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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삼림조합 사건

BoardLang.text_date 2010.07.04 작성자 최병택

단천삼림조합 사건


최병택(근대사분과)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져 식민지 조선 사회를 한동안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단천 삼림조합 사건’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제 경제 정책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일례로서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미치는 파장이 얼마나 컸던지 1930년 7월 이후 한동안 일본 언론들까지도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냈고, 도협의회가 열리는 곳마다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삼림조합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파트 같은 환금성 높은 부동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임야’ 문제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일제시대 당시 사람들에게 ‘임야’ 문제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중대 사안이었다. 취사·난방용 연료와 퇴비 재료, 각종 건축 용재가 모두 ‘임야’에서 공급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총독부가 임야에 어떤 정책을 적용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단천 사건’은 바로 그 임야정책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큰 폐악을 끼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30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는 긴급 뉴스로 다음 내용의 기사를 실어 보도한 바 있다.


<그림 1> 단천삼림조합에서 신탄(장작과 숯) 목재 벌채 단속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불평을 품어오던 하다면 연대(何多面 蓮臺里) 주민들은 조합 출장원 모씨와 일본인 모씨의 폭언에 격분하여 면사무소에 몰려가 항의하였는데, 면 직원들이 자전차를 집어던져 상해를 입히는 등 그 폭행이 너무 심하므로 이에 반항하야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면직원, 순사 등을 난타하는 등 참상이 벌어졌다. 이 때 군중은 만세를 외쳤는데, 주재소에서는 이를 본서에 알려 경찰 20여 명의 응원을 얻어 진압에 노력하던 중 오늘 아침 네 시부터 검속이 시작되어 40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남녀 수백명이 경찰서에 몰려와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면서 해산하지 아니하므로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단천군 삼림조합 직원들이 자기 산에 들어나 나무를 베는 농민들을 제지하고 폭언과 폭행을 가하자 주민들이 흥분하여 경찰과 마찰을 빚어 다수가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경찰이 시위 참가자를 검거하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경찰서를 방문하여 검거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들을 향해 순사들이 갑자기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고, 17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유혈 참상이 벌어진 것이다.

삼림조합은 조선임야조사사업(1917~1924) 직후 각 군이 해당 지역의 산주들을 모아 만든 조직으로서, 사실상 강제 가입을 원칙으로 하는 관제 조직이었다. 일제시대 초기에 각지에서는 지방관이나 지역유지들이 산림녹화를 주창하며 산림조합, 조림조합, 삼림보호조합 등을 만들어 입산에 관한 공동규약을 제정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선총독부는 조선임야조사사업이 끝난 직후에 군청의 하부 조직으로 삼림조합을 만들고 기존의 수많은 산림 관련 조합을 모두 이에 통합시켰다.

삼림조합은 그 설립 직후부터 조합원에게 산불 방지 활동, 송충이 구제, 벌채 제한, 묘목 구입과 식수 등의 각종 의무를 부과했다. 이들 여러 사업 가운데 삼림조합이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은 산주들이 그 사유지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임목벌채지도’라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산림 녹화를 중요한 정책의 하나로 정하고, 이를 관철시킨다는 명분에서 아예 임야 소유자들의 입산을 금지해 버렸다. 그 무렵 일제는 각 도 단위로 ‘사유림벌채취체규칙’을 발포하여 임야 소유자들의 벌채 행위를 엄금하였다. 삼림조합은 바로 ‘사유림벌채취체규칙’에 실린 각종 금지 규정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조직이었다.

임야는 숯과 장작의 생산처일 뿐만 아니라 모내기 전 논바닥에 뿌려야 하는 ‘바닥풀’의 공급지이기도 하다. 임야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취사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고,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 때문에 ‘임목벌채지도’가 시행된 후 국내 어느 곳에서든지 농민들은 땔감과 퇴비 재료를 구하는 데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일제는 잔가지와 낙엽 정도는 입산 지정일에 채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입산 지정일이라고 하더라고 산주가 마음대로 자기 임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산 전에 반드시 입산료와 벌채 감독 요금 그리고 삼림조합비를 납부해야 했다. 임야소유자가 만일 각종 부과금을 납부하지 않거나 지정 시일이 아닌 때에 입산하면 그는 곧바로 ‘삼림범죄자’가 되어 삼림조합 직원, 경찰에 의해 구속되거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삼림조합의 악폐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산림을 녹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합원들에게 묘목을 강매하고, ‘개량 온돌’이라는 것을 강제로 판매하기도 했다. 또 송충이구제를 명목으로 부역을 부과해 농민들을 괴롭혔다.

이렇게 무리하게 식목을 독려했지만 군청 직원과 결탁한 묘포주들이 불량 묘목을 공급했기 때문에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모조리 다 죽어버렸다. 일제시대 당시에는 이처럼 관과 밀착한 일본인들의 부정부패가 꽤 만연해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삼림조합은 그 소속 조합원에게 소유지 면적에 따라 자체적으로 책정한 조합비를 청구하였는데, 금액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1정보당 4전부터 50전까지 천차만별이었다.  1930년대를 기준으로 할 때 쌀 한가미의 가격이 15~20원 정도였고 도시 월급쟁이가 매달 10원 이상은 벌었다고 하니 조합비 부담이 절대액으로 보자면 그다지 높았다고 할 수 없겠다. 그러나 무슨 무슨 ‘검사료’라든지 ‘임산할’ 등등 그 의미도 알 수 없는 부과금이 잡다하고, 그 액수도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를 합친다면 의외로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은 대부분 군청 직원에게 줄 급여나 사무비로 전용되었다. 사실 조합비나 조합에서 거두어들이는 잡다한 부과금은 조세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세금은 왜 그리 많은지 지세나 호세만 물고 말았으면 살 것 같은데  수리조합비, 삼림조합비, 농회비... 대체 정신을 차려 그 이름조차 기억할 수가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니 무슨 재주로 배겨낼 것이냐”라고 푸념할 정도였다.

일제의 임야 정책은 이렇듯 매우 불합리했다. 삼림조합의 본색을 알아차린 한국인들은 “삼림조합이 조직된 이후 삼림의 상태가 조합이 없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이냐”며 논박하고, “삼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기수의 월급을 지급하는 군 직원의 직업 기관”에 불과하다며 일침을 놓았다.

삼림조합에 이와 같은 불만이 함경남도 단천에서 유혈 항쟁의 형태로 터져나왔던 것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삼림조합비와 각종 명목의 부과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법령대로라면 겨울철 장작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장작 없이는 겨울을 도저히 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주민들의 상당수는 입산금지 조치를 어기고 장작을 구하러 산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삼림조합 직원과 경찰이 달려와 손찌검을 하며 갖은 욕설을 퍼붓더니 항의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질까지 한 것이다.

이 사건 직후 일제는 사태의 추이를 매우 민감히 주시했다. 조선인 언론 기관들은 관련 기사를 일체 싣지 못했지만 일본인 언론들은 연일 이 사건의 추이를 보도하며, 사건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단천 인근에서는 이 사건이 비교적 빨리 알려졌기 때문에 사건 직후부터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퍼지기 시작했다. 원산·청진 같은 곳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고, 서울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격문이 나붙었다. 함경남도 풍산군에서는 무장 독립군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들을 잡아다가 ‘단천 사건’의 진상을 심문하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삼림조합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이 정도였으니 한국인들이 이 조직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쉽사리 짐작할 만하다.

‘단천 사건’은 일제 지배 정책의 모순을 명확히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조선총독부의 궁극적인 정책 목표가 조선의 ‘문명화’를 달성하는 데에 있다고 선전했다. 산업을 개발하고 한국의 경제를 ‘근대화’시키는 데에 주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삼림조합을 통한 녹화사업도 그러한 소위 ‘문명화’ 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정책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이야말로 ‘문명화’ 정책을 통해 산림 녹화 등 ‘공공 이익’을 달성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공의 이익’을 외치던 일제는 임야 소유자들에게 아무런 권리와 이익을 주지 않은 채 오직 희생만을 강요했다.

일제의 악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공공의 이익’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근대화’ 혹은 ‘공공의 이익’라는 구호 속에 힘없는 자들이 소외되지는 않는가? 일제의 폭정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문제들을 고심해 볼 필요를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