일본을 견제하던 중국의 권유가 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목할 점은 1883년 11월 조인된 조영통상조약이 하나의 선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조인한 미국과 달리 영국은 통상조약 체결부터 조인까지 1년 반이라는 꽤 오랜 시간을 끌었는데, 이는 통상조건에 대한 조율에서 시작하여 기존의 항구를 뛰어넘어 조선 내륙의 개시장을 통상조약에 포함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정 과정이었다. 여기서 내륙 개시장, 그 대상은 서울이었다. 첫 조약부터 조선의 항구를 스쳐 중심지를 겨냥한 것이다. 영국은 1882년 조선이 청국과 통상에 관한 규정(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길 기다렸다. 양화진을 통한 한성부 개시가 이 규정에 포함될 것이라 예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필두로 유럽의 열강들은 한성부 개시가 확정되자 그때서야 통상조약을 조인하였다. 서양인들의 서울 왕래, 그리고 통상과 거주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통상의 거점, 위험한 ‘박동’


구미 각국과의 통상조약이 조인되기도 전에, 서울에 가장 먼저, 그것도 공식적으로 거주하게 된 서양인이 있었다. 묄렌도르프((P.G. von Mὃllendorff)였다. 중국의 권유로 조선 정부의 월급을 받고 고용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일하게 된 부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해관본부’로, 당시 처음으로 도입된 근대적인 행정사무기관이었다. 1883년 4월 박동에 해관이 창설되면서, 임오군란 당시 살해된 민겸호의 집이 묄렌도르프에게 주어졌다. 그는 이 한옥을 개축하여 해관본부, 관저, 서재, 외국여행객을 위한 숙소, 테니스장 등의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당시 박동 일대는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의 중간 지점임과 동시에 도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한 재동에는 통상과 외교를 담당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관립영어학교인 동문학이 설치되었고, 근대적 인쇄소인 박문국 또한 동문학의 부속기관으로 들어섰다. 1884년 3월에는 군국사무아문에 우정총국이 설치되었는데 그 청사 역시 인근 견지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듯 통상과 관련한 각종 근대적 사무를 보는 장소들은 재동·박동·견지동에서 일정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묄렌도르프를 필두로 근대적 사무를 전수하기 위해 입경한 서양인들의 거주지는 이곳에 형성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구미 각국과의 통상조약이 조인되기도 전에, 서울에 가장 먼저, 그것도 공식적으로 거주하게 된 서양인이 있었다. 묄렌도르프((P.G. von Mὃllendorff)였다. 중국의 권유로 조선 정부의 월급을 받고 고용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일하게 된 부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해관본부’로, 당시 처음으로 도입된 근대적인 행정사무기관이었다. 1883년 4월 박동에 해관이 창설되면서, 임오군란 당시 살해된 민겸호의 집이 묄렌도르프에게 주어졌다. 그는 이 한옥을 개축하여 해관본부, 관저, 서재, 외국여행객을 위한 숙소, 테니스장 등의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당시 박동 일대는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의 중간 지점임과 동시에 도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한 재동에는 통상과 외교를 담당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관립영어학교인 동문학이 설치되었고, 근대적 인쇄소인 박문국 또한 동문학의 부속기관으로 들어섰다. 1884년 3월에는 군국사무아문에 우정총국이 설치되었는데 그 청사 역시 인근 견지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듯 통상과 관련한 각종 근대적 사무를 보는 장소들은 재동·박동·견지동에서 일정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묄렌도르프를 필두로 근대적 사무를 전수하기 위해 입경한 서양인들의 거주지는 이곳에 형성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사진1] 1884년 이전 통상 관련 기관이 집중됐던 박동, 1885년 이후 공사관구역으로 부상한 정동

그러나 1884년 10월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박동은 그 위험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정변이 시작된 우정총국,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묄렌도르프의 집 등은 모두 갑신정변의 현장이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권을 둘러싼 변란, 혹은 민중의 반외세 움직임에 있어서 도심 중앙인 박동은 혼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방어와 탈출이 용이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공통의 정서를 공유하는 서양인들끼리 심리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도록 집단 거주의 필요성이 고려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서양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동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공관 부지 선택

정동의 첫 서양인 거주자는 초대 주한미국전권공사로 임명된 푸트(L.H.Foote)였다. 부임 직후 묄렌도르프의 주택에 머물던 그가 민씨 척족이었던 민계호·민영교 소유의 정동 사저를 구입한 것은 묄렌도르프의 주선 때문이었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몰락한 집안의 방치된 저택은 외교기지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중심인 박동 지역에서 볼 때 황토현 너머 도성의 서남쪽에 치우쳐져 있었지만, 오히려 언덕과 성벽으로 인해 둘러싸여 안전했다. 더불어 제물포 및 한강으로부터 출입이 용이하다는 점, 궁궐 및 정부시설과의 인접성도 장점이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 주한총영사로 임명된 애스톤(W.G.Aston) 역시 여러 부지를 물색하고 한성부의 중개를 받은 끝에 현재의 영국영사관 부지를 사들인다.



[사진2] ‘한강에서 서울 공사관구역으로 가는 방법’: ①마포나 용산에서 출발하여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을 통과해 공사관 구역에 이르는 길과 ②제물포에서 경인선을 통해 서대문정거장에서 도착 후 서대문이나 서소문을 통과해 공사관 구역에 이르는 길을 주변 지형, 지세, 지물과 함께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애스톤은 영국영사관 부지 물색 과정을 본국에 수차례에 걸쳐 보고하는데, 정동 부지의 이점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제물포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궁궐을 비롯한 조선 정부 시설과의 높은 인접성, 상대적으로 중심에서 치우친 지역이어서 대지 및 가옥 구입비용이 저렴하다는 점, 구릉지가 있어 전망이 좋다는 점 등을 꼽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공관이 정해진 후 푸트와 애스톤은 묄렌도르프와 마찬가지로 관저 및 업무공간을 조성함에 있어 한옥 형태의 외관을 바꾸지 않고 내부만 생활에 맞게 고쳐 사용하였다. 다만 미국이 지금까지도 당시의 한옥을 시기에 맞게 고쳐가며 사용하고 있는 반면, 영국은 1890년, 애스톤의 후임 힐리어(W.C. Hillier)에 의해 새로운 영사관의 건축이 시작된다.

 

미국 개신교의 선교 거점 ‘정동’


 

미국과 영국의 공관 부지가 정동에 마련된 이후, 곧이어 입경한 서양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1884년 가을 의료선교사로 온 알렌(H,N.Allen)을 비롯해 언더우드(H.G. Underwood) , 아펜젤러(H.G. Appenzeller) , 스크랜튼(W.B. Scranton) 등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공사관 주변을 감싸며 선교 거점을 마련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의 서울 진출을 허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병원과 학교에 한해 사업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예배는 선교사들의 사저에서 조용히 행해졌고, 선교를 위해 의료와 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사진3] 미국공사관과 영국영사관이 부지를 구입한 직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미국 감리회 선교부는 서소문 바로 안쪽에 선교거점을 마련하였다. 이 두 선교부는 공사관거리를 사이에 두고 병원, 고아원, 학교 등의 의료·교육 관련 복지시설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거점으로 선교를 펼쳐나갔다. (출처: Western Quarter of Seoul, 1901, http://www.nationalarchives.gov.uk/)

 

먼저 미국공사관 담장을 끼고 공사관 거리(정동길)의 북쪽으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지역’이 형성되었다. 소속 선교사 언더우드, 헤론, 엘러스 등이 고아원, 경신학교, 언더우드 학당, 정동여학당 등의 보육 및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사업을 펼쳐나갔다.

 

‘미국 감리회 선교부 지역’은 공사관 거리의 남서쪽 성벽을 따라 서소문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1885년 5월 서울에 들어온 스크랜튼에 의해 병원이 가장 먼저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메리 스크랜튼의 이화학당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

 

부지는 미국공사관과 장로교 선교부와 인접해 있는데,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바람직합니다. 첫째, 이곳 부지는 외국인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세 방면으로 한국인들이 사는 곳과도 가깝습니다. 둘째, 부지는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솟아 있어 배수가 잘되고 공기가 맑은 데 이 두 가지 점은 여기처럼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셋째, 부지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주거지로는 제일 좋은 곳으로 여겨지는 곳인데 머지않은 장래에 지금 공터로 남아 있는 언덕 위에 건물을 지으면 시내 어디서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 건물이 그들 모두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W.B.Scranton’ letter to Dr. J.M.Reid, Jun 1, 1885)

 

스크랜튼의 편지에서 나타나듯 정동은 미국공사관의 보호 아래 외국인들이 안전하게 모여 살 수 있으면서도 일반 민중들과의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또한 주변보다 높은 언덕들이 있어서 위생적인 거주조건을 만족함과 동시에 그들이 전파하려던 새 건축과 새 사업, 즉 근대적인 사업들을 가시적인 경관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사진4] 좌> 미국 감리회 선교부 지역에 스크랜튼(M.F.Scranton)이 설립한 초기 이화학당의 모습. 우> 미국 장로회 선교부 지역에 언더우드(H.G. Underwood)가 사랑채에 마련한 고아원(출처: 1901년 체코인 브라즈의 서울 방문, 서울역사박물관, 2011)

 

또 하나의 변화는 갑신정변 이후 채 1년이 되지 않은 1885년 10월, 묄렌도르프가 해임되고 메릴(Merrill)이 총세무사로 부임하면서, 박동에 있던 해관본부가 정동의 미국공사관과 영국영사관 사이로 이전하였다는 점이다. 관세를 징수하는 해관본부는 조선의 문물 및 제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돈으로 제어할 수 있는 행정기관이었다. 개항 이후의 조선 재정 및 경제의 핵심 부문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해관본부마저도 정동으로 이전함으로써 정동은 외교, 선교뿐만 아니라 통상, 경제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구미 열강이 추구하는 근대화의 전진기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

 

외교의 중심, 공사관 구역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러시아가 들어왔다. 박동의 해관본부가 정동으로 이전한 바로 그 시점, 러시아는 정동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선택했다. 미국공사관과 개신교 선교부 일대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던 영국영사관조차도 굽어볼 수 있는 위치였다.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러시아공사는 이곳이 미국 및 영국 공관과 인접한 지역이고 향후 각국 공사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좋은 입지임을 알고 있었다. 전략적 가치가 있으면서 상징성이 담보되는 지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수표교 근처에 있던 프랑스(1889년), 낙동과 박동을 전전하던 독일(1890)이 연이어 정동에 공관 부지를 마련했다. 열강 사이의 외교 정보를 수집하고 조선 정부의 동향을 파악하려면 이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선두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러시아는 부지를 정한 지 5년여 흐른 1890년, 동시에 새로운 공관의 건축에 돌입했다. 개조해서 쓰던 한옥을 헐고, 결국 항구적인 서양식 건축을 도입한 것이다. 영국이 중국에서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 상해의 설계가와 재료를 공수해온 반면, 러시아는 인천 개항 때부터 조선에서 활동하던 사바틴의 건축 경험을 공사관에 반영했다. 러시아는 특히 높은 고지대에 높은 망루까지 계획함으로써 자국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역시 그 대열에 동참, 러시아공사관의 맞은편 언덕에 바로크풍 공사관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들의 강해진 영향력은 공사관 건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정동은 이제 외교 중심지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냈다. 정동보다 ‘Legation Quarter(혹은 Europe Quarter, 공사관 구역)’이라는 이름이 서양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사진5]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영국공사관 1호관 (출처: Room for diplomacy)



[사진6] 가장 높은 언덕에 들어선 러시아공사관 (출처: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Isabella Bird’s travel photographs)



[사진7] 공사관 구역으로 불리게 된 정동(출처: Western Quarter of Seoul, 1901, http://www.nationalarchives.gov.uk/)

반면 정동에 거점을 마련했던 개신교 선교부들은 1890년대 들면서 점차 정동 밖으로 눈을 돌렸다. 미 북장로회 선교부의 경우 낙후된 선교사 사택 수리 문제가 계속되고, 길 건너에 있던 감리회 선교부가 더 확장되는 모습을 보이자 점차 정동에서의 사업을 줄이고 서울의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정동에 몰려드는 학생, 환자, 신자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1895년 러시아공사관이 준공되던 즈음 서대문 안 큰길가에 새문안 교회를 건립을 시작했고, 정동여학당은 서대문밖 연지동으로 옮겨갔다.

 

감리회 선교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화학당 학생 수의 급증으로 1897년 한옥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2층의 서양식 건축물을 선보였다. 같은 해 스크랜튼의 병원은 남대문 상동 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대신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정동제일교회가 들어섰다.

 

– 병원이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게 붐비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남대문 상동에 있는 병원이야말로 그 위치며, 주변의 교통량이며, 상주인구수를 감안할 때 참으로 바람직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민중이 있는 곳인 반면에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주거지역입니다.(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93)

 

교회, 학당 등은 신도와 학생의 증가로 새로운 건축을 짓거나, 더 나아가 부지가 좁은 정동에서 벗어나 확장 이전하는 형태였지만, 병원은 ‘민중이 있는 곳’, 그것이 옮기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선교사들의 주택 역시 민가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동은 공사관뿐만 아니라 여타의 건축물들도 서양식으로 대체되어 갔고, 서양인들 중에서도 특권층을 위한 성역처럼 변해갔다. 위세를 드러내는 공관건축이 등장하고 선교는 정동을 뿌리로 하여 주변으로 확대되자 이제는 정동을 중심으로 주변 환경을 바꾸기 위한 시도가 시작됐다.

 

새로운 건축과 도로의 정비, 순환과 호흡의 근대도시계획


 

영국과 러시아공관의 건축이 마무리 되어가고, 교회 및 학교의 확장, 병원의 이전 등이 준비되던 1894년, 첫 도로 정비가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대로를 각 동리에서 맡아 수리할 것’, ‘물길을 트고 다리를 수리하고 풀을 베고 구덩이를 메울 것’, ‘물이 도로에 쏟아지지 않게 할 것’처럼 일반적인 훈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895년부터는 정부가 직접 예산을 책정하여, 조사, 측량, 시행하는 ‘사업 형식’으로 변화했다. 첫해는 공사관거리를 시작으로 가가(假家, 임시로 지은 가건물)가 많던 남대문로와 가구거리가 대상이었다. 첫 사업은 정동 거주 외국인 5인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시작하였지만, 이후 매년 진행되는 도로 정비는 정부 부처가 주체가 되어 정동 주변 도로를 정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사진8] 공사관거리, 남대문로, 가구거리(①~④번) 등 서양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공사관구역 인근 도로의 정비는 1895년 이미 시행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이 이뤄지면서 경복궁과 공사관구역을 잇는 도로(⑥~⑧)가 정비되었고,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에는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을 통해 한강과 서울을 왕래하는 도로(⑩~⑬)의 정비가 완료되었다.

 

이 시기 정비 사업은 탁지부 및 해관의 브라운(McLeavy Brown), 내부 토목국장 남궁억, 한성부의 이채연 등 세 명에 의해 주도되었다. 1893년 중국에서 고빙되어 들어온 브라운은 예산과 사업성 등 재정을 담당했고, 토목국장 남궁억은 토목기사 심의석이 수행한 현장 조사 및 측량 등을 관리한 기술 부문 책임자였다. 1896년 한성판윤으로 임명된 이채연은 마련된 정비계획을 시행하는 관리자였다. 도로별 조사, 측량 현장에는 브라운과 심의석이 늘 동행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비할 도로의 선택 및 사업순위 등이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뫼텔 주교는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대성당 부근에 길을 낼 가치가 있는 지를 물어보기 위해 브라운씨 댁에 들렀다. 그렇다면 출입문을 내야 하므로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는 올해에는 계획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뮈텔의 주교일기, 1897년 5월 27일자)

– “브라운의 활약 덕택으로 서울에는 새로운 가로가 만들어지고, 낡은 도로의 폭은 확장되고 최신의 위생 시설이 도입되고, 북경에 이르는 도로는 면목을 일신하였다.” (Frederick Arthur MacKenzie, The Tragedy of Korea)

 

정동을 찾은 서양인들은 서울의 도로 정비를 평가하면서 시행책임자인 이채연에 앞서 서양인 브라운의 역할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이는 멕켄지뿐만 아니라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의 저자 비숍, <조선비망록>의 샌즈 등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공유한 인식이었다. 도로 정비와 관련한 내부 및 한성부 조회, 교섭 절차 등이 담긴 정부의 회답에서 ‘당시 성내의 도로와 도랑의 수리는 브라운이 전담하고 있으니 그와 상의 하에 진행하겠다’라고 언급되는 등 그의 비중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면 서양 중심의 문명근대화 가치를 우선시하고, 또 전파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 또한 읽을 수 있다.

 

– “새로운 모습의 서울은 7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브라운과 지금은 전근되었지만 열정적이었던 조선인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더럽고 좁은 지역을 청소하고 재건축하는 일을 시작해서 4주 안에 끝내버렸다. 도시의 이전 상태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과업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변신이 일어났다. 거리는 멋지고 널찍하고 깨끗하고 잘 만들어졌으며, 하수도 시설도 잘 되어 있다. 좁고 더러운 골목은 확장되었다. … 기차, 자동차, 전기, 기차역, 호텔, 벽돌집과 유리창이 있는 서울이 마침내 흥미롭고 깨끗한 도시가 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앵거스 해밀턴,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

 

이러한 서양인들의 공유된 인식은 19세기 구미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나타난 근대도시계획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세기 구미에서 진행된 도시화는 두 개의 대립국면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인구 응집으로 비롯된 새로운 도시의 계획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구도심의 대변동이었다. 새로운 도시 즉, 미개척지이거나 도시를 확장하는 데 있어 적용된 계획은 토지분할의 기본적인 패턴인 격자형으로 분할되는 것이었다. 예컨대 개항장과 같은 곳에서는 격자형의 토지분할이 대체로 나타났다.

 

반면, 구도심의 대변동은 산업화 혹은 시민혁명으로 인해 무질서해진 도시를 규제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근대 유럽의 많은 구도심에서 나타난 대변동은 오스망의 파리 계획와 비엔나의 링슈트라세 계획에서 나타난 것처럼 ‘순환과 호흡의 시스템’에 있었다.

 

순환시스템을 설계한다는 것은 연결의 수단이 되는 도로의 네트워크를 개선시키는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막힌 도로를 뚫어서 연결하고, 국소적으로는 철도역이나 시장처럼 새로운 지점과 오래된 지점 사이를 연결하여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형성시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개념인 호흡시스템이란 닫힌 공간을 열어 공중위생을 개선하는 것으로 근대도시의 광장·시장과 같은 오픈스페이스, 가로수가 있는 산책로, 도시공원은 이러한 개념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도시의 정비사업은 대부분 도시의 행정관에 의해서 외과수술과 같은 방식, 즉 기존의 낡은 부분을 걷어내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서양인들이 겪었던 자국 근대도시의 경험은 ‘낡은 중세 서울’에서 적어도 그들이 거주하는 구역 안에서는 당연히 실행해야만 하는 근대적 가치였던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석재 손질, 풀밭 정리와 같은 훈시 성격의 도로 정비는 1895년부터는 도로의 조사에서 새로운 도로의 개설까지 일련의 계획과 사업으로 발전되었다. 무질서한 도시에 근대적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사관 구역 주변의 도로 정비는 한강에서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에 이르는, 즉 서울의 문턱인 공사관 구역과 외부의 출입로를 정비하는 사업으로 확대되었고, 1897년 경운궁에서의 대한제국 선포시기에 이르면 원구단과 명동성당에 이르는 도성 내부 도로에까지 확산되었다.

 

공사관 구역에서 대한제국의 중심으로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왕후의 시해 이후 불안감에 시달리며 1년 여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환궁 장소로 정하였다.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공관, 해관본부, 교회, 학교 등 다양한 구미 세력의 힘의 균형과 보호 아래 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제국과 황제의 권위에 맞게 경운궁의 궁역을 정비하고, 원구단을 건립했다. 이후는 익히 알려진 바처럼 대한제국 선포, 황제 즉위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의 황실 권역은 선원전, 그리고 경희궁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장되었다. 서양인들이 선점했던 지역을 매수하기도 했다. 경운궁 남쪽 확장을 위해 독일영사관 부지를 사들였고, 감리회 선교부의 일부 부지가 접객시설인 1898년 손탁호텔로 대체되었다. 장로회 선교부의 정신여학당 또한 1897년 황실도서관 부지로 매수되면서 수옥헌(중명전)이 들어섰다. 1900년 경운궁 화재 이후에는 궁궐 내 양관 건축이 더욱 늘어났다. 대한제국의 대표적 양관인 돈덕전과 석조전 신축을 위해서 미국공사관과 영국공사관 사이에 있던 해관본부를 다른 장소로 이전시키는 계획까지 마련되었다. 이 때 벌어진 궁내부와 브라운의 분쟁은 당시 정동 내 서양인 영역의 축소와 대한제국 영역 확대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의 한 단면이었다.

 



[사진9] 1901년, 해관지역은 두 영역으로 나뉘어 북서쪽 부지는 돈덕전, 남쪽은 석조전으로 계획되었다. 브라운 지휘 아래 목포해벽공사 설계업무를 담당했던 하딩(J. R. Harding)이 석조전 설계를 했고, 브라운의 사임 후 그의 비서관이었던 데이비슨(H. W. Davidson)이 시공을 책임졌다. (출처: http://www.nationalarchives.gov.uk/)

 

1900년에 이르면 도로 정비로 인해 넓혀진 거리에 전차도 돌기 시작했다. 넓게 정비된 종로와 남대문로, 연행로, 새문안로를 잇는 환상형(環狀形) 도로는 자연스레 정동의 범위가 되었고, 이를 따라 전차를 갈아타며 순환할 수 있었다. 프랑스공사관이 인접한 성벽 밖으로는 경인선 철로의 종착역인 서대문역도 들어섰다. 비상 시 서대문역을 통해 손쉽게 제물포로 빠져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한편, 정동 지역의 중심(현재 정동극장)에 서양인들의 여가공간으로 활용된 ‘Public Park(Union Club)’이 있었던 것처럼, 다른 장소에도 도시공원과 광장 및 시장 등 새로운 오픈 스페이스 조성이 독려되었다. 1897년 남대문로 정비로 인해 남대문 상설장시가 선혜창에서 열리게 되었고, 1899년 탁지부에서 내부에 민가를 정리한다는 공문을 보내면서 탑골공원 조성을 위한 정비도 시작되었다.

 

정동의 많은 대지는 경운궁으로 상징되는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대체되었고, 순환과 호흡의 시스템으로 서울의 안팎을 연결하는 열린 장소로 변화해 갔다. 공관을 제외한 의료, 교육, 선교, 통상에 종사하는 서양인들은 정동을 벗어나 군중들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이로써 정동 지역은 서양인들의 구역이라는 배타적 성격은 옅어지고,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장소성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의화단 운동과 동아시아 정세


 

1900년 6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사관들이 민중에 의해 포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화단 운동이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선교, 문물, 경제적 침투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반제국주의 민중조직이었다. 산둥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이들은 중국 정부의 묵인 아래 외국 공사관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영국, 일본, 독일을 비롯한 8개국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항구인 텐진을 점령하고, 8월 베이징에 입성, 이듬해인 1901년 9월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기 전에는 베이징의 공사관 구역(현재의 동교민항, 东交民巷)도 서울과 비슷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개항장이 아닌 내륙에 위치한 수도였기에, 중국인들이 살던 토지를 매입해서 침투하는 과정이었다. 이곳 역시 정동처럼 개항장인 텐진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베이징의 문턱이었고. 자금성과 인접한 구역이었다. 경계를 굳이 설정하지 않더라도 북쪽과 남쪽으로는 황성과 내성의 성벽이 감싸고 있고, 내성에 인접해 텐진으로 향하는 철도역이 있었기에, 방어와 진입, 그리고 탈출까지 용이한 지점이었다.

 



[사진10] 좌> 1900년 각국 공사관 분포(회색), 우> 1900~1902년 의화단 운동 이후 경계를 획정한 북경 공사관 구역 의화단 운동 이후 유럽 열강은 중국과 신축 조약(1901.9.7.)을 맺고, 배타적 구역을 설정하였다.(출처: Peking Legation Quarter, Morse, Hosea Ballou,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Chinese empire (1910), vol. 3. The period of subjection, 1894-1911』)

 

그러나 의화단 운동으로 인한 신축조약의 체결로, 유럽 열강은 서울과는 달리 베이징에서 완벽한 배타적 구역을 설정할 수 있었다. 총12조로 구성된 신축조약 가운데 제7조 규정에 의하면, 각 공사관은 별도의 공사관 경계를 가지고 별도의 군대를 주둔하여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며, 자국 공관과 자국민을 보호할 수 있게 하였다. 결국 각국 열강들이 저마다 구역을 확보하고 군비를 증강하여 요새화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인 공사관 구역에는 중국인들이 거주할 수 없도록 했다는 점이다. 경계 내부에 섞여 살던 중국인들은 구역 밖으로 쫓겨났고, 높은 성벽과 8개의 보루, 철문을 설치하여 만들어 중국인들의 진입 자체를 막았다. 여기에 더해 베이징에서 산하이관(山海關) 사이의 철도 옆 주요지점 12곳에 각국의 군대를 주둔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베이징의 정세는 서울 정동 공사관 구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공사관들이 자체 경비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는 신축조약 체결 과정에서 열강 간의 충돌 가능성이 높아진 것과 비상 시 타국에서의 자위권을 강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배타적 공사관 구역을 설정할 수 없었기에 강구된 것이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신축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만주 및 한반도 세력 확장을 더욱 우려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정동지역의 영국 수비대 확충을 본국정부에 계속 요청하였다. 특히 경운궁의 위치가 북으로 영국공사관과 벽 하나를 두고 있어서 2개의 문을 통해 직접 연결이 가능하기에 고종이 환궁한 이후부터 경운궁 북쪽 영국공사관에 작은 해병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계속 본국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별도의 수비대 증설과 막사의 건설이 1902년 8월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사진11] 좌> Seoul Legation, Plan of proposed barracks for guard, 1900. (출처: http://www.nationalarchives.gov.uk/) 우> Barracks at compound entrance, built 1903 (출처: Room for diplomacy)

 

그러나 당시 정세는 정동 외교관들의 활동에 제약을 안겼다. 의화단 운동과 신축조약 체결은 동아시아에서 열강들 간의 경쟁이 통상을 둘러싼 이권 경쟁이라는 선을 넘어 영토, 즉 식민지 획득 경쟁 단계로 넘어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중국에 한정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가 연계된 문제였다. 만주와 조선에 대한 영토 획득 열망을 가진 러시아, 그리고 청일전쟁을 넘고 의화단운동을 거치며 제국의 대열에 올라선 일본, 양극으로 압축되는 전선은 1902년의 1월의 영일동맹, 3월의 러프 공동선언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이러한 동아시아에서 열강들의 치열한 외교전은 실상 조선보다는 중국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04년 만주와 조선을 둘러싼 물리적 충돌, 러일전쟁 역시 요동반도와 그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그 결과 정동에 있던 대한제국의 고종과 공관의 외교관들은 활동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 1905년 을사늑약을 시점으로 그들의 활동이 멈추자 공사관 구역의 시계는 멈춘 그 모습대로 남았지만, 경운궁 구역은 이제 일본에 의해 이전과는 다른 동력을 얻게 된다.

 

<참고자료>

『Foreigners Within the Gates: The Legations at Peking』, Michael J. Moser, 1993, Oxford University Press
『Room for diplomacy: Britain’s Diplomatic Buildings Overseas 1800-2000』, Mark Bertram, 2011, Spire Books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Chinese empire』, Morse Hosea Ballou, 2013, HardPress Publishing
『The Modern CIty: Planning in the 19th Century』, Francoise Choay, 1969, George Braziller
『1901년 체코인 브라즈의 서울방문』, 2011, 서울역사박물관
『대한제국기 정동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류와 도시건축에 대한 학술연구』, 2011, 서울학연구소, 서울역사박물관
「푸른 눈에 비친 정동-선교사를 통해 이루어진 동서만남과 교류」, ‘대한제국기 정동의 역사문화적 가치 재조명 학술심포지엄’, 이덕주, 2011, 서울학연구소
『정동1900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도록)』, 2012, 서울역사박물관
「개항기 구미 세력에 의한 국토 및 지역체계의 변화」, 김윤미, 2011,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http://www.nationalarchives.gov.uk/)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 (http://digital.nl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