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세상읽기

작전통제권 반환, 핵개발, 그리고 노무현

BoardLang.text_date 2009.07.09 작성자 박태균
【시론】

작전통제권 반환, 핵개발, 그리고 노무현


박태균(현대사 분과)


1. 한나라당에 의해 제기된 핵 주권 문제

한나라당은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을 계기로 해서 핵 개발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와야 한다는 문제를 이슈화하였다. 한국의 핵 개발이 미국에 의해서 제약되어 있다는 점은 소설『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문제가 1970년대 한미 간의 갈등의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였다는 점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당에서 이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 소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분위기를 되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한나라당이 이러한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드디어 한국의 보수 우익 정당이 ‘제자리’를 찾는 것인가?


  한국의 ‘보수’ ‘우익’은 ‘보수’ ‘우익’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정한 보수우익의 두 가지 징표는 민족주의와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도쿄 시장인 이시하라는 보수우익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우익을 대표한다는 한나라당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기준에도 부합되지 못했다.

  스스로 민족주의의 이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미국에 지극히 의존적이었으며, 시장경제를 주장하면서도 박정희식 모델에 매달렸다. 한나라당은 한미동맹과 민족주의, 시장경제와 박정희식 모델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헤맸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핵 개발의 주권을 주장했다는 것은 한나라당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한나라당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의 분석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주장에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핵 개발의 자주권이라는 주장이 전시 작전통제권 반환에 대한 반대와 서로 모순이라는 점이다. 자주적인 안보태세를 갖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한나라당이 존경해마지 않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다.



그러니 주한미군이 갖고 있는 전시 작전통제권의 반환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 핵 개발의 자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상호 모순된 주장이다. 또한 북한이 제2차 핵실험을 한 이후 대한민국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이다.


  한국군에 대한 모든 작전통제권이 한국 정부 하에 들어가면서 동시에 핵 개발의 자주성을 찾아야 하고, 이에 따라 미국의 핵우산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맥상통하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주장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핵 개발에서의 자주권을 회복하자는 주장이 국면 전환용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궁화꽃은 피었습니다’ 신드롬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문제

  둘째로 미국 정부가 왜 한국의 핵 개발을 제한하고자 했는가를 유념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주장은 북이 핵 실험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핵 개발이 그 대응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1945년 한미관계가 본격화된 이후 미국은 단 한 번도 한국의 핵무장을 고려한 적이 없었다. 가장 가능성이 있었던 시기는 1964년 중국이 핵 개발에 성공했을 때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미국은 한국보다는 일본에 핵개발을 타진했다.

  역사상 유일하게 핵 피해국가인 일본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타진하기 위해 큐슈의 사세보항에 핵 항모를 정박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일본의 안보투쟁은 일본의 핵 무장을 무산시켰다.

  한미상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56년 간 한국에 의한 핵 무장은 아예 논의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는 문제에 모든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 이전 주한미군의 감축을 고려하고 있었던 미국은 주한미군의 감축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반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다.

  즉, 베트남에 더 많은 군대를 파병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필요한데, 만약 한국에 너무 적은 숫자의 미군이 주둔할 경우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다지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장악에 매달렸던 것일까? 이는 미국이 경험했던 한국과의 마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경험은 1953년의 반공포로 석방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중조연합군과 정전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정전협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조항은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조항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년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유엔군과 중조연합군이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포로문제는 1953년에 들어 극적으로 타결을 보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하는 것만 남긴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 측에서도 이미 반공포로 석방을 심리전적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반공포로 석방이 미국의 전략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정전협정 조인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한국군을 유엔군의 작전통제권으로부터 이탈시켰고, 이로 인해 정전협정 조인이 다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쟁의 종전을 공약으로 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정책이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군만으로라도 단독으로 북진하겠다’는 주장에 의해 무효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여 일을 수습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상비계획(Ever-ready plan)을 입안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임의로 이용할 경우에 그를 권좌에서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입안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1960년대 후반에 또 한 번 불거졌다. 1966년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파병한 이후 남북 간의 충돌이 급격히 증가했다. 1967년 1년 동안 일어난 남북 간의 충돌은 400 건이 넘었으며, 이는 전년에 비해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1966년 10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고 있을 때 남북 간의 충돌로 6명의 유엔군과 카튜사 한 병이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조사 결과 이 사건은 한국군의 도발에 대한 북한군의 보복으로 드러났고, 주한미국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은 이에 대해 한국정부에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태도는 완고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도발은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격적 보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에 의한 선제(preemptive) 타격의 가능성에 있었다. 명분은 북한의 공격적 전술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한반도에서 안보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안보위기의 고조는 결국 1968년의 안보위기로 연결되었다.

  푸에블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방한했던 사이러스 밴스 특사의 주 임무는 한국군으로 하여금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미국과 북한 사이의 협상에 협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한국 정부를 소외한 채 진행된 푸에블로 호 협상에 대해 한국 정부의 불만을 진정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보복을 명분으로 해서 한국이 북한을 공격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베트남 전선 이외의 다른 전선의 확대를 막아야 했고,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한국은 항상 피해자여야만 했다’.
3. 북한의 핵 개발, 그리고 북한의 착각

  결국 주한미군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한반도에 주둔했다. 하나는 북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통제함으로써 한국 정부에 의한 도발을 막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부가 아니었고, 이로 인해 전쟁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처럼 전적으로 미국에 협조적이거나 사회적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정부였다면, 굳이 작전통제권을 통제하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핵 개발을 막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점은 핵 개발을 통제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한국 정부가 언제 어떻게 핵을 사용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한국군이 핵을 보유했을 때 미국으로서는 한국 정부의 핵 사용을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핵을 개발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결국 남과 북의 핵무장은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작전 통제권을 돌려주려고 하는가? 미국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미국 내 사정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해외 주둔 미군의 비용을 감축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주한미군을 감축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 GPR을 통해서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실행했던 계획이다. 주한미군이 감축되면 한미연합사를 유지하기 어려우며, 이 경우 잘못하면 주한미군이 한국군에 의해 통제를 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요한 조건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사회적 여론에서 벗어나 독단적으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은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일련의 조치가 민주주의를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촛불시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한국사회는 결코 민주주의의 후퇴를 좌시하지 않고 있다. 아울러 북한의 경제적인 몰락으로 인해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에 비해 압도적이라는 것도 주한미군 감축 및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에 따른 작전통제권 반환의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진영

그렇다면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은 점차 그 강도가 엷어지고 있다. 주한미군은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전략적 유연성) 그리고 한국군과 미군이 서로 다른 작전지휘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미동맹이 과거와 달리 변화하고 있는 시기에 북한은 왜 핵개발을 더 가속화하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핵을 개발할 필요성이 점점 더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보수 진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햇볕정책 때문일까?


  북한의 핵 개발이 햇볕정책 때문이라는 것은 몰역사적 주장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으며, 1958년부터 1992년 이전까지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1993년 이후 더 심각해 진 것은 소련의 공산정권이 붕괴한 이후 미국의 핵 우산에 대응할 수 있는 또 다른 핵 우산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1992년 이후 남한에서 미국의 핵무기가 사라졌지만, 미국의 핵우산에 대응할 다른 핵우산이 없어진 북한으로서는 안보를 위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한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세계적 차원에서 공산주의권 붕괴 이후 가속화된 것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핵을 개발했을 것이다. 자국민의 생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정부라고 한다면 햇볕정책으로 인한 돈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핵을 개발했을 것이다.

  중국 변수 역시 북한이 핵을 개발하도록 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다. 표면적으로 중국과 북한은 지금도 공고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양국 사이에 특사가 파견되며, 한중 관계보다 한 차원 높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관계를 정상화했고, 현재 중국의 한국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가 되어 있다. 중국 역시 북한에게 결정적인 우산을 제공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1990년을 전후한 세계 정세의 변화는 북한이 핵을 개발할 수 있는 조건과 명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시점에서 북한은 핵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을까? 오바마 행정부 수립으로 북한의 안보 상황이 더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 악화 만으로 핵 개발의 가속화를 이해할 수는 없다. 아니면 일부 북한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핵 카드는 대외용이 아니고 대내용인가?

  누가 알겠는가? 모든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북한이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했던 부시행정부의 착오가 지금에 있어서 북한에게 착시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 북한의 제1차 핵 실험 이후 부시 행정부는 대북정책을 100% 전환했다. 많은 네오콘들이 낙마했으며, 부시 행정부는 전격적으로 6자 회담에 임했고, 이를 통해 2.13 합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미국의 전격적인 정책 변화가 북한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면 전환을 위해서는 충격을 줘야 한다는. 물론 이 메시지는 1968년 푸에블로 호 사건 때에도 동일하게 전달됐었다.



그러나 북한이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북한의 핵 개발은 일본의 핵 무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일본 내에서 극우 정치인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이는 북한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그리고 핵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나라당이 최근 주장했던 한국의 핵 자주권 문제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이 핵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실행한다면 일본은 바로 핵무장화에 들어갈 것이다.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제 남북관계의 파탄을 통해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고조시키는 것도 모자라 동북아 전체를 전쟁의 위기로 몰아가려고 하는가?
4. 그리고 6.15와 10.4

  여기에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이 다른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북한 지도부의 ‘착각’이다. 1945년 이후 북한의 지도부는 항상 남한의 민주화를 지지한다고 주장해 왔다. 남한의 주류를 비난하고, 미국의 개입을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남한에서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은 남한 혁명을 위한 ‘기지’이기도 했고, 이를 지원하는 ‘전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넓게는 북한의 대외정책, 좁게는 대남정책이 남한의 민주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북한은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적지 않게 했다. 북한의 행위나 정책들은 남한의 독재정권이나 보수세력들의 힘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청와대 습격 사건’, ‘김현희 사건’, 그리고 ‘북풍 사건’이라는 예를 들지 않아도 이러한 예는 적지 않다.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너희들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간다는 자세라고나 할까?

  북한의 지도부는 아직도 남한에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킬 때도 남한에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다고 착각하면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남한에서 수십만이 봉기할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말했던 박헌영의 생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이러한 자세는 6자회담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노무현 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던 북한의 자세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초기 미국을 방문했을 때 했던 말에 너무 실망했기 때문일까? 북미 관계를 중재하려는 노무현 정부의 노력은 북한의 닫힌 자세로 말미암아 항상 암초에 부딪혔다. 그리고 결국 미사일과 핵 실험을 강행함으로써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를 풀어보려고 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지도부가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에 핵실험을 강행하도록 결정한 것도 또 다른 형태의 화답이었을까? 어쩌면 너무 우리 입장에서 남의 나라 정책을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더 이상 북한 지도부들은 남한 사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북한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말하면 된다.

  진정 북한이 6.15와 10.4를 지키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대화를 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특히 지금의 국제정세는 북한을 대화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