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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박 상병’의 공간, 그리고 2018년 나의 공간(제8회 한국사교실 참여후기)

BoardLang.text_date 2018.03.15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1993년 ‘박 상병’의 공간, 그리고 2018년 나의 공간


제8회 한국사교실 참여후기


 

진오균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석사과정)


 

「연구회에 돌아와 보니!!」라는 박태균 선생님의 글을 읽었던 것은 한국역사연구회(이하 한역연)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게 된 것은 2014년의 언젠가 수업 과제를 준비하면서 관련 논문을 찾는 과정에서였습니다. 현대사 연구자로 유명한 박태균 선생님께서는 글을 쓴 1993년 당시에는 “연구회”의 5년차 회원이자, 갓 전역한 공군 예비역의 신분이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성공한 연구자의 과거 행적을 살펴본다는 생각에 흥미가 동했던 것 같습니다. 두 페이지에 걸친 글에서 ‘공군 예비역 박 상병’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주된 요지는 후배 회원들의 활동이 부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후배 회원들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활동할 것을 권면하는 한편 “연구회의 운영과정” 또한 후배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었습니다.(박태균, 「연구회에 돌아와 보니!!」, 『한국역사연구회회보』 15, 1993.) 20년도 더 된 이 글의 문제의식이 그동안 한역연 활동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읽으면서 주목했던 것은 ‘박 상병’이 드러냈던 문제의식 속에 담긴, 자신의 공간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이제 막 석사과정을 다니게 된 초학자로서 한역연과 같은 학회나 학계의 내밀한 상황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의 공간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모으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현재 대학 사회에서는 어떤 목적을 표방하든지 간에 많은 공간들이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공통적인 관심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다양한 공간에 몸담았었고 실제로 그 중 일부 공간이 소멸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원이 들어오지 않는 조직은 그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든지 “행사에 나가면 매일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든지 하는 ‘박 상병’의 안타까움에 많이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박 상병’이 애정 어린 비판을 쏟아냈던 한역연은 어떤 공간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한역연 홈페이지를 찾아서 올라와 있는 글들을 읽어보고, 몇 차례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분과 발표에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앞선 간접적인 경험들을 통해 한역연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던 중에 매년 이맘때 한국사교실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사교실은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한역연에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고 선생님들을 뵐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개인 사정상 총 6차례 열리는 강의 일정에 모두 참여할 수는 없었고, 첫 세 분 선생님들(고현아, 정동훈, 조낙영)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 아쉽긴 하지만, 세 분 선생님들을 뵙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사교실의 의의는 ① 각 시대 · 분야사의 연구 경향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 ② 전문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한 선생님들의 진솔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③ 한역연 활동의 장점을 살펴보는 기회였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각 시대, 분야사의 중요한 쟁점들과 최신 연구 경향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고현아 선생님께서는 고대사 연구에 동원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주된 관심 분야인 신라사를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는데, 최근 경주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발굴 현황과 그 의미에 대해 소개해주신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정동훈 선생님께서는 고려 전기를 고려시대의 典型으로 보는 인식과, 고려가 다원사회를 지향했다는 ‘고려 다원사회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우선 고려 전기를 전형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왕조사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가 아는 고려를 11세기에 국한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려 다원사회론’에 대해서는 고려가 다원사회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 현상을 그대로 수렴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귀납적 사회론’을 주장하셨습니다.

 

조낙영 선생님께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맹아론이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면서, 기존의 조선시대사 연구가 사회구성체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인식했던 것에서 벗어나 최근 연구는 국가와 사회가 경제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연구경향 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 조선후기 국가재정사의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소개해주셨습니다. 특히 문제의식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사회경제사반’이 ‘국가와 사회반’으로 명칭을 바꾸어 새로운 방향을 설정했고, 조선시대 재정 정책과 관련하여 맹자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해주신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강의가 끝나고 이어진 뒷풀이 자리에서는 연구자의 삶에 대한 선생님들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다른 학문 분야와 달리 사료를 근거로 해서 논리와 이야기를 엮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훈련기간이 길어지고 학위 취득도 오래 걸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연구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글을 써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이렇게 학문 자체도 어렵지만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학위를 취득한 뒤에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기 어렵고 수입도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전문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되는 일이며,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버티기 어려우니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조언을 통해 공부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고 각오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한역연 활동의 장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선 한역연 활동을 통해 서로 다른 배경에 있는 연구자들과 만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각 학교마다 학풍이 다르고 사람들마다 생각이 모두 달라서, 자신이 소속된 학교를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을 통해 더 폭넓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평등한 학회원 사이의 관계도 주목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석사 과정생부터 교수님들까지 한역원 구성원들은 모두 동등한 연구자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양한 학습반과 연구반들이 개설되어 있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번 한국사교실은 앞으로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지식도 쌓고, 계속해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각오도 다지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한역연에 대한 정보 제공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점입니다. 첫 강의에 앞서 이익주 선생님께서는 환영의 말씀을 해주시면서 한국사교실이 끝나고 강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한역연의 회원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사교실을 통해 한역연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리고 한역연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에는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강의를 마치고 난 뒤의 질문시간과 뒷풀이 시간을 통해서 선생님들께서 한역연 활동에 대해서 간간이 설명해주시긴 했지만 한역연 활동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향후 한국사교실에서는 별도로 한역연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박 상병’이 애정 어린 비판을 쏟아내며 드러냈듯이, 이익주 선생님께서 연구회가 오랜 기간 존속하며 시련을 딛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자부하셨듯이 한역연은 분명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 한국사교실은 한역연 선생님들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박 상병’의 소중한 공간이었던 한역연이 언젠가 저의 공간이 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