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광해, 왕이 된 남자 김성희 (중세2분과) ※ 이 글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관람기입니다. 잠시 연구자의 신을 벗어놓고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감상과, 벗어 놓은 신을 시시로 고쳐 신고 눈에 힘을 주어가며 영화를 분석한 느낌을 버무려 무겁지 않은 필치로 서술하고자 했습니다. 본문에 다소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세요(이 글은 영화 비평을 위해 영화의 공식 스틸컷을 저작권법에 맞게 인용하였습니다). <그림 1>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공식포스터 Devil in the Details 기쁘게 동행해준 그녀의 연연한 미소와 원고 집필의 부담이 동시에 신경을 자극하는 까닭에 공연히 심박이 상승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안절부절 갈피를 못 잡는 사이 슬쩍 암전이 되고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논쟁의 중심에 선 광해, 폭군과 성군의 페르소나를 양손에 나눠 쥔 한 배우. 냉혹한 정치꾼과 따뜻한 인군 사이의 넓은 괴리를 찰나의 눈빛, 짧은 숨소리만으로 오가는 이병헌의 연기를 보며 겨우 잦아들었던 심박이 다시금 상승합니다. ※극중에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하루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칠한 ‘진짜 왕’ 광해와 임금을 쏙 빼어 닮은 덕에 임금 대신 정적들 앞에 서게 된 훈훈한 ‘가짜 왕’ 하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두 배역은 이병헌이 홀로 감당합니다. 그것도 소름이 끼치리만치 훌륭하게 말이죠. <그림 2> 싸늘한 정치판의 냉기에 식어버린 광해군의 차가운 눈빛
잘 만들어진 상품, 하지만 정치에 참 관심이 많은 사람들. 정치는 ‘팔리는 아이템’입니다. 이 대중의 기호를 기민한 제작자들이 놓칠 리가 없을 터이니, 현실적 부담을 피해 가상의 정치판을 마음껏 벌여 놓을 수 있는 사극이 수시로 우리 곁을 찾아오는 이유를 짐작할 만합니다. 더구나 대선 삼파전이 점차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은 사극 프로모션의 최적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제작자는 자신이 만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소비자의 기호를 상품에 반영합니다. 이 기본 원칙에 충실할수록 더 훌륭한 제작자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사극이라는 상품에 역사가의 정론이 반영될 여지가 적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비자의 기호와 학계의 시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제작자는 하등의 망설임 없이 전자를 택하겠지요. 자기 상품을 팔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요즈음의 소비자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시는 분들,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분들에게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어중간한 줄타기가 수이 먹힐 리가 없습니다. 보다 훌륭한 제작자는 소비자의 지적 욕구를 충분히 그리고 공공연히 만족시켜줄 줄 아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영화 ‘광해’ 역시 당대의 첨예한 이슈였던 대동법, 명에 대한 원군 파병 문제 등을 극중 갈등 요소로 전면에 부각시키고 그 이슈의 본질을 예리하게 묘사합니다. 그 예리함이 대중의 눈높이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딱 적당히 잘 벼려진 덕에 그 날을 달구고 두드린 감독의 의중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이번에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광해’라는 잘 만들어진 상품에는 이와 같은 소비자 대중의 기호가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단순히 소비자의 지성을 자극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최후까지 논리적이지 않고, 그들의 충동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힘은 결코 지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독은 온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 모은 ‘광해’의 진정한 힘은 바로 스크린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그 무언가에서 연유합니다. 두 광해가 뿜어내는 눈부신 광채, 그리고 그림자 15살짜리 기미나인 사월이로 상징되는 민초들을 살갑게 보듬는 따스한 가짜 왕 하선의 모습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시대의 대중이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선의 천진한 미소는 수월하게 우리의 입가로 옮아오는 마력을 지닙니다. 반면 왕을 겹겹이 둘러싼 채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양반관료들의 모습을 보며, 즉위 전의 인간됨을 잃고 싸늘한 정치판의 논리에 잠식당한 광해의 냉혹한 눈빛을 읽으며, 우리는 현 시대의 정치판을 관망하며 느낀 분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이렇게 서서히 감성의 힘이 지성의 역량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하지만 감독은 여전히 고민합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과거에서 찾으려는 대중의 오랜 습관, 언제부터인가 ‘실용외교로 백성에게 은택을 입힌(澤民)’ 군주로 화려하게 부활한 광해군의 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훤히 드러내놓고 이 쫓겨난 왕의 복권에 방점을 찍기에는 그 부담이 적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마도 감독은 광해군을 둘러싼 논쟁의 깊이를, 그리고 그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관객을 매료시킬 신의 한 수를 찾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떤 영감이 그를 이끌었는지, 감독은 뇌쇄적인 왕의 여인 안개시의 손을 빌려, 아편이 인도하는 깊은 잠의 세계로 광해를 밀어 넣습니다. 그렇게 비워버린 왕의 자리에 왕과 꼭 닮은 광대 하선을 잡아다 앉히고는 그를 통해 대중이 원하는, 본인이 그리고 싶은 왕의 모습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 위함이었죠. 전란의 와중에 조정을 이끌며 열심히 백성을 보듬었지만 척박한 정치 환경 속에서 따사로운 빛을 잃어버린 광해의 광기어린 냉혹함은, 폭군으로 기록된 그의 공공연한 복권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택된 안전장치임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가짜 왕 하선이 뿜어내는 밝은 빛은 그 명백함을 가리고도 남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림자를 직시해야 이처럼 감독은 세밀한 극적 장치를 통해 논란의 인물 광해군을 다루는 데 수반되는 여러 가지 부담을 절묘하게 줄여 나갑니다. 하지만 그러한 묘수로도 광해군의 복권에 대한 자신의 미련을 완벽히 숨기지는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소를 잃어버린 광해군에 대한 연민에서인지, 미소로 가득찬 하선을 돋보이게 하려는 연유에서인지 당시의 조정을 둘러싼 정치 환경의 불합리함, 기득권 수호에 여념이 없는 양반 모리배들의 맨얼굴을 너무나 직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림 5> 광해군을 둘러싼 척박한 정치 환경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택민(澤民)의 군주’로 광해군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순간, 그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조정을 새롭게 채운 이들에게는 권력에 눈이 먼 ‘꼴통사대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간 조선 역시 곱지 않은 시선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 속 광해를 겁박하는 몰염치한 관료들의 얼굴에서 이와 같은 시선이 묻어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끈질긴 인과관계가 아득하게 얽혀 있는 곳이 바로 역사의 장이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이러한 역사를 다루는 문화 매체가 가진 강력한 힘을 염두에 두었을 때, 바로 이 지점이 광해군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 머무는 곳이자 영화 ‘광해’를 만든 추창민 감독이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하는 점에 생각이 가 닿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이 창조해낸 광채를 더욱 눈부시게 만드는 데 골몰한 나머지 그 밝은 빛이 드리우게 될 어두운 그림자에는 그에 합당한 관심을 할애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광해와 하선, 이 두 명의 왕이 발하는 강력한 빛에 매료되어 그 이면에 드리운 사뭇 짙은 그림자에 눈길을 보낼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은 비단 우리들만이 아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흑백논리에 치우치지 말아야 하며,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학자의 신실한 충고를 감독이 충실히 받아들였다면, 영화 ‘광해’는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기가 만든 상품을 팔기 위해 소비자의 기호에 철저히 부합해야 하는 제작자의 입장을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다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알고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우리는 번번이 지성의 역량을 압도하는 감성의 힘을 제어하고, 이성의 영역을 조금씩이나마 넓혀가기 위해서라도 그 그림자를 직시하려는 노력의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광해군을 중심으로 한 당대 정치 환경의 속성,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의 근저를 이루는 관념 체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선행될 때에야 비로소 광해를 두고 벌어지는 첨예한 논쟁의 맥락이 온전히 읽힐 것이요, 영화 ‘광해’의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뚫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잘 만들어진 영화를 평함에 있어 위와 같은 원론적인 잔소리로 마무리를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대신 이 시대를 고민하는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서, 21세기 한국 사회를 환히 비추는 밝은 빛의 강림을 기뻐하면서, 어떠한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 눈부신 효주 씨의 광채가 박제된 영상의 형태로나마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매우 기쁘게 생각함을 밝힙니다. 이 위대한 과업을 이룬 추창민 감독의 고된 노고에 기립박수를 보내면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감독님,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