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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괴물', 비켜가기와 대결하기

BoardLang.text_date 2012.09.26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유신공포40년 역사4단체 연합학술회의 기조강연



‘유신 괴물’, 비켜가기와 대결하기


이만열


  올해가 유신이 선포된 지 40주년이다. 40년이면 한 세대가 지났다. 고전적인 의미에서도 한 세대가 지나면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 객관적인 조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하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폭압적인 유신 체제, 정치적 탄압과 반인권․반민주의 행태를 공공연히 몰아온 유신 시대도 이제는 역사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냉엄하게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조명과 평가가 정치권에서보다는 학계에서 진행될 수 있다면 더 냉정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제와 오늘,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는 논제를 걸고 개최된‘유신헌법 공포 40년 역사4단체 연합심포지움’이 그런 역사적 소명에 잘 부응하는 것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림 1> 유신공포40년 역사4단체 연합학술회의,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 기조강연중의 이만열선생님

유신이 오늘의 시점에서 거론되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신은 지금도 우리 국민의 잠재의식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일생 동안 지우지 못하는 트라우마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개인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유신의 잔재는 여러 곳에서 세력화되어 있다. 유신 때에 크게 성장했던 재벌은 오늘날 정부 못지 않게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유신 때에 재벌과 함께 성장한 대형교회 또한 우리 국민의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다. 유신 때에 변질되어 거대 집단으로 성장한 언론공룡과 군부세력도 유신의 반면을 비춰주고 있다. 또 선거철을 맞아 유신세력을 업은 후보가 등장함으로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유신은 10.26 때 박 대통령의 사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앞에 거대한 세력집단으로 우리의 생활과 대결하고 있다. 유신을 학문적으로 점검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느닷없이 ‘대통령 비상조치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하여’ ‘약 2개월간의 현행 헌법의 일부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조항 효력 정지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서 수행하고,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는 것이며,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법질서를 정상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특별선언을 내세운 이유는 현행 헌법과 법령이 동서 양극체제하의 냉전시대에 만들어졌고 남북대화 같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고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특별선언이 뒷날 ‘유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일대 유신적 개혁’이라는 구절에 의해서다.


박정희 대통령은 ‘10·17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어서 계엄사령부는 포고 1호로 대학휴교, 신문·통신 사전검열제를 실시했다. 이렇게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아놓고, 이 조치의 정당성을 남북관계의 진전에서 찾으려는 듯, 11월 4일에는 남북이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도출해 내기도 했다. 11월 21일에는 ‘유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투표율 91.9%에 찬성 91.5%, 반대 7.6%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그 뒤 유신헌법에 따라 조직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그 해 12월 23일 제 8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선거인수 전원(2,359)이 투표한 가운데 무효표 2표를 제외한 2,357표가 박정희 대통령에 투표함으로써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투표결과로 소위 체육관선거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제 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취임하고 ‘유신헌법이’공포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바로 이날 북한도 최고인민회의 제 5기 1차회의에서 새로 채택한 ‘사회주의헌법’을 공포 발효시켰다는 것이다. 전문 11장 149조로 구성된 이 헌법은 주체사상이 전체인민의 지도적 사상임을 천명하고, 생산수단의 소유를 국가 및 협동단체의 소유로 규정, 개인소유를 더 이상 인정치 않음으로 북한이 사회주의체제임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이 사회주의헌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 헌법 개정의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이는 국가주석제를 도입하고 그 권한 강화를 슬쩍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절대권력을 보장한 유신헌법이 공포되는 바로 그 날, 북한에서 김일성의 초법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는 것은, 그 전에 유신헌법 제정사실을 사전에 북한에 알려주었고 북한도 그에 발맞춰 헌법을 개정했다면, 남북 수뇌부에서 남북관계를 그들의 정권강화를 위해 공모, 활용했다는 비판은 면치 못한다. 어느 법학자의 표현을 빌면 “한마디로 박정희․김일성의 독재강화를 위해 짜고친 고스톱이었던 것”(한인섭)이다.
유신정권 하에서 정치체제가 어땠다는 것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100%에 가까운 지지로 제왕적 지위의 종신집권을 보장해 주는 체육관대통령선거에, 국회의원 2/3를 차지할 수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법률을 개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거기에다 법관을 맘대로 임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쥐고 재판조차 거의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는데도 거기에 더하여 ‘헌법적 효력을 가진 특별조치’로서 긴급조치라는 일종의 초법적인 장치를 두었다는 것은 지적해야겠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한다는 국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치’가 법을 호령하면서 헌법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니 이건 법치국가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유신 7년 동안 9번의 긴급조치가 선포되었는데, 1, 4호의 경우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할 수 있게 했다. 1호가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나 개폐 발의, 비방을 금지하는 것이었고, 4호는 민청학련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혁당 사건’같은 ‘사법살인’이 주저없이 자행되었다. ‘인혁당 사건’은 지금까지도 지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임에 틀림없다. 법원 선고가 있은 지 18시간만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법살인’으로 사형이 집행되던 1975년 4월 9일, 그날은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유신체제는 이렇게 ‘국가폭력’까지 한국 사회에 안착시켰던 것이다.

유신체제는, 동서 냉전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종래의 헌법 체제가 남북대화 같은 것을 전혀 예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고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말하자면 ‘민족주체세력 형성의 일대 전기를 맞기 위해’(서중석) 내린 결단으로 포장했다. 때문에 중화학공업 때문에 혹은 북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애초의 설명에는 없다. 더러는 유신체제를 파시즘 체제로 규정하기도 하지만, 당시 독일이나 이태리 모양으로 아래로부터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대중을 동원하는 데에 성공적이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고(안병욱), 따라서 이를 뒷받침하는 파시즘 운동도 없었다. 이 체제 하에서 반공 반북 운동이 넘쳐난 것을 보면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체제가 필요했다는 초기의 주장도 헛구호였다(서중석).


따라서 유신체제에 대한 개념규정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뤄질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일제 강점기부터 성장한 반민족적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토양에서, 이승만 독재체제 때부터 강력하게 온존했고 군사정권 하에서 더욱 심화된 반민주 반인권적 세력이 국토분단과 민족상잔 이후 더욱 공고하게 반통일적 분단고착 세력으로 팽창해간 악랄한 파쇼체제요, 우리 민족사에 등장한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체제로 규정한다. 이 체제는 또한 세계의 냉전․양극 체제하에서 남북에서 도생(圖生)하던 분단세력이 세계의 데땅트 기류를 맞아 자기 생존의 위협을 느껴 급하게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기형적 구조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체제는 분단상황을 상대방에 대한 긴장수위를 높이는 지렛대로 삼아 이를 더욱 비민주적 반통일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갈 수 밖에 없었던 적대적 공생체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유신체제는 친일잔재 세력과 반민주 반인권 세력 및 반통일 반민족적 세력이 응집되어 이룩한 ‘복합괴물’이었던 셈이다.

유신에 대한 논란이 선거철을 맞아 정치권에서 먼저 부상하고 있다. 그게 바람직한 것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선거라는 바람에 휩쓸려들고 있다. 유신의 장본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서 한 때 유신시절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담당했던, 현 새누리당 대선 후보 박근혜의 등장이 이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회견을 통해 5.16과 유신에 대한 소신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접촉을 통해, 5·16쿠데타 및 유신체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듯하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식으로 발뺌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가 2007년에 표명했던 5.16과 유신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궁지에 몰렸을 때 나올 수밖에 없는, ‘유신괴물’ 비켜가기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

박 후보는 5.16쿠테타와 관련, 2007년에는 "구국의 혁명", 2012년에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언급하고 또 "공산당의 밥"이 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 일어난 혁명이라고 언급한다. 유신과 관련해서도, 그가 썼다는 1981년 10월 28일 일기의 한 대목인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 시대 상황과 혼란 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라는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공산당의 밥’ 운운하는 것 못지 않게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라고 한 대목이다. 그는 바로 그 흐리멍텅한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로 나서려고 한다. 그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요구하지 않은 채 그에게 표를 던지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인혁당 관련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의 이분법적 민주주의관은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그는 또 미국 워싱턴에서 가진 동포 언론 간담회에서 인혁당 관련 질문에서 “민주인사라는 분들에는 진정 민주화에 헌신한 분들과 민주화라는 탈을 쓴 친북좌파가 있다”(2007년 2월 14일)고 했고 또 대선후보 정책토론회에서는 민주화운동을 두 가지로 보고 “순수하게 우리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해서 사과드린다. 하지만 민주화세력의 탈을 쓰고 나라의 전복을 기도한 세력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2007년 6월 19일)고 함으로써 인혁당 희생자들을 민주화세력에서 제외하려는 발상을 그대로 노출했다. 법원 판결로 인혁당 사건이 무죄로 된 이 시점에서 그의 민주주의관은 어떤 수주늘 유지하고 있는 지 유권자들은 물어야 하고 알아야 한다.

그는 또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2005년 12월 7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짜맞추기식으로 수사됐고 판결 18시간 만에 전격적인 사형이 집행된 배경도 박 전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한,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의 발표를 "음모"라 했고 또 국정원 발표 다음 날 행해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에서 발표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이라고 반발했다. 최근에 그는 유신의 장본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옹호하면서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말로 기존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역사의 객관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그의 앞선 발언보다 유신을 더 적극적으로 옹호한 발언으로 평가된다. 특히 유신 시대의 대표적 공안사건이었던 인혁당 사건에 대한 사과문제가 등장했을 때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나”,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함으로써 유신에 대한 적극적 해결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필자는 박근혜 후보의, 역사에 미루자는 발언이 무책임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며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는 데는 그의 역사인식의 오류를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어떻게든 이 선거철의 소나기를 피하려는 전형적인 ‘비켜가기’태도라고 생각한다. 지도자가 될 사람은 역사를 통해 주어질 책임에 대해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유신과 관련, 박근혜 후보의 책임 여부를 두고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데 대해 필자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새누리당의 원내 대표 이한구 의원은 박근혜 후보에 대한 역사검증을 두고 "아버지에 대한 입장을 왜 그 딸이 계속해서 대답해야 하나? 그거 연좌제 아닌가?"라고 말했다. 5.16이나 유신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지 않고 그의 딸에게 묻는 것은 연좌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 사회에 오래동안 유지되어 온 연좌제가 온당치 않으며 그것은 개인의 인격권을 보호하는 민주사회에서 연좌제로 인한 불이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고 그 점에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저지른 유신의 만행에 대해서 그걸 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며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임면제는 그 딸이 아버지의 ‘유신’에 관여하지 않았거나 뒤에라도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유신’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박 후보가 유신시절 퍼스트 레이디의 위치 혹은 ‘유신공주’의 위치에 있으면서 유신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면,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가 있다. 이재오 의원의 말대로 "박 후보가 유신의 주체이지 않느냐"라고 한 비난에는 그런 근거가 있다고 본다. 기자회견 등에서 유신을 나름대로 소상하게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유신에 상당히 깊이 관여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랬다면 그는 연좌제로 면책될 수 없다고 본다.

거기에다 박 후보는 유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구나 유신의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은 연좌제와는 또 다른 의미의 책임론이다. 작금의 박 후보의 동향에는 유신 시대의 만행들에 대해서 때로는 회피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적극 옹호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서 그의 아버지의 유신 행위를 적극 옹호한다면, 그것은 그 책임을 공유하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괴물에 대한 책임은 박 후보 뿐만 아니라 유신을 옹호하는 정당이나 개인에게는 누구나 각각 그 책임이 주어진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한구 의원의 말과 같이,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좌제에 얽어매서 안된다는 논리는, 그 딸이 유신에 관여했거나 유신을 적극 옹호한다면 그것은 연좌제와는 다른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유신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자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연좌제로 그 딸에게 올가미씌워서는 안된다는 논리가 오히려 궁색해진다. ‘유신괴물’의 책임은 유신을 옹호하는 딸이나 정당 그리고 모든 개인 누구에게도 적극적으로 물어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천륜(天倫)과 사정(私情)을 떨쳐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결단이라고 생각된다. 보통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인으로 나설 분은 천륜과 사정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그걸 요구하고 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공인으로 나서는 것을 삼가야 한다. 만약 한 나라의 지도자로 나서겠다고 하는 분이 사정에 얽혀 공인적 판단을 주저하게 된다면 그는 한 사회의 지도자로 나서지 않아야 한다. 사정에 얽힌 그의 판단이 많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갈등을 부추기게 되고 나아가서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명박에게서 여실히 보고 있다. 지도자로 나서는 분이 한국현대사에서 일종의 국가폭력으로 표현되는 유신체제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와 관련되었다고 해서,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든가 그걸 변명하려 한다면, 민주주의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갈 자질에 시비가 생길 수 있다. 그 체제가 가졌던 비민주적 제도와 반인권적 작태, 목적을 위해서 과정의 악랄함을 호도한 그런 체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민주적 사회의 지도자로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렇게 보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망하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박 후보는 유신이 국가보위와 경제성장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상투적 언설을 아직도 용훼하고 있다. 그가 지도자로 시험받기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유신괴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기 아버지와 그 자신이 관여했던 유신체제에 대해서 냉엄하게 판단하고 선을 그어야 한다. 선을 긋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것이 지도자됨의 길일 터이다. 이것은 역사와 시대가 요청하는 명제다. 천륜과 사정에 얽혀 맺고 끊는 것을 명확하게 한 후에 지도자로 나서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것이 그에게서 ‘유신괴물’비켜가기를 극복하는 길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유신괴물’을 두려워하여 ‘비켜가기’했던 그런 비겁함에서 벗어나 ‘대결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대결하고 극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대결, 극복하는 길은 먼저 그걸 싸안아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난무했던 사법살인과 국가폭력은 우리의 역사에서 배제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픈 역사로 싸안고 그걸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대결하기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유신 40년은 그 괴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시간과 지혜의 여유를 준다.


우리는 먼저 5.16과 유신체제를 통해서 형성된 허상을 깨트리는 것을 주저치 말아야 한다. 그 허상 가운데 하나가 그 시기에 산업화를 이룩했다는 일종의 ‘신화(神話)’다. 그 시기에 보릿고개를 넘게 되었다든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후의 ‘청구권자금’으로 산업화의 일정한 기틀을 조성하게 되었다든가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볼 때 유신체제하의 국가폭력을 동원하고서도 그 정도의 산업화 정도밖에 이룩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능정권임을 나타내는 것 밖에는 다름 아닐 것이다. 당시에 희생된 많은 민주인사들과 근로자들의 희생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의 박정희식 산업화가 과연 내세울만한 것인지 냉엄하게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산업화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어떠하더라도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산업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깔아뭉갰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익을 박탈했으며 여차직하면 국가폭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경제성장을 위하는 길이면 민주화를 잠시 보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일종의 목적론적 환원주의를 이 땅에 심어 놓았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나라가 세계2차대전 후 독립한 국가로서 가장 먼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했다는 지적과 관련, 박정희식 산업화가 민주화를 견인한 것처럼 언설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다. 그들은 심지어 산업화가 민주화를 가능케 했다는 지적도 서슴치 않는다.

필자는 여기에 단연 반대한다. 한국에서 민주화와 산업화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굳이 그 선후를 따진다면 민주화가 산업화를 견인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식 산업화는 민주화를 누르고 인간을 기계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화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의지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적이고 자발성을 유도하는 것은 자유와 창의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것은 민주화를 통해 이룩된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민주화를 통해 확보되어간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이 산업화에 적용될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정권 하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다가 드디어 4.19로 폭발된 민주화가 자유와 창의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역사의 방향을 틀었기 때문에 산업화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었다. 민주화가 없이는 산업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공산주의체제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교훈이다. 러시아(쏘련)가 한 때 혁명의 열기-사실은 민주화 인간화의 열기-로 산업화의 기틀을 닦는 듯했지만, 그 사회를 뒤덮는 폭압적인 체제로 변질해 갔을 때 산업화는 후퇴하고 말았다. 남북의 비교에서도 그렇다. 산업화의 조건을 잘 갖춘 북한이 산업화에 뒤처지게 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민주화를 통한 자유와 창의성이 담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정이 가장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5.16과 유신 시기에 산업화의 기틀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4.19로 인한 민주화의 열기가 군사정권 하에서도 계속 분출되어 산업화를 견인해 갔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산업화는 민주화에 의해 선도되었다고 정리되어야 한다. 이런 역사의식이 유신괴물과 대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신적 토대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는 먼저 유신시대를 되돌아보면서 부채의식과 공범의식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부채의식은 바로 그 시기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 땅에 오늘과 같은 인권과 민주사회를 재래시킨 선각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이 점은 유신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의 중형선고에 9개월의 옥고를 치른 박형규 목사의 재심재판에서 밝힌 임은정 검사의 논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 몸을 불살라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면서 무죄를 내려 달라고 구형했다. 이러한 부채의식과 감사의 마음으로 유신을 바라봐야만 유신괴물에 대결하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채의식은 그들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권 민주화가 무임승차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일깨울 것이다. 또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채찍질할 것이다. 부채의식이 우리 세대를 향해 무임승차의식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다면, 오늘의 세대는 전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부채의식을 한 단계 승화시켜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를 향해 느낄 수 있는 부채의식의 자양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유신시대를 경험했던 우리는, 유신괴물에 맞서 싸운 이들을 향해 부채의식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공범의식과 통렬한 자괴감도 가져야 한다. 이런 통렬함이 없이는 유신괴물에 대결하기는 불가능하다. 유신괴물에 맞서지 못했다면 그것에 동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 적극적으로 동조했는가 않은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유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에 찬성 91.5%를 던진 것은 우리 모두가 유신괴물 탄생에 공범자였음을 명징하는 것이다. 공범의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유신괴물과 대결하기 위한 조치의 첫단추가 되어야 한다. 이 공범의식이 철저하지 못함으로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고 반역사적인 이 정권에 공범자로 지금도 끌려가고 있다. 만약에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걸 핑계로 오늘의 공범의식을 회피하고 자기합리화한다면 제 2, 제 3의 유신괴물은 이미 우리 속에서 자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철저한 부채의식과 그러면서도 통렬한 공범의식을 갖고 현재 우리가 무임승차하고 있지는 않는지, 철저한 자기반성을 반추하는 것이야말로 유신괴물에 대결하는 자세일 것이다.

유신괴물과 대결,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대한 정확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그 시대의 자료를 방대하게 수집 정리해야 한다. 오늘의 학술회의는 그 시발점에 서 있다고 본다. 유신체제 하에서 자행된 각종 인권유린과 부패를 밝히는 것은 일인독재체제가 얼마나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아울러 유신괴물 구축에 적극 협력했던 자들의 인명사전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이것은 최근 기간행된 친일인명사전의 사례에서 보여주었고 또 4대강사업인명사전의 기획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유신괴물을 대결 극복하는 데에 큰 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전의 편찬은 비단 유신체제에 적극 가담했던 이들에 대한 정리일 뿐 아니라 유신을 역사화하는 현 시점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와 관련, 우리는 여야 후보와 정당에 유신에 대한 태도를 물어야 한다. 이선거에서 유신에 직접 관여했고 그 뒤에 유신괴물을 적극 옹호하고 있는 후보가 나타난 만큼 다른 쟁점 못지 않게 유신에 대해서도 그 자세를 분명히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는 그 후보로 하여금 집권 후에 유신적인 사고로 통치에 나설 것인가, 아니면 이 시점에서라도 유신을 극복 대결하면서 새로운 민주사회를 이룩하겠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한 태도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박 후보가 끝까지 유신에 대한 종래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유권자는 박근혜를 후보로 내세운 새누리당에 대해 당과 후보가 유신에 대해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당과 후보의 견해가 다르다면 조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인지, 조율이 되지 않는다면 당과 후보의 유신관의 차이와 그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천명하여 유권자들의 선택에 혼선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유신관련 책임소재도 분명해질 것이다.

이 강연에서 박 후보에 대해서만 유신 관련 질문을 던져 편파성을 가진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필자의 의도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 강연이 아직 야당에서 후보선정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고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박 후보에게 질문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유신 당시 그가 퍼스트 레이디로 있어서 그 관련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고 그의 부친과의 관계 때문인지 그는 공개적으로 유신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달리 유신과 관련되어 회자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원고는 지난 2012년 9월 14일부터 15일까지 역사4단체(민족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 주관으로 개최된 ‘유신헌법 공포 40년 역사4단체 연합심포지움’에서 이만열 선생님이 발표하신 <역사가, ‘유신시대’를 評하다> 기조강연의 내용을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