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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위한 역사] 권력도, 혼란도 총구에서 나온다 ③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

BoardLang.text_date 2016.05.10 작성자 김인호

권력도, 혼란도 총구에서 나온다

③무신정변 이후의 혼란


김인호(중세1분과)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중세1분과 김인호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351.html)


  1170년(의종 24) 8월 밤 개경 거리에는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 기다렸다는 듯 군인들이 벌 떼처럼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군인들이 문신의 집을 수색하면서 죽인 자가 50여 명. 거리에는 광기와 공포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의 봉기처럼 공포는 사람들에게 전염되었고, 칼을 쥔 자와 아닌 자의 사이를 명확히 갈라놓았다.

노인 중에 44년 전 일이 기억난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현재 국왕인 의종의 아버지 인종 때 사건은 궁궐 안팎에서만 벌어졌고, 희생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비록 궁궐이 불탔지만, 귀족과 문신들이 공포에 떨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귀족 이자겸의 눈치만 살피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나마 문극겸처럼 양심적이고 명망 있던 문신은 살아남았다. 그는 궁궐에서 숙직하다가 체포되었지만, 여러 장교들이 그의 명성을 안다면서 죽이지 않았다. 아니면 평소에 무신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의종은 쫓겨나 거제도로 추방되었고, 무신들은 새 국왕으로 명종을 맞이하였다. 정변의 주동자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궁궐의 공신각(功臣閣)에 초상화를 걸 수 있는 ‘벽상공신’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승진하였고 과거 국왕에 의해 귀양 간 사람들이 돌아왔다.

“문신의 씨를 남기지 말라”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지만, 공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신들은 살아남은 문신들을 불러모았다. 정변의 수장인 정중부는 ‘모두 죽이자’는 주장을 겨우 무마시켰지만, 병부낭중(군대 일을 맡은 5품직) 진윤승처럼 무사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진윤승은 과거 진관사라는 절 남쪽에서 공사를 감독했다. 그는 군인에게 돌을 운반시키면서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1] 의종은 재위 기간 동안 경치 좋은 곳에 청자기와 지붕의 정자를 세웠다. 이런 공사에 동원된 군인들은 힘든 노역에 불만을 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복원된 청자기와 정자가 있다.  ⓒ김인호


공포가 다시 폭발한 것은 정변이 일어난 후 3년 즈음이었다. 의종 복위 운동이 원인이었고, 한 달 만에 실패하였다. 주동자 김보당은 죽기 직전에 “모든 문신이 같이 모의했다”고 거짓말하였다. 다시 피바람이 불었고, 죽음의 공포가 문신들을 몰아갔다. 문신들은 연고가 있는 지방이나 깊은 산속으로 도피해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불안과 공포, 그리고 죽음과 반란의 시대가 열렸다. 문신 귀족의 시대는 한순간에 저물어갔다. 공포의 시대를 연 무신정변은 왜 벌어졌을까? 과연 무신들의 차별이 큰 이유였을까?


인간은 차별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인간은 차별을 한다. 차별은 불만을 낳고, 불만은 때로 폭발한다. 하지만 차별이 있다고 곧바로 사회적 행동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전근대사회에서 차별은 당연한 사회적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성적 차별부터 지역과 가문, 신분 등이 모두 차별의 요소였다. 중세인은 인간 생김새와 신분이 다르듯이 차별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이 차별은 국왕부터 귀족, 평민, 노비까지 차례로 이어졌다. 노비는 최하층이라서 이런 사회적 차별을 바꾸려고 해야 맞다. 하지만 노비층 내부에서 또 다른 계층과 차별이 존재한다. 왕실에서 권력과 가까운 노비, 또한 부자 노비부터 거의 매질당하며 일해야 하는 노비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상층 노비는 그 아래층 노비를 차별·멸시하고, 중간층 노비는 아래인 하층 노비를 그렇게 대우했다. 이런 구조가 당시 사회 안정을 유지시키는 힘이었다.

무신의 지위는 관직상으로 문신보다 아래였다. 문신이 종1품까지 승진이 가능하다면, 무신은 정3품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더구나 군대를 움직일 때 최종 지휘관은 문신이었다. 예컨대 강감찬, 윤관처럼 큰 전쟁에서 활약한 이들이 모두 문신이었다.

이런 형태는 차별이 아닌 고려 왕조의 지배 방식이었다. 고려는 문관 위주의 관료제였다. 무신은 과거 시험과 같은 선발 방식이 없었다. 능력에 따른 추천제였고, 무예가 있는 평민이면 장교가 되기도 쉬웠다.

두려움이 부른 의종의 실정

사람이 ‘차별’을 느끼는 것은 비슷한 능력과 같은 일에 대해 다른 처우를 받을 때 생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처럼 같은 일에 대한 차별 대우는 조직에 대한 일체감과 충성심을 약화시킨다. 그런 일이 의종 시절에 벌어졌다.

의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인종 시절에 벌어졌던 문제를 수습해야 했다. 그 문제는 이자겸의 반란과 같은 귀족사회의 분열, 그리고 묘청의 반란으로 인한 지역 갈등이었다. 전자는 국왕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후자는 지역과 지역, 그리고 중앙정부와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천둥이 쳤을 때 태후의 치마에 숨었다는 의종은 이런 갈등을 수습할 역량이 부족했다. 의종이 노력하긴 했지만, 그의 방식은 치졸하고 개인적이었다. 의종은 갈등 조정자로서의 역할보다는 개인적 힘과 권위 확보에만 치중했다.

의종은 궁궐을 지키는 금군을 강화하고, 환관을 고위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엘리트 문신들과 개인적 친분과 유대를 쌓으려 했다. 그가 벌였던 수많은 잔치는 문신들과의 유대감을 쌓는 길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떨어트리고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잔치와 놀이를 위한 행사 준비와 경치 좋은 곳에 짓는 정자 공사는 이에 동원된 군인과 백성의 원망을 샀다.


[사진2] 강감찬과 함께 거란군 격퇴를 한 강민첨 장군의 초상화다. 1788년 원본을 다시 옮겨 그렸다. 강민첨 역시 문과 출신자다. ⓒ국립중앙박물관


의종은 불안한 마음에 종교와 신비한 신앙에 매달렸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사찰을 돌아다녔고, 점치는 사람들의 말에 의존했다. 개인 재산 축적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왕의 측근이 된 엘리트 문신, 환관, 금군 장교들은 서로 충성 경쟁을 벌였다. 국왕은 충성의 대가로 벼슬과 물품을 내렸다. 당시 측근들이 국왕의 재산 축적과 공사 과정에서 챙길 수 있는 이익도 많았다. 기록을 보면, 내시(환관이 아닌 엘리트 문신) 두 팀이 국왕에게 진귀한 물품을 경쟁적으로 올리고 그 대가로 많은 백은(白銀)과 붉은 실을 받았다. 이때 한 팀이 민간에서 준마 5필을 빌려 바쳤다가, 갚지 못해 빚 독촉을 받았다고 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금군 장교들이 경쟁에서 밀려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 불만이 싹튼다. 환관과 문신들의 차별이 여기에 더해졌다. 그렇지만 이 불만이 행동으로 바뀐 결정적 이유는 금군이 지닌 무기 때문이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속성을 확인시켜준 것이 무신정변이었다. 그렇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불만에 가득 찬 군인과 평민들의 지지가 뒤따랐다.

이의민, 빈민 출신 스타 탄생

권력은 이를 유지할 플랜이 필요하다. 무신들은 처음부터 계획적이지 않았다. 보현원이란 사찰에서 일으킨 피바람은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수도 개경에서 성공하는 것은 별개 문제였다. 더구나 제거 목표 1위인 문신 김돈중은 도주하였고, 그가 개경 방위에 나서면 적은 병력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무신들은 일이 잘못되면 북쪽 오랑캐에게 투항하자는 방안을 즉석에서 내놓았다. 이들의 거사가 얼마나 비계획적인지를 보여준다.

수도 점령 뒤에도 이들은 회의를 통해 정권을 운영하였다. 장군들이 모이는 ‘중방’이 그 중심이었다. 거사 주동자들은 각각 병사들을 거느렸고, 중방은 ‘병사’라는 지분을 지닌 요즘의 이사회 같은 체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 투쟁이 이사회 내부에서 벌어진다. 행동대장 격인 이고, 이의방 사이의 갈등과 암살이 이어졌다. 권력의 정점에 서고 싶은 욕망은 과거의 동지를 적으로 바꾸었다. 처음 정중부는 승려를 시켜 이의방을 암살한 뒤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 역시 독점적 권력을 추구하다 죽임을 당한다.

이를 주도한 경대승은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정통 무신 가문 출신이지만, 얼마 후 병으로 사망하면서 새 권력자가 등장한다. 무신정변이 낳은 최고의 스타, 이의민이었다. 어머니가 노비였던 이의민은 경주의 깡패 출신이다. 그런 이의민이 출세한 이유는 ‘수박’이란 무예를 잘했기 때문이다. 하급 장교가 된 이의민은 무신정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경주에서 의종을 살해한 덕에 행동파 무신과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출세는 낮은 신분에서 수직 상승할 수 있다는 욕망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장교와 군인들은 벼슬을 요구하였고, 지방 수령과 같은 문관 직에도 진출했다. 지역사회는 동요하였고, 세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는 각 지역의 민란이었다. 민란 진압은 쉽지 않았고, 특히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은 1년 이상 시간을 끌었다.

천민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천민들은 ‘높은 벼슬아치가 천민에서 많이 생겼으니, 씨가 따로 없다’고 외쳤다. 더구나 지식인들은 과거 시험에 합격해도 벼슬자리가 없었다. 첫 벼슬에 15년 이상이 걸렸다. 시험에 합격한 천재 이규보는 농민반란 진압군에 종군했음에도, 정부는 벼슬자리 하나 주지 않았다.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였다. 이제는 능력과 성과보다 출세할 수 있는 인맥이 더 중요해졌다.

타협의 결과, 독재의 등장

들끓는 사회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겼다. 정변에서 살아남은 귀족과 상류층은 이런 혼란을 누군가 끝내주기를 원했다.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은 그런 임무에 적임자였다. 최충헌은 정통 무신 가문 출신에다 기존 전통을 존중할 줄 알았다. 특히 그는 문신 세력들과 협력하고 강력한 체제를 구축해야 이런 혼란이 끝난다고 보았다.

권력을 장악하자 최충헌이 올린 ‘봉사 10조’는 그와 문신 세력 간의 협력 결과였다. 이 개혁 방안의 시행 여부와 별도로, 최충헌은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며 이후 3대에 걸쳐 권력을 물려준 우리 역사상 특이한 인물이 됐다. 여기에는 당시 사회 혼란과 갈등을 해결할 절대 권력자의 출현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소망이 있었다. 이 과정은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길과 비슷했다. 민주체제가 작동하지 못할 때, 절대 권력이 탄생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