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노풍(Post盧風)과 살아남은 자의 몫
임대식(현대사 분과)
1.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서꼭 1년 전, 6월 10일 촛불시위 현장에서 원고를 청탁받고 이 지면에 당시의 감상을 남긴 적이 있다. 영결식을 치른 이틀 후, 같은 편집자로부터 원고를 청탁받고 글쓰기를 망설였다. 지금도 약속된 기일을 넘기며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전대미문의 사태에 압도되어 감정이 앞 설 우려가 있다. 감정의 진솔한 토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억지로 위안해 본다. 망설임의 또 하나의 이유는 ‘서거국면’이 중대하고 또 한창 진행중이라는 점이다. 제일 큰 변수인 이명박 정권의 반응을 원고를 넘기는 시점까지 예의 주시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심지어 한나라당내에서도 대국민사과, 인적쇄신, 국정운영기조변화, 제2의 6.29선언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명박대통령이 이러한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 같다. 그제(6월 3일)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청와대 관계자는 ‘1700여명에 겨우 124명’이란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장례식 이후 며칠 동안의 보수신문 논조를 살피며 권력의 대응 기조를 대충 감지할 수 있다.<사진 1>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출처: 오마이뉴스 )현 상황과 정권의 지난 행태를 고려할 때 이명박정권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촛불시위 당시에는 대국민사과라도 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번 서거국면에서는 그런 제스쳐조차 취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촛불시위가 소통의 부재탓이라고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노무현의 죽음에 무슨 논리를 동원할 수 있을까. 우회로도 퇴로도 없어 보인다. 밀리면 죽는다는 위기의식만 팽배하다. 작년 촛불국면 이래의 일관된 강경 추세를 유지하면서, 북핵위기국면을 활용하며 집토끼라도 확실히 잡으려 할 것이다. 남쪽의 이명박과 북쪽의 김정일은 둘 다 궁지에 몰린 쥐의 처지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 있다. 아찔할 뿐이다. 민생고와 민심이반은 임계치에 달했지만 반MB진영은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한편 이명박정권은 퇴로가 없고, 주류언론은 이미 정치권력과 운명공동체로 전락했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계급적 지역적 기반도 마련되어 있다.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내의 선상반란 가능성이 약간 남아 있지만 공멸의 위기감 때문에 제한적일 것이다. 적어도 올해 10월의 보선과 내년 6월의 지자제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지 않는 한, 가끔은 격렬한 대치가 존재하지만 지리한 교착국면이 전개되리라는 우울한 전망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럽지만 가슴 떨리는 꿈꾸기를 다시 시작했다.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만들던 그날들의 꿈을 떠올리게 된다. 꿈도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망설임을 물리치고 이글을 쓴다.2. 시대의 죽음들과 ‘포스트(Post)노풍’2009년 5월 23일 인간 노무현은 죽었다. 그날 이래 생각은 흩어지고 종내 맴도는 의문들만 가득하다. ‘포괄적뇌물죄’ 혐의로 검찰에 소환조사 받고 기소를 앞둔 부패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수백만명이 조문했다. 조문 규모와 눈물량이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을까?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나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이 모순되고 기이한 역사적 장면을 도대체 이해할 수 있을까?<사진 2>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서울시청앞 서울광장
(출처: 오마이뉴스 )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의 죽음과 애도 물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 장엄한 애도 행렬을 바라보며 자기(이명박)의 죽음에 찐한 눈물 흘려줄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 생각해 보았을까?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말을 떠올렸을까? 자신의 퇴임 후, 노무현처럼 검찰에 난도질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영결식이 있던 5월 29일 역사적 그날, 대법정에서는 삼성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또 하나의 역사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과연 노무현이 삼성 돈을 받았다면 검찰이 수사 착수나 할 수 있었을까?
후세의 역사서들은 이 기이한 역사적 국면을 어떻게 기록하고 명명할까? 김구, 조봉암, 김주열, 전태일, 윤상원,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 등등과 여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는 용산참사 주검들과 박종태가 떠오른다. 진폭이 큰 굴곡과 격동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에서 이러한 비극적인 ‘시대적 죽음’이 유달리 많았다. 그 반열에 노무현의 죽음이 올려졌다. 그들의 비극적 죽음에 직면하여 동시대인들은 슬퍼하고 분노했으며 혁명적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편 그들의 죽음에 원죄의식을 가졌다. 식민, 반공, 성장, 독재, 등의 배타적 폭력적 지배하에서 그 원죄의식은 깊고 넓게 잠재되어 있었고, 가끔 엄청난 에네르기로 폭발했다. 그 폭발의 지점에는 어김없이 죽음들이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한국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노무현의 죽음은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21세기 이땅의 사람들은 노무현과 그의 죽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신군부정권에게 광주의 피가 잔인한 업보였듯이 이명박정권에게 노무현의 피는 잔인한 업보가 될 것이다. 여느 시골 마을 봉하는 경상도의 망월동이 될 것이다. 바보 노무현이 상징하는 소중한 가치들이 실현되는 그날까지, 적어도 이명박정권이 다하는 날까지 봉하마을로 향하는 발길은 이어질 것이다.
망월동에 이름 모르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면, 봉하마을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전직대통령이자 바보 노무현이 잠들어 있다. ‘상록수’와 ‘작은 연인들’ 노래 소리만 들려도, 그리고 노란색만 보아도 어떤 이들은 울컥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사진 3> 봉하마을 야경(출처: 오마이뉴스 ) 노무현은 이미 노사모와 그 측근들을 넘어 국민적 영웅이 되고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어 갈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의 전범이 될 것이다. 주요한 가치들의 상징이 될 것이다. 노무현신화는 이미 창조되기 시작했다.
서점가에서는 노무현관련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출판사들은 발빠르게 노무현서적을 급조하고 있다고 한다. 신화는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만들어진 신화는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노무현신화는 서거 후폭풍에 힙입어 창조되기 시작했다. 그 후폭풍을 편의상 '사후(死後) 노풍'이라는 의미에서 '포스트(Post) 노풍'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사전(死前) 노풍’은 크게 두차례 있었다. 제1노풍은 그를 대통령 후보와 대통령으로 만드는 기적을 연출했고, 제2노풍은 탄핵에서 그를 구했고 열린우리당을 과반수 이상의 다수당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제3의 노풍 즉 ‘포스트 노풍’이 몰아쳤다.<사진 4> 2002년 대선 광고(출처: 오마이뉴스 )3. 노무현 신화의 창조 노무현에게는 노무현신화가 창조될 만한 과거와 소질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 불렀다. 그런데 끝내 바보 된 쪽은 노무현이 아니라 그를 바보라고 조롱한 이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노무현은 전투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대세를 가르는 판가리 전쟁에서는 여러번 승리했다. 그와 맞붙어 치명적 타격을 받은 이름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바보의 마법에 걸린 듯이 스스로 자기무덤을 팠다. 그렇게 몇 번 당하더니 노무현이 말만 하면 거기에 어떤 복선과 함정이 있는지 의심했고 반사적으로 반대부터 했다.
노무현은 그 유명한 ‘검사와의 대화’에서 ‘나는 검찰상층부를 믿지 않습니다’ ‘막하자는 거지요’라고 심하게 말했을 뿐 끝내 검찰개혁을 위해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검찰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며 토론으로 설복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했다.<사진 5> ‘평검사와의 대화’ (출처: 오마이뉴스 )노무현정권 말에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가 소위 떡검으로 지목되었을 적 일도 떠오른다. 검찰은 결코 스스로 개혁할 수 없으므로, 그 때가 검찰을 개혁할 마지막 그리고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떡검이 바로 검찰의 하나회에 해당하니, 임채진 내정을 철회하고 떡검을 검찰요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영삼이 정치군인 하나회를 과감하게 척결했듯이, 정치검찰 자본검찰을 척결할 기회로 활용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무죄추정원칙을 내세우며 그리하지 않았다. 결국 노무현은 풀어먹인 그 검찰에게 당했고 죽었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해 오랜 검찰과의 대결에서 반전을 예고하고 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이루지 못했던 검찰개혁을 ‘포스트노풍’이 강제하게 될 것이다.
이는 조중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노무현은 권언유착의 폐해를 명분으로 언론과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조중동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시종일관 조롱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편법으로 언론에 보복하지 않았다. 그 긴장과 대결 과정에서 노무현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지만 조중동도 심한 내상을 입었다.
조중동의 위신과 영향력은 추락해 갔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그 추락 추세는 가속화되었다. 조중동은 위신추락과 방송 진출 문제에 직면하여 이명박정권과 운명공동체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중동은 노무현 죽이기에 공조했다. 그러나 조중동은 ‘포스트노풍’에 몸사리며 구차하게 오십보백보론을 펼쳐야하는 수세적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 실체는 적나라하게 폭로되었고, 조중동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신문의 방송진출을 허용하는 미디어관련법 통과도 불투명해졌다. 민주당은 미디어관련법 처리 약속을 이미 파기 선언했다. 6월 국회에서 미디어관련법 통과 여부가 ‘포스트노풍’의 진로에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전형적인 노무현식 싸움 방식이다. 노무현은 죽음으로써 생전에 못다 이룬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강제하게 되었다. 그 개혁이 언제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는 산자의 몫이다.
4. 죽은 노무현과 산 이명박의 대결포스트노풍과 노무현신화 창조의 일등 공신은 이명박정권이다. 죽은 노무현이 반MB진영의 최대공약수이며 상징이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명박정권이 존재하는 한, 노무현신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고 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노무현 색깔지우기에 부심하던 민주당마저 포스트노풍에 편승하려 한다. 각자가 자기식으로 노무현을 해석하며 노무현 신화 창조에 가세하고 이를 활용할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죽은 노무현을 통하지 않고는 반MB와 한국적 진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 6> 고 노무현 전 대통령(출처: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증오에 눈이 먼 어떤 이들은 그의 죽음조차 그다운 꼼수라고 여긴다. 노무현은 포스트노풍을 과연 의도했고 예견했을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기 한달여 전, 홈페이지 폐쇄를 알리는 글에서 ‘나를 버려달라’고 하며 이미 정신적 사망을 스스로 선언했다. 남아 있던 육신마저 버림으로써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다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절벽 투신을 구태여 택한 것은, 부당함과 억울함을 만천하에 호소하려는 의도는 있었을 지도 모른다. 죽기 한달여 전에 ‘나를 버려달라’고 했고, 유서에서도 ‘슬퍼하지도 원망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는 거짓과 가식과는 좀 거리가 있는 타입이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편이다. 그의 말과 글은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유서에서 ‘내 장기를 기증하라’는 구절이 없는 것도 포스트노풍을 의도하지 않았던 증거이리라. 그는 2002년 대선 후보시에 장기기증 서약을 한 바가 있으므로 유서에 그 내용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랬다면 ‘노무현은 억울하게 죽으면서도 자기 육신마저 바치고 가는구나’라며 많은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켰을 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스스로 내렸고 육신마저 버리는 마당에 그런 유언이 오히려 위선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포스트노풍과 노무현신화를 예견하고 자살을 택했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당시 고립무원의 상황을 돌리켜보면, 포스트노풍이 일어나리라 예견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상상들 자체가 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진다.5. 극단의 시대를 넘어 노무현 의도와는 별개로 '포스트 노풍'은 불었고 노무현신화는 창조되고 전승될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가 ‘죽음과 저주의 굿판’을 원하겠는가? 그 누가 ‘화해 용서’의 아름다움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노무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되는 자들의 입에서 그런 언사가 내뱉어지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렵다.
<사진 7>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 필자는 노무현정권의 성공을 간절히 바랐다. 그의 성공이 소위 주류들이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적대적 대립과 비극적 죽음이 재연되고 기념되는 '극단의 시대'의 긴 터널을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너무나 비극적이지만 '시대의 죽음'이 요구되는 상황이 재연되고 말았다. 역사의 수레는 거슬러 가고 있다.
번잡한 시간을 피하기 위해 천리길을 달려 새벽에 봉하마을에 도착했는데 두어 시간을 기다려 조문하고 돌아온 한 지인은 ‘미쳤어’라고 이 기이한 현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조문하는 사람이나 길거리 전경들이나 시쳇말로 개고생하는 지경이 연출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미치게 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필자는 우리사회에서 주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니까. 특히 전직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내 몬 수구동맹집단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다. ‘잃어버린 10년’식의 미친 정치적 선동을 이제 그만두기 바란다. 물론 반성은 말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사회의 그 정신병은 식민 전쟁 독재 등의 역사적 연원이 있으며 오래 묵은 것이다. 노무현은 이에 온 몸으로 처절하게 부딪혔고 끝내 죽었다. 죽음으로서 다시 우리들의 각성과 분발을 강제하고 있다. 노무현의 실재 및 의도와 별개로 참담한 현실은 노무현신화 만들기를 필요로 했다. 포스트노풍과 노무현신화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죽음이 ‘시대적 죽음’의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노무현은 구시대의 막내로서 청소부역을 자임했었다. 그는 죽어서 살아 생전에 못다한 구시대 청소를 마저 다하고 진정한 막내로 남기를 바란다. 그 청소부 역할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의 대통령’으로 오래동안 남을 것이다. 나아가 20세기식 극단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21세기형 계몽가 혁명가’로 평가될 것이다. 노무현신화와 예수신화를 대비한다면 신성모독이고 오버한 것일까?
6. 진실을 찾아서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에 청와대 검찰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한다. ‘연출=MB, 주연=검찰, 배급 마케팅=보수언론’ 이란 표현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이는 주류와 수구동맹의 보복살인 확인사살이라고도 한다. 지목된 당자자로서는 억울함도 있을 것이다. 그 억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당사자들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역사학자로서 그 진실 찾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공소권없음’으로 진실을 묻어서는 안된다. 다행히도(?) 청와대와 검찰도 노무현에 대한 검찰 대응이 정당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에 올인한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그 진실을 밝히라고 했다. 진실 공개에는 약간 법적 걸림돌도 있을 것이다. 국민의 알권리라는 미명하에 헌법(무죄추정)과 형법(피의사실공표금지)을 깡그리 무시했던 자들이 위법을 거론하는 것은 목불인견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세기의 시대적 죽음이다. 국민의 알권리가 강조되어야 할 대표적 경우이다. 특별법이라도 마련하여 국세청과 검찰 자료들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위원회 국정조사 특검 등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세간에는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흉흉한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필자는 그 설들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다. 다만 흉흉한 설들이 난무하게 한 책임 역시 1차적으로 이명박정권에 있음은 명백하다. 필자는 노무현의 죽음에 직면하며 직업병의 소치로 정조, 고종, 순종의 죽음을 떠올렸다. 노론 압도의 시대적 상황과 사도세자 죽음이란 과거사로 인해 정조는 군주였지만 운명적으로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죽음에 대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독살설이 떠돌았다. 노론과 특정 가문 독주의 상황과 개혁군주 정조에 대한 애틋함이 반영된 것이리라. 고종은 일제에 의해 군주자리에서 쫓겨났다. 고종이 죽었을 때도 일제 독살설이 파다했다. 그의 인산일을 기해 3.1운동이 일어났다. 마지막 왕인 순종이 죽었을 때도 독살설이 떠돌았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구왕실에 대한 애증을 엿볼 수 있다.
1949년 6월,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김구가 암살되었을 적에도 이승만 직접 개입설이 떠돌았다. 1973년 8월,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대결했던 김대중이 납치되었을 적에도 암살 시도설이 있었다. 1975년 8월 ‘재야대통령’ 장준하 사망시에도 '등산 중 실족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암살설이 떠돌았다.
이러한 과거사례들과 현재 국면을 고려하면 노무현의 죽음에 암살설이 제기될 여지는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경찰 발표가 수차례 번복되면서 암살설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거짓과 조작이 다시 거짓과 조작을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경찰이 최종 발표했지만 이미 그 신뢰도에 치명적 손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직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경찰의 허술한 조사와 수차례의 엉터리 발표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필자는 경찰의 책임과 함께 경호실패, 사후대처 실패, 거짓과 조작 묵인(혹은 공모) 등에 대해 청와대 경호실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머리와 온몸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전직대통령을 경호관이 보릿자루 둘러메듯이 메고 산을 내려오는 현장검증 장면을 보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호관의 거짓 증언을 청와대 경호실이 정말 몰랐을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청와대 경호실이 스스로 그 진실을 밝힘이 마땅하다. 무전과 통화기록, CCTV 등 신뢰도 높은 1차사료를 최대한 공개하길 바란다.
<사진 8> 현장검증 장면(출처: 오마이뉴스 )
노무현 죽음과 관련된 자료들은 공개되는 편이 우리 모두에게 좋다. 진실이 은폐되고 물리적 탄압이 가해질수록 신화가 더 괴력을 발휘하는 역설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지 않은가?.
내친 김에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는 자기 기록을 제대로 남기기를 권한다. 말과 메일 등 공식기록에도 남지 않는 변칙을 그만두라. 떳떳한 자는 기록 남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800만건 이상의 대통령기록물을 남겼다. 또 속히 노무현기록물을 분류 작업하고 최대한 공개해 줄 것을 권한다.
7. 꿈과 희망을 찾아서- ‘촛불후보론’갑갑한 국면에 변화와 계기가 필요하다고 모두 절감하고 있지만, 설득력있는 대안을 발견할 수 없다. 포스트노풍과 노무현신화는 그 대안 마련의 실마리와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죽은 노무현을 따르는 바보들의 행진을 꿈꾸어 본다.
노무현을 이을 제2 제3의 상징들과 무수한 바보들을 발굴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바보들의 행진에는 촛불이 함께할 것이다. 그 촛불 빛과 함께 노무현은 두 번이나 부활했다. 죽은 노무현과 촛불은 이명박정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고 반MB진영에게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심각한 좌절, 분노, 슬픔도 희망과 꿈을 동반하지 않으면 큰 동력을 얻기 어렵다. 부정보다 긍정이 더 생산적이고 위력적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유력한 판가리 기회이다. 촛불은 정치와 보다 긴밀히 결합되어야 한다.
대의와 승산을 겸비한 노무현류의 바보들을 앞세우고 각종 풀뿌리 조직을 만들고 의식화해서 선거에 대비해야 한다. 이를
‘촛불대표론’ ‘촛불후보론’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와 준비에 곧 착수해야 한다.
이미 경기도 교육감선거에서 촛불후보론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더 많은 실험과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구상은 반MB연대론의 약점을 오롯이 안고 있다. ‘촛불후보론’의 형식과 내용은 다양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창조적으로 운용한다면 그 약점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현국면에서 그 길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의 독특한 역사발전과정을 반추하고 현실의 독특한 정치지형을 고려한 결과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후일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아직은 추모국면이니까. 대신 드물게 진지한 기자인 한겨레21의 안수찬 글을 일독하기를 권한다()기회가 되는대로 봉하마을을 다녀올 작정이다. 노무현을 참 아꼈지만 아직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좀 덜 붐비면 다녀오려 했지만 노무현은 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하려 휴강까지 감행했지만 국민장으로 결정되고 서울 영결식이 결정되면서 또 봉하행을 미루었다.
그가 외롭기를 기다리다 번번이 봉하행을 그르쳤다.
노무현이 외롭고 부당하게 왕따당하지 않았다면 그를 편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노무현은 이제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이니 어쩌면 필자의 봉하행은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사진 9> 남정훈 작가의 고 노무현 전대통령 추모웹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