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논란, 전도된 가치관과 인식
교과서는 기본적인 사실을 정확히 서술하여 역사 지식을 제대로 학습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사실을 판단하거나 해석을 덧붙일 때도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학계의 공감대를 널리 확보한 내용이 반영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과서는 이런 기본 원칙을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왔다. 이렇게 함으로써 역사 공부를 통해 시대별 특징과 변화를 이해하여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민주시민으로서 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아가, 비록 역사 교과서이지만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과 품위 있는 표현을 통해 학생들이 우리 말글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도 당연한 것이다. 교과서를 검토할 때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지금 한 교과서가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2013년 8월 30일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불리는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가 검정을 최종 통과하여 내용이 알려지면서 학계는 물론 시민사회의 비판 여론이 높다. 무수한 오류와 편향, 왜곡에 친일 행위를 미화하고 독재자를 찬양하여 교과서로서 기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반면 그 집필자들은 나머지 모든 교과서들이 ‘좌편향’이며 친북(親北)・친공(親共)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라 소리를 높인다. 글쓴이의 역량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교과서란 무엇이며, 이런 논란의 연원이 어디 있고, 본질이 무엇인가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새로운 견해나 학설이 학계 일각의 주목을 받아 공감대를 넓혀 가더라도 그 내용이 교과서에 즉각 반영되지는 못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또 오래된 학설이 지닌 문제들이 지적되어 더 이상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해도 그를 대체할 다른 설명 방식이 학계에 널리 자리잡지 못하면 교과서 서술에 반영되기 어렵다. 이런 뜻으로 교과서를 ‘보수적’이라고 표현하여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보수성이 답답한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학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라든가 권력의 입김으로 서술이 금방 바뀔 우려를 덜어주는 기능도 한다. 역사적 사실은 후대인이 주관적으로 바꾸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활동 자체를 둘러싼 논쟁이 생겨날 때도 있다. 사실이라 추정할 정황만 있을 뿐 직접 증거가 없거나, 증거 자체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 드물게 이런 논쟁이 생겨난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늘 논쟁이 넘쳐난다. 역사를 설명하고 서술하는 것은, 단편적 사건과 사실로만 짧은 연표를 작성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실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연관된 많은 다른 사실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그래서 사실을 ‘서술’하려면 그 전체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역사가의 해석이 섞여 들어가기 마련이다.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교과서 서술은 학문적 토론과 다르다. 기초적인 사실을 담고 서술하면서 학계 다수의 공감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집필되어야 하고, 집필자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를 극도로 줄여야 한다. 이렇게 집필자의 과도한 평가와 해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교과서는 건조하고 재미없다는 핀잔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속도가 느리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과거 국정 교과서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국왕의 권력이 전제화되었다고 서술하였다. 통일신라=전제왕권이라는 것이 도식처럼 따라다녔고, 참고서에서도 통일 이후의 중요한 정치적 변화로 손꼽는 현상 중 하나가 전제왕권의 성립이었다. 이런 이해 방식은 1970년대까지 신라 정치사 연구의 성과를 반영한 결과였고, 학계의 광범위한 공감을 얻었기에 오래 동안 교과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학계에서는 오랜 학설에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 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원로 역사학자와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제법 격하게 논쟁이 오갔다. 물론 이 논쟁은 수년간 여러 논문들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을 실증적・논리적으로 논박하는 형식이었고, 언론과 권력에 기대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논쟁을 거치면서 신라 정치체제를 전제왕권이라는 용어로 담아내고 통일 이후의 변화를 전제왕권의 성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이해 방식에 입각하거나 전제왕권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연구자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교과서는 학계의 동향보다 매우 늦게 바뀌고 있다. 2010년에 검정 통과되어 이듬해부터 사용된『중학교 역사』 8종 교과서에서 통일신라 정치를 서술한 부분을 보면, 아직도 대부분 과거의 서술을 그대로 답습하여 전제왕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단 2종만 이 표현을 피하여 ‘강력한 왕권’ 등으로 서술을 달리했다. 관련 사실을 단지 서너 줄로 서술해야 하는 교과서에서 새로운 이해 방식이나 학계의 공감대 변화를 반영하여 새로운 서술을 시도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사상이 불교의 화엄사상이었다는 서술도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이해도 1970년대 이후 국정 교과서에 자리잡고 오래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화엄사상과 왕권을 관련짓는 이해 방식에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들면 불교사든 정치사든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과거의 이해가 무리한 것임을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고 학계의 공론장에서 토론된 결과였다. 그 결과 지금 대부분의 『중학교 역사』에서는 이런 서술이 사라졌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학문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공론을 거쳐 학계의 공감대를 넓힌 뒤에 교과서에 반영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통일신라 전제왕권설은 15년이 지나서야 부분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고, 화엄사상이 왕권을 뒷받침했다는 학설은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비슷한 경우를 하나 더 들자면, 신라 말의 선종이 호족을 뒷받침하는 사상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아마 40대 이후의 연령층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교과서에서 이렇게 배우고 시험 문제에 종종 나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선종 승려들과 화엄사상의 관계, 선종 승려들의 활동,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선종 사찰을 적극 후원한 사실 등이 실증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지금은 화엄사상=왕권, 선종사상=호족이라는 도식이 교과서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는 중이다. 교과서는 이렇게 보수적이다. 교과서는 필자가 자의적으로 개인적 판단과 희망, 호불호(好不好)를 표출하는 곳이 아니다.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그 중에서도 학계 전체의 공감대가 가장 큰 것을 반영하여 서술된다. 학계의 그 누구도 자기 학설이 반영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혹은 권력에 기대서 억지로 뭔가를 관철시키려 시도한 적이 없다. ‘학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범주에서는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과목들이 추가되면서 국정 교과서는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고 검인정 교과서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정부가 역사 교육을 일괄 관리하면서 관제(官製) 해석만을 가르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마 약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 흑백으로 인쇄되던 역사 교과서가 천연색으로 바뀌고 사진이 더욱 다채로워진 것도 두드러진 변화였다. 기존의 국정 교과서가 근현대사 특히 현대사를 거의 다루지 않고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던 것에 비하면, 『한국 근현대사』는 서술 분량 면에서 대폭 늘어난 내용을 담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1980년대 이래로 근현대사 연구가 크게 활기를 띠면서 매우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고, 이것이 교과서 서술을 내용면에서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일부 극단 세력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국정 교과서에 간략히 서술된 내용,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 아래 반복해서 되뇌이던 ‘선별된 기억’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이들이, 또 다른 기억이 ‘사실로 존재’한다는 점에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거부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그동안 축적해온 연구 논문이나 저서를 직접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다. 방대한 실증 연구에 비학문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어려웠고, ‘학문의 자유’라는 명분 앞에서 여론의 공감을 얻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오기 이전에 보수 언론이 학술서를 공격대상으로 삼은 적이 있었다. 『월간조선』이 1998년 11월호에서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던 최장집 교수의 저서 중 한국전쟁 관련 내용을 가지고 ‘사상공세’를 시도했다. 그러나 사법부는 “해당 내용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발행・판매 또는 배포해서는 안된다”고 최장집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이 논란은 양자의 어정쩡한 타협으로 결말이 났는데, 전문 연구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가 실패한 사례가 되었다. 이후 극단 세력의 불만은 교과서를 향해 종종 표출되었다.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은 2005년 초에 “우리의 미래세대는 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잘못 태어났고 성장에 장애를 겪고 있는 국가라고 배우고 있다”며 “근현대사와 관련된 각종 교과서를 분석・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교과서포럼을 결성했다. 그리고 2008년 초에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내놓았다. 이 책은 출간 직후 학계 다수의 비판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 경제가 성장하고 한국인이 근대 문명을 학습하여 국민국가를 세울 능력을 기른 기간이라는 안목을 깔고 있다는 점이 큰 논란이 되었다. 현대사를 보는 시각도 극히 편향되어 4・19혁명을 학생운동으로, 5・16쿠데타를 혁명이라 표현했다가 관련 단체들 및 여론의 격한 비난에 못이겨 수정하기도 했다. 식민지 근대화론, 친일 불가피론, 독재 필연론에 입각한 서술이라는 평을 들었으나, 그들 스스로는 ‘균형잡힌 역사교육의 첫 걸음’이라고 내세웠다. 2008년 이명박이 집권하자 교과서에 대한 공격은 더욱 드세졌다. 집권 초기에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겪은 집권세력은 젊은 세대가 정부 비판에 나선 배경을 ‘좌경화된 역사교육’에서 찾았다. 그리고 보수세력은 권력과 어우러져 근현대사 교과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 기획된(?) 듯한 방향으로 보수 언론이 함께 움직이는 가운데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경영자 단체까지 교과서가 ‘좌편향’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것이 금성출판사의 『한국 근현대사』였다. 그리하여 집필자와 함께 원로 학자가 국회에 출석하여 한나라당 의원 정두언으로부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좌편향되어 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좌편향의 근거로는 한국전쟁을 서술한 곳에서 북한의 남침을 명기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 거론되었다. 금성교과서에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고 쓰여 있었다. 급기야 교육부 장관이 2008년 10월 여러 군데 수정 지시를 내렸고 출판사는 필진 동의 없이 수정 출판을 강행했다. 그러자 필진은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인격권침해’ 소송을 제기하였고, 재판은 5년 여를 끌다가 2013년 4월 원고 패소로 결말이 났다. 교육부 장관의 수정 지시를 따른 출판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집권세력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제7차까지 5~7년 주기(週期)로 개정되던 교육과정을 2009년부터 수시로 부분 개정할 수 있도록 했고, 2011년 8월에는 초등 ‘사회’ 및 중학교 ‘역사’, 그리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사용되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자유민주주의’라는 낱말로 대체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꾸린 ‘역사교육과정개발 정책연구위원회’의 절대 다수가 반대의견을 냈지만 그대로 강행하자 위원들이 대거 사퇴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낱말 자체가 틀린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학문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 앞에는 어떤 수식어도 붙을 필요가 없다.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는 정부 개입이 배제된 자본주의 시장 메카니즘으로 자주 사용되며 사회민주주의와 대비할 때 곧잘 쓰인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사의 맥락에서 보면 이 낱말은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인권을 도외시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역사학계의 반대와 항의가 거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낱말은 결국 교과서에 자리잡았고, 이번 『고등학교 한국사』 검정과정에서도 ‘민주주의’라고만 쓰면 검정 탈락될 수 있다는 주의를 일부 필진이 받기도 했다.
창립한 지 불과 서너달이 안되고 학회지조차 없는 단체의 건의를 받아서 교육부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기에는 여러 분야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곤 했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낱말이 교과서에 정착된 과정도 학문적 논의를 거친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스스로 저버리고 권력에 기대어 완력(腕力)을 행사하듯 관철시킨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학은 권력과 거리를 두어야 하며, 더 나아가 권력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세속에 존재하는 어떤 권력이든 완전무결하지 않으므로 그에 가까워지면 객관성을 지키기 어렵고, 비판적 자세가 부족하면 정의(正義)로운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지 못하는 이들이 역사를 정리하고 제멋대로 해석한다면, 그 결과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0여 년간 보수세력이 거부감을 드러내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폐지되고 2014년부터 고등학교 과정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2012년부터 『고등학교 한국사』 검인정 교과서를 준비하여 2013년에 검정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현대사학회에서 교학사와 연결하여 집필한 책이 검정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2013년 5월에 알려졌다. 수년 전의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기억하던 이들의 우려가 나오는 한편, 엄격한 검정과정을 통과했다면 다른 교과서와 별 차이가 없으리라는 판단도 교차되었다. 교학사 교과서가 1차 검정을 통과한 뒤 5월 31일 한국현대사학회는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는 세미나에서 다시 한 번 기존 교과서를 공격하였다. 이 자리에서 “현행 한국사 교과서가 남로당의 박헌영식 사관을 답습하고 있다”는 발언이 나왔고, 보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이제는 솔직하게 밝힐 때가 됐다”며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이 공유하는 역사관”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등장했다. 지금 학계의 절대 다수 학자들이 그런 사관에 입각해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어서 8월 말에 최종 검정이 확정되고, 9월 6일에 공개된 교학사 교과서는 학계는 물론 시민사회의 폭발적인 비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언론은 쉴 새 없이 여러 오류와 왜곡들을 지적하였고, 여기에 야당까지 가세하여 사회적 관심이 유례없이 높아진 상황이 되었다. 2013년 9월 10일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등 4개 역사단체가 ‘뉴라이트 교과서 검토 설명회’를 연 자리에서는 거의 300군데에 달하는 오류, 과장, 왜곡, 축소, 누락, 심각한 편파해석이 지적되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4개 단체의 전문 학자들이 3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면밀하게 검토하기가 어려웠던 사정을 감안해도, 그 과정에서 수백 가지 지적사항이 나온 것을 일부만 추려서 담았을 뿐이다. 또 그동안 언론에서 지적된 것들 중 상당수를 뺀 것이 이 정도였다. 검토 자료집에서 빠진 것들은 사소한 오탈자, 학계에서 팽팽히 논쟁되는 것들을 부주의하게 단정하여 서술한 곳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정도만 해도 검정을 통과한 과정에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기 충분하였다. 교과서 검정 기준에는 “오탈자, 문법오류, 비문 등 표기・표현상의 오류가 없이 정확하게 기술하였는가?” 하는 항목이 있다. 이 하나만으로도 검정 통과되기 어려운 경우가 바로 교학사 교과서였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들, 통일되지 못한 여러 용어들의 혼재, 주어와 술어가 어색한 비문(非文), 그리고 무수한 오탈자들이 들어 있다. 물론 몇몇 소소한 오류들은 다른 교과서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대부터 현대에 걸쳐 이 책에서 발견된 오류들은 다른 교과서들과 양적으로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한 마디로 교과서라고 할 수 없는 수준으로서, 시대착오적 이념으로 짠 바구니에는 오류와 왜곡들이 넘쳐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이 책은 교과서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서술상의 형식적 균형조차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학생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기본 사실들을 더러 폐기하였다. 이미 널리 지적된 것이지만, 이 책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서술한 30여 쪽에서 이승만이 등장하는 곳은 12쪽이나 되며 이승만의 이름만 36회나 나온다. 그러나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의 이름은 8회밖에 나오지 않으며, 도산 안창호의 이름은 일제 강점기 서술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윤봉길 사진은 찾을 수없는 반면에 이승만 사진은 이곳저곳 5장이나 실려 있다. 이승만을 ‘국민적 영웅’이라고 한 것도 교과서에 걸맞는 표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인전과 교과서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학계 다수의 해석은 물론 국민 상식에도 어긋나는 그들만의 주관적 평가를 은연중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는 서술도 여럿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친일행위를 빼고 미화한다거나, 당시 모든 한국인이 부일협력(附日協力)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이해로 유도하는 서술들, 그리고 5・16쿠데타나 10월유신이 불가피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 서술들이 그렇다. 쿠데타 세력이 내건 공약을 실으면서 “우리 과업을 이루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다”(축약)는 구절은 뺐다. 쿠데타군이 지키지 않은 내용이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첫째 학계의 절대 다수 학자들이 스탈린 등으로부터 깊은 정신적 영향을 받을 정도로 어리석거나, 둘째 한국사를 연구해온 학자들에게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로 스탈린 등이 ‘위대한’ 사상가이거나, 셋째 그런 식으로 기존 교과서를 매도하는 이들의 판단이 정상적이지 못하거나 …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존의 학계가 ‘민중사관’에 입각해 있다는 공격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거의 30년 전에 잠깐 떠돌던 ‘민중사관’이라는 표현을 접하는 연구자들은 누구나 황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언(終焉)을 고했음은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에 선언되었지만 분단 현실을 안고 있는 한국 사회는 예외였다. 나는 교학사 교과서 필진의 ‘이념 강박증’, ‘공산주의에 대한 상상된 공포’에 이런 한국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사람을 간첩인지 다시 보자”는 식으로, 수십년 전의 시점에서 ‘시간이 멈춘 사고’ 속에서나 나올 수 있는 주장들이 횡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학사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공’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앞뒤 시기의 모든 역사가 판단되고 재단(裁斷)되고 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막았고, 그래서 그 이전의 모든 독립운동 중에서도 이승만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것이었으며, 집권 이후의 독재는 그것만으로도 덮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쿠데타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고, 유신 하에서의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 유린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는 식의 인식이다. 반공은 또 다른 영역으로 해석을 확장해간다. 공산주의를 막고 체제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필요했고 유신독재는 그를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성장을 논의할 때 당연히 따라야 할 ‘분배의 정의’는 안중에 없다. 이런 시각은 일제 강점기로까지 확장되어, 그 시기는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 역량이 길러지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훌륭한 기업가로 서술된 까닭이 여기에 있고, 독재정권의 반민주적 인권유린이 ‘자유민주주의’와 아무런 갈등없이 그들의 사고 속에서 병존할 수 있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오로지 반공이라는 잣대로 빚어진 가치관의 전도(顚倒)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고는 기존에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주장해오던 내용과 맥락을 함께 한다. 나는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십수년 동안 그들의 주장 속에서 인권, 민주주의, 복지, 휴머니즘이라는 표현을 보지 못했다. 인권은 오로지 북한을 이야기할 때만 등장할 뿐이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2012년 선거과정에서 국정원이 저지른 국기문란 범죄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반공에서 파생된 전도된 가치관 앞에서 법치주의와 인간애(人間愛)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 필진의 한 사람은 9월 11일 새누리당 초청 강연에서 “현재 학계의 60%, 교육계와 언론계의 70%, 예술계의 80%, 출판계의 90%, 연예계의 70%를 좌파 진영이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국회의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어느 정당인데, 그들이 ‘투표함 바뀌치기’로 당선되었다는 말인가.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는 ‘좌파’・‘좌빨(좌익 빨갱이)’・‘종북(從北)’이라는 낱말들이 횡행하고 있다.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이라면 단시간 그러려니 접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類似) 지식인들까지 여기에 가세하는 현실을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수년간 정치권과 극단 세력이 만들어낸 분위기 속에서 ’좌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상식을 갖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보편적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어처구니 없이 역설적이며 반휴머니즘, 반인륜적인 현실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런 상황이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게 되었다. 교학사 교과서에 흐르고 있는 가치관은 이명박 정권 이래 집권세력이 의도하는 방향과 궤를 나란히 하고 있다. 2007년 교육과정에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으로 제시된 내용에는 “민주시민의식을 기초로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2009년에 개정한 내용에서 ‘민주시민의식’이란 표현은 사라졌고 ‘배려와 나눔의 정신’이라는 표현이 새로 등장하였다. 집권세력이 민주시민의식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일까? ‘배려와 나눔’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경제성장 지상론자,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보편적 복지의 제도화를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빗대서 말하자면 성장을 통해 떡이 커지면 거기서 떨어지는 고물도 많아지므로 별도의 제도적 장치는 필요치 않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이런 생각은 “부자가 부자로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빈민이 최소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역사적인 경험이자 생태학적인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할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배제하고서 부자가 적선(積善)하듯 ‘나누는’ 것을 바탕에 깔고 생겨난 것이 ‘배려와 나눔’이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안목이 과거로 투영되기 마련이며,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은 현실을 파악하는 데 영향을 준다. 지금의 교학사 교과서 논란에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는 입장들이 교차되고 있으며,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들이 충돌하고 있다. 역사를 결과만으로 단정한다면 몰가치한 승자의 간악한 술수(術數)밖에 배울 것이 없다. 역사교육을 통해 과정을 사유(思惟)하면서 지조(志操)와 정의(正義)와 휴머니즘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평범한 진리가 위협받고 있다. 복지와 민주, 공존과 배려를 추구하며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맡아야 할 청소년들에게 역사를 통해 어떤 가치관을 교육할 것인가. 이성이 잠이 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질녘에 날개짓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이성적 판단이 극단 세력의 기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학문적 엄밀성과 객관성, 상식과 정의, 이성과 합리주의, 보편적 휴머니즘이라는 그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반사회적인 책이 공교육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게 될까 매우 걱정된다. * 이글은 『역사와 현실』89호(2013. 9. 30)에 시론(時論)으로 실린 것을 옮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