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상품화되는 시대의 관광 도시[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부산, 과거와 현재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송은영(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부산이 한국 제 2의 도시라는 말은 관광과 여행 분야에도 적용된다. 천혜의 자연을 갖춘 제주와 역사유적으로 가득한 경주 정도를 제외하면, 부산은 도시경관을 바탕으로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한국 도시들 중 여행객 숫자와 관광수입 수치가 서울 다음으로 높은 제 2의 관광도시일 것이다. KTX 열차가 개통된 이후 부산은 사시사철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관광지가 되었고, 해마다 여름이 되면 TV 뉴스는 관행처럼 해운대 백사장에 빽빽하게 몰려든 인구를 기준으로 여름 휴가철의 시작과 끝, 그리고 최성수기를 가늠한다. 그런데 최근 부산의 관광도시 역사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이 흐름은 최근 부산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곧 한국의 다른 도시들로 퍼져나갈 어떤 뚜렷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부산의 중심, 원도심에서 해운대로 옮겨가다 부산의 원래 지명이었던 ‘동래’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동래구를 중심으로 한 동래읍성 주변의 지역은 1876년 최초의 개항지가 남쪽에 형성될 때까지 한반도의 변방이었던 동래부의 중심지였다. 개항 이후 일본인전관거류지가 현재의 광복동 초량왜관 근방에 설치된 후 일본인 거주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 지역에 아예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고 19세기 말부터 용두산 인근 바다들이 차례로 매립되자 이 지역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914년 일본과 청나라 조계지 주변 지역이 부산부로 독립한 이후, 현재 남포동, 광복동, 충무동, 초량동 등과 그 인근 지역이 근대 부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 지역의 주도권은 1990년대 이후 수영 비행장이 사라지고 해운대 일대의 군사지역이 아파트 단지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근현대사 백년 동안 현재 부산광역시 지역의 중심축이 북에서 남으로 다시 동으로 옮겨간 것이다. 부산이 관광도시로서의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은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의 흔적들 덕분이다. 부산의 관광자원은 대체로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부산의 원류인 동래 지역에는 복천동 고분군, 조선시대의 동헌, 동래향교, 금정산성 등 역사적 유적이 약간 남아 있지만, 외지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은 아니다. 아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동래 온천은 일제 하에 일본인들이 근대적 온천시설을 설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온천장이었고, 각종 놀이기구가 있었던 금강원(현 금강공원)에서의 산책과 짝을 이루는 휴식의 공간이었다. 동래온천은 해방 이후에도 해외여행을 가기 힘든 부부들의 신혼여행지이자 중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각광 받았고 요릿집이 번성하던 유흥가였지만, 현재는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 사진1 일제하 동래온천 봉래관(현 농심호텔 전신) 모습. 온천물을 끌어와 만들었던 인공연못으로 유명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2 일본인들이 동래온천을 본격적으로 개발했던 식민지 시기의 동래 온천장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과거를 지워버린 도시, 부산 이제 ‘원도심’으로 불리는 과거의 부산부 지역에는 수많은 일제의 근대 건축유산들이 있었지만, 개발의 광풍 속에서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축 유산으로는, 1925년 부민동에 준공된 경상남도 도청(임시수도 청사, 현재 석당박물관), 경남도지사 관사(현 임시수도 기념관), 1929년 세워진 동양척식회사 건물(현재 부산근대역사관), 1934년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폐식 다리인 영도대교, 대청동의 부산지방기상청 건물 정도다. 물론 1927년 보안대 건물(현재 부경고등학교 본관), 1930년대 남선전기 사옥(현재 한국전력공사 부산 사옥) 등을 비롯하여 몇몇 근대 건축들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 장소들이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 부산의 역사는 관광산업이 매우 중요한 성장의 동력이 된 현대의 정신을 외면했다. 당시 동경역보다 더 크게 지었다는 부산역과 부산우편국 건물이야 1953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지만, 조선은행 부산지점 건물은 1963년 한국은행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철거되었으며, 부산세관 건물은 1973년 문화재로 지정되고도 1979년 6월 도로확장공사를 위해 철거되었다. 또 다른 수많은 건축물과 식민지 시기의 유적들은 도시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사라졌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에 넘어가지 않아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피난민들의 도시였으며, 서울이나 다른 도시들처럼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 건축이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된 이후였다. 동광동의 청자빌딩(구 한성은행 부산지점), 초량동의 옛 백제병원 건물, 정란각(구 철도청장 관사)처럼 우연히 살아남은 근대 건축들은 카페로 변신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인천이 개항장 주변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을 중심으로 관광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데, 제 2의 도시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인천을 견제하는 부산의 입장에서는 역사를 지워버렸던 과거의 선택이 뼈 아픈 실수처럼 보인다. 사진3 1963년 철거된 조선은행 부산지점 건물. 이 자리에 현재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을 다시 세웠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4 1911년 영국식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었다고 하는 부산세관 옛 건물. 1973년 부산시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되었으나, 1979년 철거되었다.(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5 부산세관 옛 건물이 1979년 6월 도로확장을 위해 철거되고 있다. 현재 부산세관박물관에는 당시의 사진자료 외에도 옛 종탑을 뜰에 보관하고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철거된 건물을 대신할 수는 없다. (출처: 부산세관박물관) 해운대, 부산의 것이자 누구의 것도 아닌 곳 부산은 지금까지 과거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산이 많고 바다에 면하고 있다는 특성을 살려서 자연경관을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밀고 있다. 해안가 절벽을 끼고 절경을 과시하는 태종대, 바다 바로 앞에 절이 있다는 이유로 더 유명해진 해동용궁사, 낙동강 일몰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요즘 부산시가 밀고 있는 아미산 전망대, 다대포 해변에 지어진 세계 최대 규모의 낙조분수 등은 이러한 자연경관을 활용한 것이다. 해운대는 가장 대표적인 자연관광자원이다. 해운대는 일제하에도 넓은 백사장과 해수 온천 으로 알려졌지만, 송도해수욕장보다는 규모가 더 작았다. 송도 해수욕장은 일본인들이 유명관광지인 미야기현 마츠야마 해수욕장을 따라 개발하였고, 대규모 유원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송도 해수욕장이 정체되어 있는 동안, 해운대가 부상했다. 1960-70년대에 해운대는 권력층의 단골 휴가지였다. 박정희가 해마다 휴가철이면 찾았던 해운대 극동호텔은 ‘부산 청와대’라고도 불렸다. 현재 해운대 팔레드시즈 자리에 있던 극동호텔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특급호텔로 1966년 세워졌으며, 외국의 귀빈들을 종종 맞아들이는 명소였다. 박정희는 해운대에 있는 삼성 이병철의 별장에서도 만남을 가지곤 했다. 1980년대 이후 제주도가 부상하고 1990년대 이후 해외여행이 성행하면서 해운대는 최고의 여름 휴가지로서의 명성은 잃었지만, 도리어 부산은 KTX 개통 이후 사시사철 편하게 접근 가능한 친근한 여행지가 되었다. 사진6 1960년대 해운대 백사장 사진. 아래 동백섬이 보이고, 위로는 달맞이고개에 있던 골프장이 보인다. (출처- 부산시) 그러나 쇠락한 동래온천과 달리 지금도 해운대가 부산 최대의 관광자원일 수 있는 이유는, 바닷가를 둘러싸고 치솟은 현대적 외관의 초고층빌딩들, 분당을 연상시키는 신도시 아파트촌이 된 좌동, 해운대구 우동에 자리잡은 미래도시 센텀시티 등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운대 마린시티의 야경은 광안대교가 보이지 않는다면 고층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홍콩의 야경과도 비슷하다. 그것은 부산이 오늘날 외부의 방문객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어하는 요소들의 총결산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끼고 있는 도시, 부유한 시민들의 삶이 펼쳐지는 도시, 미래를 향해 발전하는 현대도시. 부산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이든 외부인에게 이러한 모습들을 과시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해운대가 바깥에 자랑거리처럼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정작 부산 사람들은 고층빌딩으로 가득찬 해변 경관을 비판하며 과거의 정감 있고 조용했던 해운대 백사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해운대는 부산에 있지만 부산만의 것이 아니다. 아직도 부산 사람들은, 여름철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으로 백사장을 벗어나 해운대 뒷골목과 횡단보도를 활보하는 대담한 아가씨들은 모두 서울에서 온 여성들이고, 해운대의 수려한 경관을 망쳐놓은 고층빌딩들은 서울 사람들이 소유한 별장이라고 믿는다. 해운대는 부산에 외지인의 돈을 가져다주지만, 외지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망치는 행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난의 흔적, 역사가 되고 구경거리가 되다: 감천마을과 산복도로 놀랍게도 외부인들이 최근 부산에서 찾는 장소들은 이렇게 수려하고 모던한 부산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의 피난민들이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아로새겨온 가난의 흔적들이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과 국제시장, 부평시장 등은 최근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 장소들은 오늘날 한국전쟁 이후 부산이 겪어온 역사적 상황에 빚지고 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전후 피난민과 부산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책을 팔러 나온 난전이 진화한 것이고, 일제가 운영하던 공설시장이 있던 자리인 부평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PX 물품을 파는 깡통시장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커졌다. 국제시장은 해방 이후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이 가재도구를 파는 데서 시작해서 부산에 주둔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들을 거래하면서 점점 더 거대해졌다. 최근 피난민의 부산 정착기를 다룬 ‘국제시장’이라는 동명의 영화가 히트하면서 이 지역이 더 유명해졌다고는 하지만, 서로 오밀조밀 붙어 있는 이 지역들은 원래부터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원도심의 번화가였다. 또 다른 명소 자갈치 시장이나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되는 BIFF 광장 주변과 멀지 않은 전통의 명소라는 점은 이전부터 외지의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장점이었다. 그러나 최근 부상한 부산의 유명 관광지들은 한국전쟁 이후 부산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었던 원도심 번화가의 관광지화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다. 가난한 두 개의 마을이 관광객들이 찾고 싶어하는 부산만의 독특한 풍광을 가진 관광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산 사람들은 과연 미리 예측할 수 있었을까? 감천마을은 말 그대로 도시빈민의 마을이자 탄압받은 소수종교 태극도 교인들의 마을이다. 2009년 <한겨레 신문>과 <KTX 매거진>이 처음 소개했을 때, 이곳은 부산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감천마을’이나 ‘감천고개’가 아닌, ‘태극도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1955년 보수동에 있던 태극교 본부가 철거되면서 몇 달만에 수천 명의 종교인들이 감천동 고개 뒤 산비탈로 이주하면서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도저히 걸어서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산중턱 사이에 숨겨져 있던 이 마을은 어느날 갑자기 ‘부산의 산토리니’ 또는 ‘부산의 마추픽추’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은 눈부시게 푸른 지중해 바다 위에 햇빛을 반사하는 흰색 건물들이 산비탈에 들어차 있어서 유명한 섬이다. 사이비종교를 믿는다고 탄압받던 사람들이 세속의 눈을 피해 모여든 뒤 한국사회가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동안에도 그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가난한 마을에 붙이기에는 천부당만부당한 별명일 것이다. 그러나 감천마을은 어느새 ‘감천문화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통해 ‘문화’의 색채를 얻었고, 관광객들은 색색깔의 집들 사이로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사진7 감천 마을 파노라마 사진. 가난과 종교적 탄압 때문에 우연히 보존된 마을이 부산의 산토리니 또는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관광지가 되었다. 여행객들이 이곳을 발견한 시기와 통영 동피랑 마을을 따라 벽화 등을 그리는 공공미술 프로젝트(2009~2012)가 실시된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출처- 감천문화마을 홈페이지) 일명 ‘레고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풍경은 과연 독특하기는 하다. 산비탈을 따라 겹겹이 쌓인 집들 사이로 가파른 계단과 비좁은 골목길이 50~60년대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옥상마다 표식처럼 새파란 물탱크들이 올라가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집을 페인트칠할 때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홍색, 노란색, 빨간색 등까지 칠해져 있다. 부산의 옥상은 주로 바다의 파란 색과 대비되는 푸른 색 또는 녹색 방수 페인트로 칠해져 있기 때문에, 이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칠해진 이유를 지역적 특성과 연관하여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누구도 고르지 않을 색깔의 페인트들이 저렴했기 때문에, 남들 눈을 피해서 외진 곳으로 숨어든 빈민들이 누구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고 고른 색이 아니었을까. 2009~2010년 감천마을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인해 통영 동피랑 마을을 따라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지로 성공하는 사례를 본 부산시는, 그제서야 감천 마을과 비슷한 경관을 갖춘 산복도로 일대가 또 다른 관광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복도로는 산꼭대기 위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가리키는 부산 고유의 명사로, 부산에는 여러 산복도로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량동과 수정동, 보수동, 대청동, 영주동 등을 가로지르는 산복도로는 식민지 시기부터 부산항 인근 일본인 거주지를 피해 주변의 가파른 산비탈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문에 피난온 사람들, 경제성장기 이촌향도 붐에 따라 근처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빈민들이 무허가 정착지에 모여들자 점점 더 산꼭대기까지 거대한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는 서울이 개발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1966년 김현옥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해 수많은 도로를 뚫으면서 ‘불도저’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직전까지 부산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산복도로를 만든 공을 박정희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까지도 수정동 일대의 산복도로는 부산 시민들에게도 가난한 동네의 대명사였으며 일부러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과 최근 5-6년 사이에 이곳은 보수동 헌책방 골목과 광복동 번화가를 들르는 관광객들이 부산만의 지역색을 찾기 위해 발을 넓혀 올라가는 관광지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천마을의 성공을 본 부산시는 ‘초량 이바구길’ 개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 빈민가를 관광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곳의 풍광 역시 감천마을과 유사한 데가 있다. 집집마다 옥상에 파란색 물탱크가 아직도 설치되어 있고, 산의 경사를 따라 만든 집들이라서 옥상이 주차장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차장은 지하에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깨뜨린, 그러나 자연지형을 현명하게 이해한 형태의 주거지대라고 할 수 있다. 감천마을에서도 감천항이 내려다보이지만,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항의 아름다운 모습과 비교할 수는 없다. 관광객들에게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너무나 부산적인 주거지를 거닐면서 항구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포인트인 셈이다. 더구나 아슬아슬한 산비탈을 과격하게 내달리는 위험한 시내버스들을 타보는 것은 부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스릴로 소개되기까지 했다. 험하기로 소문난 부산 시내버스 기사들의 운전솜씨조차 소위 ‘로컬(local)’의 매력이 된 것이다. 부산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정동 산복도로를 달리는 ‘만디 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승객 이용률을 보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사진8 부산 수정도 일대 산복도로 야경. 이곳의 역사적 가치가 사람들에게 인식되면서 2011년부터 부산광역시는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초량 이바구길 투어’ 등 여러 관광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한국일보, 2017년 4월 11일) 사진9 산복도로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초소형 모노레일. 초량동 168계단에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이곳을 들르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출처- 연합뉴스, 2016년 10월 21일)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가난까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옳은 것일까.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서처럼 가난마저 부자에게 도둑맞는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의 산복도로는 부산의 현지인들에게 가난의 상징과도 같은 마을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보고 자랐던 가난한 동네가 이제 와서 뭐가 새로울 것이 있다고 관광지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관광객들이 골목을 활보하며 내는 소음과 집밖에서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남루한 살림이 구경거리가 될 까봐 창문도 열기 힘들다는 불평과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더 나아가 현지인들의 가난이 외지인들의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은 생활공간을 침범 당한다는 불편함을 넘어서 모욕감을 안겨주는 일이다. 이것은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만의 잘못도 아니다. 누구보다도 부산시가 앞서서 적극적인 관광상품화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을 잠식하는 과잉관광(over-tourism) 최근 한국에서 가난한 낙후 지역의 관광상품화 문제는 주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과 관련되어 다루어진다. 이 용어는 낙후된 도심에 가난한 예술가와 소상인들이 파고들어 정취를 더하면 관광객과 대자본이 몰려들면서 집값이 오르고 높은 임대료와 불편해진 거주환경 때문에 원주민과 임대인들이 떠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미 서구의 대도시에서 1960년대부터 진행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서촌의 청운동과 효자동, 익선동, 문래동 등 서울의 낙후된 시가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지리학 용어를 이제 많은 대중들이 알게 될 만큼 서울의 큰 도시문제가 된 것이다.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에서 일어나는 관광지화 현상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연장선 상에서 일종의 오버 투어리즘(과잉관광: over-tourism) 또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라고 평가된다. 관광객들에 의한 도시변화를 가리켜 서구에서는 투어와 젠트리피케이션을 합쳐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라고 부른다. 관광객들에 의한 소음과 쓰레기, 도심 주택의 호텔화로 인한 집값 상승은 세계 곳곳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작년부터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니스에서는 관광객들을 제한하라는 시위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고, 스페인의 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도심 지역의 호텔 신축을 금지하는 법안이 실시되었다. 서구에서 이 문제는 이제 완전히 대중화된 ‘에어비앤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광객들이 침입하지 않던 주거지역의 한 주택이 에어비앤비가 되면, 조용하던 현지인들의 골목은 점차 관광객들의 발걸음과 소음으로 분주해지고, 현지인들이 이용하던 옷가게, 정육점, 식품점, 주거지의 오랜 상업시설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 기념품 가게 등으로 바뀐다. 관광객들이 해당 지역을 점령하면 원래 거주자들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야 한다. 감천마을을 방문하는 사람의 숫자가 1년 동안 80만 명을 넘는다는 통계가 있다. 관광객들의 무분별한 사진 찍기, 소음, 쓰레기 등 마을 전체가 불편을 겪는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거주자들에게 실질적으로 경제적 이익이 전혀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감천마을이 앞으로 입장료 천원을 받기로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한 도시 또는 어느 지역이 감당할 수 있는 관광객 숫자를 넘어서는 과잉 관광의 문제인 것은 맞다. 그러나 부산의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에서 일어난 일은 서구의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예술가와 소규모 상인들이 이주하기 전에 관광객들이 먼저 발견한 이곳에서는, 관(官)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펼치고 예술가들의 공방 및 가게,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점들이 뒤늦게 입주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빈민가의 관(官) 주도 관광상품화와 그로 인한 도시변화가 사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부산은 푸어리즘, 투어리스티피케이션, 관 주도 지역주의가 복합된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사실 가난의 관광상품화는 부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홍콩의 악명 높았던 빈민가 ‘구룡성채’는 한동안 사진가들과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극했으나 이제는 철거되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 빈민가의 대명사 ‘파벨라Favelas’는 아예 ‘빈민가 투어’라는 관광상품을 만들어내서, 혼자 걷기 위험한 빈민가를 함께 돌아다니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빈민가의 풍경 자체가 너무나 이채롭기 때문인데, 흥미롭게도 브라질 ‘파벨라’의 경관은 ‘감천마을’의 풍경과 매우 닮았다. 규모와 종류도 매우 다양하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끌어들이는 ‘파벨라 투어’는 윤리적인 비판을 끊임없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돈이 된다는 이유 하나로 가난한 나라에서 막을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브라질의 파벨라에서 시작된 슬럼 투어는 인도의 뭄바이, 남아공의 스웨토, 케냐의 키베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 이르기까지 여러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다. 가난(poor)과 관광(tourism)을 합친 신조어 푸어리즘(poorism)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인데, 이 빈민가 투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윤리적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부산의 감천마을과 산복도로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감천마을과 산복도로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오히려 흔한 관광지가 아닌 도시의 참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혼자, 또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소규모로 자유여행을 하면서 방문한다. 외국의 슬럼 투어가 치안 문제 때문에 흔히 단체 패키지 형태로 진행되는 데 반해, 이곳은 위험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지도 않다. 즉 한국에서의 빈민가 여행은 흔해빠진 관광을 벗어나 도시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시도되는 관광의 형태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여행 담론은 ‘로컬’의 삶을 보고 경험하는 것을 최고로 친다. 패키지 투어처럼 가이드북에 오른 관광 포인트들을 찍으며 남들 가는 대로 정해진 틀을 따라 움직이는 관광은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가득찬 명소, 식당 등을 거부하고, 그야말로 현지인(로컬)이 먹고 보고 사는 그대로를 체험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별로 없는 장소를 찾아가 그들처럼 걷고 현지인들만 가는 맛집을 찾는 것은 소위 ‘진정한’ 여행을 한다는 사람들의 트렌드다.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의 산복도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발견되었다. 유명한 관광명소가 아닌 로컬의 삶이 담긴 골목을 걷겠다는 여행자들을 통해 가난한 빈민가는 서서히 관광지로 변해가는 것이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과 푸어리즘(poorism)의 결합이 남기는 문제 여행자들의 달동네 여행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여행자들의 관광과 여행을 도덕적 비난으로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더욱이 이 지역들이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부산시에서는 이 지역들을 더 멋진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면서 편의시설 마련과 홍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부산을 찾는 여행자들이 처음 시작한 빈민가의 발견이 보여주는 복잡한 문제들이다. 부산 빈민가의 관광상품화는 서울 빼고는 모조리 낙후되어가는 다른 한국의 도시들이 곧 이어 맞이하게 될 역설적인 상황들, 그것이 담고 있는 다양한 문제제기들을 먼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감천마을과 수정동 산복도로의 풍경에서 발견된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적 전통을 아름답다고 인식하게 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은 가난한 달동네인 동시에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가난한 사람들이 축적해온 역사적 경관을 간직한 현대사의 문화재가 된 것이다. 필자가 본 감천마을과 수정동 산복도로의 야경은 그리스 산토리니와 일본 나가사키의 야경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경관은 언젠가 발견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미학성을 간직한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여행자들은 외국의 경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역 고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부한 진리를 아무 의도 없이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관(官)에서 뒤늦게 여행자들을 따라가며 진행하는 관광정책은 대중이 자율적으로 미학적, 역사적 가치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풍경의 가치는 언제나 외부인들을 통해 발견된다. 여행자의 시선은 그곳에 늘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만약 그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못한다면, 그곳은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추레한 곳이고, 언젠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떠나야 하는 지긋지긋한 곳이며, 개발의 광풍이 불면 불도저 아래 당연히 허물어져야 하는 곳이 된다. 여행자의 시선은 현지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창문이 되기도 한다. 외지인들만이 발견한 독특함, 고유함, 아름다움은 빈민가에 딜레마를 제공한다.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는 관광지가 되면서 앞으로 그 흔한 아파트촌으로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도시재개발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암울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사진10 감천마을 한복판에 2003년에 지어진 영동 힐타운 아파트. 감천마을 홍보물은 물론 대부분의 관광객들 사진에서도 이 아파트는 빠져 있다. 관광객들이 이 아파트를 어떻게든 빼고 요령 있게 마을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것은 이 아파트가 전체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출처-)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가 부산만의 독특한 도시경관으로 재발견되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경관들을 보존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마을, 골목, 집들의 집단적인 보존 문제는 아직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감천마을에 있는 한 채의 집은 독립적으로 보면 현재 건축사에서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집들이 수만 채 모여 있는 감천마을 전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주변 경관은 다 새 건물로 바뀌어가는데 혼자 외롭게 남은 식민지 시기 근대 건축 한 채만 보존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기억을 간직한 장소들을 보존할 길은 찾기 어렵다. 지켜야 하는 것은 집 한 채가 아니라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형성된 지역 전체라는 사실을 이 마을들처럼 잘 보여주는 곳은 없다. 감천마을과 수정동 일대 산복도로의 재발견은 아직도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1950-70년대 건축들의 운명에 어떤 시사점을 준다. 2016년 서울의 옥바라지 골목이 철거될 때, 서울시가 철거반대운동가들에게 했던 질문은 그 운명의 기로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옥바라지 골목에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일제하 근대 건축이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일제하 서대문형무소 맞은편에 형성되었던 옥바라지 골목은 그 전통을 이어 1950-60년대 이후 새로 지어진 정겨운 여관 골목이었지만, 식민지 시기 건축만을 보존하겠다는 기준이 명확히 제시된 서울시의 질문 앞에서 어떤 역사적 가치도 주장하기 어려웠다. 모든 지나간 것은 시간이 흐르면 역사적 기억이 축적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름다운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가난한 마을은, 아니, 다른 도시들 도처에 산재한 역사적 마을들은 스스로 미학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이 현상은 현재 부산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한국 사회의 모든 자본, 정보, 인구를 빨아들이는 ‘서울 공화국’에서 주변부화된 다른 모든 지역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지 낙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외부의 침탈을 받지 않고 시간이 축적된 지역들이 재발견되는 것이다. 소위 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관광산업을 반기지 않는 한국의 지자체는 현재 없는 것 같다. 그들은 가난한 지역을 외부인들의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게 될까. 관광객들에게 발견되지 않으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개발될 지역들은 얼마나 될까. 가난한 사람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고 지역을 보존하고 재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부산의 가난한 마을에서 일어난 관광상품화는 결국 한국의 모든 도시에서 일어날 일의 예고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