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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대의 과거청산과 역사논쟁

BoardLang.text_date 2008.10.18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시론】

이명박 시대의 과거청산과 역사논쟁


한홍구(근대사분과)


1. 노무현 정권과 과거청산

  수구세력들은 김대중 정권 5년과 노무현 정권 5년 등 지난 10년을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이 10년 동안 좌파정권 아래 대한민국은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대신, 과거만을 뒤적이며 허송세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은 정식 출범 이전인 인수위 시절부터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통폐합을 주장해왔다.

  한국의 맥락에서 과거청산에 대한 공격은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자기정체성의 확인과도 같은 중요한 의미를 띤다. 뉴라이트 등의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집요한 공격이나 최근의 뚱딴지같은 ‘건국절’ 논란은 모두 지난 10년간의 민주정권에서 추진된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 대한 수구세력의 반격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과거청산 작업은 사실 대단히 얌전하게 진행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은 ‘최초의 정권 교체’라며 요란하게 출범했지만, DJP연합이라는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출발했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도 적어도 과거청산 작업과 관련하여서는 이런 구조적인 한계 속에 안주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하려 한 사실에서 보듯이 김대중 정권은 과거청산보다는 수구세력과의 타협을 추구하였다. 비록 2000년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되었지만, 이는 450여 일간 유족들이 천막농성을 한 결과였다. 갓 출범한 ‘민주’정권은 그만큼 취약했고, 과거청산에 대한 충분한 의지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같은 TV 프로그램이 상징하듯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과거사 진실규명작업이 적극적으로 수행되었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는 시민사회가 정부에 과거청산에 나서라고 촉구했던 것이 받아들여져서, 정부 주도의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정원, 국방부, 경찰 등 권력기관 단위로 과거사 위원회가 민ㆍ관 합동으로 각각 설립된 것을 비롯하여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많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출처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 >

  한편 이 시기에는 수지 김 사건, 인혁당 사건, 함주명 씨 간첩 사건 등 권위주의 정권 시기 대표적인 공안사건에 대한 재심이 열려 무죄가 선고되고 거액의 배상판결이 나왔다. 이 시기에는 정부차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된 반면, 시민사회 차원의 과거청산 작업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얼마 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과거청산 역량 중 상당 부분이 정부가 만든 각종 위원회에 흡수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시기에 이라크 파병, 대연정 제안 등 정부의 ‘개혁 정책’이 표류함에 따라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민생과 밀접하게 연결된 개혁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과거사 진실규명이 독립적으로 생명력을 지닌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노무현 정권 시기 개혁의 표류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촛불집회 등으로 초기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명박 정권은 아직 과거사 관련 여려 위원회들의 통폐합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부가 들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각종 위원회의 동요는 심각하다. 이명박 정권이 직접적으로 위원회의 통폐합을 추진하지 않는다 하여도 법적 활동시한이 종료되는 위원회의 경우 그 활동시한을 연장해주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예산과 인사를 통해 위원회의 통폐합을 하지 않고도 과거사 관련 여러 위원회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임기가 만료되는 진보적 성향 또는 양심적인 위원들은 과거청산의 대의와는 상관없는, 아니 과거청산의 대의에 적대적인 인사들로 교체될 것이 예상된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정권을 내준 상태에서 과거청산 관련 위원회들이 독자성과 독립성을 갖고 제 기능을 유지해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편,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뉴라이트들은 역사문제와 관련해 대단히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핵심인사들은 ‘망언’에 가까운 뉴라이트들의 역사관련 발언이 나오면 즉각즉각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뉴라이트들이 현행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에 빠져있다고 비난하자 국무총리와 교육부 장관이 이에 호응하여 근현대사 교과서의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발언했는가 하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대하여 뉴라이트들이 비난을 가하자 이명박은 일본도 다 용서를 했는데 친일파를 왜 용서 못하겠느냐는 발언까지 하다가 독도 사태를 맞았다.

2. 과거사는 죽은 주제였는가?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과거청산 작업을 둘러싼 지형은 매우 우울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촛불집회의 뜨거운 열기는 과거청산 작업, 나아가 진보운동 전체에 새로운 희망과 과제를 던져주었다. 넓게는 진보진영, 좁게는 과거청산 관련 활동가·전문가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들의 변화욕구는 폭발적으로 분출됐다.


<ⓒ 김진영 (근대사분과)>

대중들의 놀라운 역동성은 한편으로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80년대의 대표적인 운동권 인사로 정계에 진출한 김근태 의원의 경우, 이명박 정권을 무조건 지지하는 대중들을 향하여 국민들이 치매에 걸렸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과연 촛불을 든 대중들과 무조건적으로 이명박을 지지했던 대중들은 다른 대중들이었을까? 대중들에 대한 신뢰의 결여가 대중들의 역동성을 읽어내지 못한 주된 이유 아니었을까?


  사실 노무현 정권 시절 과거청산 작업을 진행하면서 과거사 관련 전문가·활동가들 사이에는 묘한 패배주의가 번져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의 진실규명 작업을 수행해왔는데, 진실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대중들의 관심은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수십 년 동안 미루어졌던 일이 시작되는데, ‘마침내’라는 감격이 없었다. 1988년 ‘5공 청문회’가 열리면서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각종 비리가 쏟아져 나올 때, 사람들의 눈빛은 달라졌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시기의 과거청산은 그런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사는 ‘죽은 주제’처럼 보였다. 다양한 과거사 중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서 가장 강한 추동력을 보여주었던 광주 문제는 이제 다 끝난 문제로 여겨졌었다. 광주는 전 국민의 광주에서 호남 사람들의 광주로, 광주 사람들의 광주로, 관련자들의 광주로, 관련자들 중에서도 돈 받은 사람들의 광주로 자꾸 축소되어 갔다. 새삼 광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 광주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2006년, 강풀의 만화 『26년』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2007년, 영화 『화려한 휴가』는 730만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광주를 대중문화의 중심이슈로 불러냈다. 5·18과 8·15를 헛갈려하던 대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영화 화려한 휴가 포스터>

  사람들은 그 전두환이 이 전두환이야? 하고 서로 물어보았다. 과연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과거사 전문가·활동가들에게 죽은 이슈로 치부되었던 광주가 어떻게 하여 수백만 대중의 지지와 관심을 받으며 폭발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대중들은 처음부터 과거사에 무관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중들은 무관심하다기 보다 아예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사 관련 종사자들이 대중들이 아는데 무관심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무관심했던 것은 과거사 관련 종사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변화하는 대중들의 정서나 감각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고답적인 방식으로 수십 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게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 온 것이다.
3. 너무 얌전했던 한국의 과거청산

  강풀의 『26년』은 광주 문제에 과거사 ‘선수’들 중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던 ‘보복’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작가는 ‘보복’이라는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매우 과격할 수 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의 상식에 호소했다. 그 전두환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피해자 쪽은 여전히 고통을 받으며 사는 현실은 솔직히 건전한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출처 : 강풀 26년 >

한국의 과거청산 운동은 너무나 얌전하고 길들여진 운동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서 조사권한이 미약했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천황을 기소하는 국제법정을 열면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나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용공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라는 장벽 앞에 다소곳해져 버렸다.


  아무도 처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거사와 관련하여 수많은 법이 만들어지고 피해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보상금이 나갔지만, 그 어떤 법도 처벌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근 20개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월급을 받는 상근직원만도 700~800명이나 되었으니 과거청산 작업의 규모가 작았다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근 1천 명의 인원이 과거사 정리 작업에 투입되었지만, 단 한 명의 가해자도 감옥에 보내지 못했다. 감옥에 보낼 힘이 없더라도 가해자들은 제대로 된 고백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시효’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과거사 ‘선수’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벌을 내세우면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상규명을 위해 처벌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화해를 위해 처벌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었고, 나름대로 ‘숭고’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진상규명의 결과를 놓고 본다면, 그것은 처절한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처벌 없는 진상규명이란 애당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공식 문헌자료가 남아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학살과 고문의 경우, 가해자의 고백을 끌어내는 것이 진상규명 작업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은 절대로 그냥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 처벌 받아야 할 상황에서 그들은 “내가 안 했어요, 사실은 저 놈이 했어요”, “억울해요, 위에서 지시한 거예요, 나는 지시한대로 했을 뿐이에요”, “다 털어놓겠습니다, 관대한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라며 자신이 행한 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해서 입을 여는 것이다.

  처벌 - 그리고 그에 대한 사면 - 은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굳게 닫힌 입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처벌을 죽인 진상규명이 기댈 곳이라고는 우연히 남아있는 몇 장의 문서나 가해자들의 ‘선의’밖에는 없다. 얌전한 과거청산이 기댈 곳이라고는…

  이제 이명박 정부가 하려는 것은 이 ‘얌전한 과거청산’마저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정권을 빼앗겼으니 당연한 일일 런지도 모른다. 도대체 진보개혁 진영은 왜 정권을 잃어버린 것일까? 일이 이렇게 된 데에 과거사 ‘선수’들은 책임이 없는 것일까?

  총체적으로 볼 때, 노무현 정권은 진보개혁의 과제를 스스로 포기했다. 탄핵에서 살아온 뒤, 여당 단독 과반수의 17대 국회는 국가보안법 하나 폐지하지 못했다. 민변 출신 대통령에, 민변 초대회장 출신 국정원장에, 민변 부회장 출신 법무부 장관에, 민변 대표간사 출신 원내대표에,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갔다 온 의원을 30~40명이나 데리고 국가보안법 하나 폐지하지 못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런 그가 정작 대통령이 된 뒤에는 미국의 요구대로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전략적 유연성 수용, 한미 FTA 등을 추진했다. 노동인권 변호사라는 경력이 무색하게 그의 재임 중에 비정규직 상황은 악화되고, 정규직 노조는 노동귀족으로 매도되었다.

  이렇게 개혁이 표류하는 속에서 그나마 노무현이 지킨 약속이 과거청산이었다. 그러나 개혁이 전체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황에서 과거청산만이 독야청청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수십 년 동안 쌓이고 쌓인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이 사안별로 각각 진행되다보니 과거사 정리 작업도 그 의미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과거사 ‘선수’들은 제 각각 자기가 맡은 ‘과거’를 파헤치는 데는 열심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과거’가 오늘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대중들에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땅 속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과거청산 운동이 다루는 ‘과거사’는 기층 민중들의, 시민사회의 일상적인 과제와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정부 주도의 과거청산은 이렇게 고립되었다.
4. 어둠을 비추는 촛불, 과거를 비추는 촛불

  지난 5월과 6월의 촛불집회는 과거청산 작업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한반도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 교육 자율화 등은 모두 지금 막아내지 못한다면 장래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일들이다. 오늘 이 일들을 막지 못한다면, 이 문제들은 내일 ‘과거사’가 될 것이다. 역으로 지금 우리가 ‘과거사’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사실 다, 자기 시대의 펄펄 뛰는 첨예한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켜켜이 쌓인 과거사가 빚어낸 것이 우리가 숨쉬는 오늘이다.


<ⓒ허원영 (근대사분과)>

  1980년 광주의 충격이 해방전후의 현대사 연구라는 금기의 땅을 새롭게 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로 하여금 촛불을 들 수밖에 없게 만든 상황은 시민들로 하여금  과거사의 영역을 돌아보게 만든다.

  국민들이 그렇게 먹기 싫다는데 왜 이명박 정권은 기어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이명박 같은 사람이 집권할 수 있었을까?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줄 알았는데, 왜 80년대 같은 폭력적인 시위진압 방식이 되살아나는 걸까? 기어코 광장에서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백골단을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일까?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름 답을 찾는다. 그 답의 하나로, “이게 다 친일청산이 되지 않아서 그래”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포럼 진실과 정의>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첫 발을 내딛는다. 김대중 정권 시기, 시민사회는 정부보고 과거사 진실규명에 나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무현 정권 시기, 정부는 부족한대로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했고, 시민사회는 이를 지켜보며 비판도 하고 격려도 했다.

  이제 이명박 정권은 정부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공은 시민사회로 넘어왔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을 덮어버리려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노무현 정권 시기 여러 위원회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과거사의 진실을 상당한 수준에서 밝혀놓았다.

  진실규명은 과거청산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이지만, 과거청산이란 작업은 진실규명에 머무르려고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규명한 진실의 상당 부분은 피해자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밝혀주었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는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진실’이라는 새로운 위상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진실’에 입각하여 역사를 새롭게 쓰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정의에 기반을 둔, 오직 정의에 기반을 둔 화해를 이루어내야 한다.

  시민사회는 이제 힘을 모아 사법부의 과거청산과 그에 입각한 자기반성과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나름 민주화가 진전된 노무현 정권 시기는 사법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부각된 시기였다.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 총선을 통해 민주개혁 진영은 행정부에 이어 의회를 장악했다.

  입법ㆍ사법ㆍ행정의 3권 중 선출되는 두 권력이 민주개혁 진영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선출되지 않은 권력 사법부는 보수 질서의 최후 보루로 떠오른 것이다. 2004년 탄핵 이후, 행정 수도, 국가보안법,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 첨예한 문제에서 사법부는 인권의 최후 보루라기보다는 보수 질서의 최후 보루로 충실하게 기능했다.

  현재 과거사 진실규명의 대상이 되는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이 사법부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재심이라는 절차가 바로 그것이다. 재심은 피해자들의 원상회복, 또는 그 최저치로서의 명예회복에서 필수적인 절차이다. 그런데 사법부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를 폭력국가의 입장에서 최후의 봉인을 찍는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보고서의 사법 편이 잘 보여주듯이, 군사독재 정권 시절 정치적 사건의 재판은 법률과 법관의 양심이 아니라 중앙정보부ㆍ안기부 등 공안기관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법부는 이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도, 고백하지도, 사죄하지도, 청산하지도 않았다. 현재의 과거청산 작업은 재심이라는 절차를 통해 그런 사법부의 손에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내맡기고 있다.

5. 역사에 삿대질하는 이명박 정권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이 바쁠 일이 많이 생기고 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신념마저 위협받고 있다. 좋은 일로 바쁘다면야 마다할 일이 아니지만, 나쁜 일로 바빠지니 몸도 마음도 피곤하게 된다.

  일본 극우파들의 침략전쟁 미화나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같은 주변국 민족주의의 발흥에 대응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지만, 최근 자기 세상 만난 듯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마구 늘어놓는 뉴라이트나 이에 편승하는 국방부, 통일부 등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나온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허약한 것이었는가?

  2004년 뉴라이트의 등장이 노무현 정권의 과거청산 작업추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들, 특히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역사의 내전에 대한 응전을 피할 수 없다.

  1987년의 ‘『한국민중사』 사건’은 군사독재 정권이 역사서적의 내용을 문제 삼아 출판사 대표를 구속한 사건이었다. 과거에는 마음에 안 드는 역사는 이렇게 가두어 버리면 되었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이런 방식이 용이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구세력은 주로 『조선일보』나 『월간 조선』을 무대로 하여 역사교과서의 용어나 관점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1994년 3월, 제6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교과서 편찬 준거안을 둘러싸고 ‘대구 폭동’을 ‘10월 항쟁’이라 표현했다고 소동이 벌어졌다. 2002년 여름,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새로운 근현대사 교과서가 선보였을 때도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는 비리와 외환위기를 비롯한 대형 사고를 서술하고,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6·15남북공동선언과 노벨평화상 수상 등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시비를 걸었다. 이 과정에서 비밀에 부쳐졌어야 할 교과서 검증위원 10명의 명단이 공개되어 이들이 모두 사퇴하는 바람에 큰 파장이 일어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사용되는 근현대사 교과서로는 모두 6종이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다소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고,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대한교과서 판은 다소 보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교과서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를 보면, ‘붕어빵’ 교과서라 할 만큼 편차가 크지 않다. 교과서라는 것이 준비 작업에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데 만약 검정에서 탈락한다면 출판사로서는 큰 손실을 입게 된다.

  검정에 앞서 교육당국은 「교육과정」, 「집필상의 유의점」 등 검정의 기준이 되는 문건을 내놓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목차와 용어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진보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이 나뉠 수 있지만, 역사학자라면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 없고,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길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약간 보수적, 약간 진보적일 수는 있어도 그 차이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 그런데 뉴라이트나 이명박 정부는 마치 현재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모두 좌편향인 것처럼 몰아 부친다. 뉴라이트들은 자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라는 절대로 교과서로 쓸 수 없는 책을 내놓았는데, 근현대사 교과서의 필자에 역사학자들은 1명도 들어있지 않다. 보수적인 역사학자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친일파조차 미화하는 이들의 주장이 역사학자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기현 (근대사분과)>

이명박 정부의 교과서에 대한 집착은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다. 촛불집회 이전에도 뉴라이트의 자칭 ‘대안 교과서’ 출간이나 대한상공회의소의 교과서 수정안 등이 나오고, 이에 대해 교육과학부 장관이나 국무총리나 맞장구를 치는 등 꽤나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이명박 정권에게 교과서의 개정은 생존을 위한 절대 절명의 과제처럼 부각되었다.

  이명박 정권 입장에서 볼 때 학생들이 촛불을 든 것은 전교조가 새빨간 교과서로 아이들을 망쳐놨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필요 없는 이 편한 답을 가지고 이명박 정권은 한편으로는 전교조를 몰아내고, 또 한 편으로는 교과서를 새로 쓰려고 하고 있다.

  아니, ‘새로’라는 말을 쓰기조차 참으로 민망하다. 그들이 현행 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내놓는 주장들을 보면, 이건 완전히 1980년대 국방부가 펴낸 『민족 웅비의 발자취』나 1970년대 국정 교과서였던 『시련과 극복』 수준이다. 한국 현대사 연구는 1980년 광주의 쓰라린 아픔을 안고 시작되었기에 주요한 연구 성과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한국현대사의 내용은 지금 국방부 장관이나 교육부 장관이 학생 때 배운 역사와는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가 옛날에 배운 것과 다르다고 교과서를 고치란다. 퇴역한 노병이 자기가 다룰 줄 모르는 첨단 무기를 내버리고 이미 오래 전에 폐기처분한 옛날 무기를 다시 가져다 놓으라고 떼쓰는 격이다.

  과연 교과서만 바꾸면 학생들이 이명박 정권과 같은 정부를 지지하게 될까? 지금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모범으로 삼는 1970~80년대의 요란한 국정 교과서로 배운 ‘모범생’들이 대학에 들어와 의식화의 장풍 한 방에 180도 생각이 바뀐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역사 연구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내야 한다. 지금도 경남 산청 간디학교의 최보경 선생님은 자신이 편찬한 역사교재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의 단죄 대상이 되어있다.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들이 획책하는 대로 교과서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 저들은 역사학 연구 분야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반적인 후퇴는 학문과 교육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탈하게 마련이다.

  둘째, 민주화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권 시절, 개혁이 표류하게 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진보진영 내에 널리 퍼졌다. 우리가 이룬 민주화가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집권한 반민주적 정권이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는 오늘,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화의 성과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을 통해 밝혀낸 역사적 사실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교육되어야 한다. 과거청산 작업의 목적은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국가폭력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자 함에 있다. 진실규명 작업을 통해 밝혀낸 사실을 교육하는 것은 국가폭력의 재발 방지를 위한, 포기할 수 없는 출발점이다.

  만약 근현대사 교과서가 다시 쓰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기존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는 여러 가지 정치적 제약 때문에 1990년대 이후에야 본격화되었다.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을 통해 밝혀낸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 근현대사 연구의 소중한 성과이기도 하다. 이 성과는 당연히 근현대사 교육에 반영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