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 요새에서 도시로[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종착점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이진현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08728) 이진현(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도시이다. 1880년 도시로 인정받은 비교적 젊은 이 도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종착점이며,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주둔지이다. 19세기 후반 기근을 피해 이민을 떠난 한인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며, 안중근, 신채호, 이상설 등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한 근거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의 출입도 자유롭지 않던 블라디보스토크는 1992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함께 외국인에게 전면 개방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이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에는 종로구 계동에 있는 현대사옥과 똑같이 생긴 현대호텔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최고의 호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4년 5월 서태지의 블라디보스토크 공연은 대중들이 이 도시에 대한 큰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14년에는 단기방문 비자 면제와 함께 여행객들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예능프로그램을 촬영할 정도로 가까운 도시로 다가오게 되었다. 시베리아 탐험블라디보스토크의 건설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탐험에서 기인한다. 1483년 이반(Иван) 3세부터 시베리아 대원정을 시도하였으며, 16세기 말에는 본격적으로 우랄산맥 북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1579년 카자흐의 추장 예르마크(Ермак)는 우랄산맥 너머에 위치한 토볼스크(Тобо́льск)를 점령하고 이반(Иван) 4세에게 바쳤는데, 이는 러시아가 동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예르마크의 원정 이후 지속적으로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여 1647년에는 오호츠크(Охотское)를 건설하게 된다. 탐험가 하바로프(Хабаров)는 1649년 아무르강에 진입하고 이듬해 알바진(Албазин)이라는 거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아무르강에서 중국과 접하게 된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으로 남하가 좌절되고 동으로 향하게 된다. 1713년에는 쿠릴열도를 조사하였으며 1732년에는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하였다. 1844년 러시아는 다시 남으로 진로를 바꾸어 아무르강 유역을 개척하고, 1858년 중국과 아이훈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곳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며, 그곳에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를 건설한다. 1860년 다시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연해주를 점령하게 되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2일 쉐프너(Шефнер) 중령과 31명의 해군이 수송선 만주(Манджур)호를 이용해 금각만(Золотой Рог)에 진주한 것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시작이다. 해군요새186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해군과 관련된 사람들과 소수의 외국인 상인이 상주하였다. 금각만 주변의 언덕을 중심으로 해군 관련 시설들과 공장, 유흥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식량을 비롯한 많은 물자는 여전히 아무르강을 거쳐 니콜라옙스크(Никола́евск)를 통해 지원받거나 희망봉을 돌아오는 배를 기다려야 했다. 1864년 9월 16일 훗날 극동 최대의 무역회사로 성장하는 쿤스트 운트 알베르(Kunst&Albers)의 설립자인 구스타프 알베르(Gustav Albers)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오직 44동의 목조건물만이 있었다고 한다. 1865년 대외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관세법을 적용하지 않는 자유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866년에는 아무르강변에 위치한 하바롭스크와 전신이 연결되었다. 연해주 지역을 개발할 목적으로 러시아 중부 및 남부 지역 주민들을 극동으로 이주시켰으며 중국인들과 한인의 이민도 허용하여 인구는 계속 증가, 10년이 지나지 않아 4,000여명에 달했다. 1871년에는 해저케이블을 매설하여 나가사키와 상하이까지 전신이 연결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니콜라옙스크에 있던 해군기지가 옮겨오면서 태평양에 위치한 주요한 항구로 성장할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외연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870년대 후반까지 주요도로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틀란스카야(Светла́нская) 거리가 유일했으며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낮은 목조건물이 듬성듬성 자리 잡은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중국인과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흔적은 거리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까레이스까야(한인), 페킹스까야(북경), 기타이스까야(중국) 등으로 남았다. 주로, 하층노동이나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물과 땔감을 공급하거나 가축을 키웠다. 여관의 코펠 집에는 아들이 3명이 있는데, 장남이 8세, 차남이 7세, 막내가 5세이다. 장남의 사복은 만주인, 차남의 사복은 조선인, 삼남의 사복은 러시아인이다. 형제 3인이 같이 놀 때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 장남은 연령이 좀 높으므로 자기 사복에게서 배운 만주어와 약간의 조선어를 섞어서 말한다. 코펠 집에는 또 작년 봄 조선으로 부터 망명 온 13세의 하녀가 있는데 그녀도 조선어는 물론 러시아어도 활용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3-4개 국어는 통한다 (세와키 히사토, 『블라디보스톡 견문잡기』, 1875년 5월 8일) 시베리아 횡단철도1880년 인구 7,300여 명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별도의 ‘도시’ 단위로 인정받았으며 1884년에는 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이와 함께 도시의 경계가 금각만을 따라 동서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민간인 거주지 주변으로 상업시설과 시장 등이 밀집하기 시작하였으며, 도서관과 극장 등 문화시설들도 문을 열었다. 주요 가로에는 나무가 심어지고 120개의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1886년 결정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설은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의 주요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인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발전할 요소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인구가 매우 부족했으며, 남쪽으로는 청나라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럽 러시아와 연결되는 철도의 부설은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1891년 3월에 열린 착공식에는 동아시아를 여행 중이던 황태자 니콜라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1897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잇는 철도 772㎞가 우선 완공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역과 연결되는 상업용 도크가 새롭게 조성되어 원산, 나가사키, 고베, 상하이 등으로 보낼 물건을 철도에서 선박으로 바로 옮겨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는 태평양으로 가는 관문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군사도시로서의 한계도 여전하였다. 도시의 남서쪽으로는 육군, 동쪽으로는 해군이 주둔하고 있어 도시의 외연이 커지지 못하고, 구역을 재정비하는 고밀도 성장을 하게 되었다. 기존의 목조건물들은 다시 지어졌으며, 땅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었다. 거리의 상점과 가옥들은 북, 동, 서쪽으로 금각만을 따라 4.8㎞에 이르도록 그 범위가 확장되고 있으며 그 재료도 나무에서 벽돌과 석재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새롭고 멋진 공공건물과 개인건물이 속속 완공되고 있다. (중략) 토지의 가치는 폭등했다. 1864년 각각 6백 루블과 3천 루블에 구입했던 부지가 이제는 1만 2천 루블과 2만 루블이 되었으며 시내 중심가의 토지는 어떠한 가격으로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새로움, 발전, 희망이 블라디보스토크 사회의 특징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894년 9월) 듣건대 이곳은 원래 청나라 땅이었는데 무라비요프가 새로 개척하고 항구를 연 지가 30여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구가 2만6천 명인데 또 우리나라 사람이 2천여 명이요 청나라 사람이 1만여 명이고, 일본 사람은 4~5백 명이다. 각 기기창과 여러 시설을 설치하고 늘리고 보태기를 그치지 않았다. (민영환, 『해천추범』, 1896년 10월 11일) 항만의 입구를 두 개의 섬이 외해로부터 막아주고 있는 천혜의 항구로 러시아 극동해군기지가 위치한다. 군함6∼7척, 수뢰정 7∼8척, 화물선 수십 척이 정박해 있으며, 육해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장군200여명, 수군 2,000명, 선원 1,500명, 기병 500명, 보병 1,000명 등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 도시이다. 철도와 해상 교통의 편리함으로 청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각국 물산의 이동이 활발하여 상업도시로도 성장하고 있으며, 군영 내에 기계 제조창이 설치되어 가동되고 있다. 이외에 미국 전선관(電線官)과 일본 영사관, 청나라 유학생 등이 소재하고 있다. <아국여지도, 19세기 후반> 전쟁과 도시변화1905년 러일전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변화를 가져왔다. 전후 복구와 도시의 요새화가 함께 진행되면서 도시는 점차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찾아갔다. 외국인의 이주는 매년 증가하고 있었으며 금각만에는 입항한 외국 선박과 물자가 가득했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출입선박표를 살펴보면 총 603척의 선박이 입항했는데 일본 선박이 209척으로 전체의 30%이상을 차지하며 러시아 131척, 독일 128척, 노르웨이 51척, 영국 39척, 청 23척, 조선 17척 등이었다. 1907년에는 도심을 관통하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지중화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스베틀란스카야 거리에는 전차가 운행을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이 다시 지었으며 거리에는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이미 인구는 10만이 넘었으며 더 이상 도시를 기존 범위내로 유지할 수 없었으며 확장계획이 수립·개발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과 이어진 러시아 내전의 혼란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새로운 형태의 국제도시로 변화시켰다. 거류민단의 보호를 명분으로 한 일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의 군대가 내전간섭을 위해 진주하였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귀환하는 체코군대까지 주둔한 블라디보스토크는 유럽의 물자와 자본이 대거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한 채 소비에트 연방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