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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광장에 다시 서서-역사학도가 바라본 ‘촛불항쟁’-

BoardLang.text_date 2008.06.14 작성자 임대식

6월 광장에 다시 서서
-역사학도가 바라본 ‘촛불항쟁’-


임대식(현대사분과)


우리나라 현대사 보다 드라마틱한 역사가 이 지구상에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 현대사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변화가 압축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 과정에서 절망과 환희의 골은 가파르고 깊었다.

  집권세력의 한계치를 넘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제도권과 시민사회의 효과적인 대응이 미흡한 상황에서 번번이 대중들은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4월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 등과 같은 시민항쟁의 격동적 역사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심각한 약점들이 물론 내포되어 있지만, 우리 사회가 도약하는 주요 계기로 작용했다.

  시민항쟁은 곧 반동이나 타협으로 귀결되기도 했지만 우리 역사를 추동해온 주요한 동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당시대인들의 존재와 의식을 크게 규정했다. 촛불항쟁은 21년전 6월항쟁의 역사적 경험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6월항쟁 이후 20여년만에 또 하나의 격동을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직감에 불과한 것이지만....  

  20여년전 태양이 작렬하고 최루탄이 자욱한 아스팔트위에서 땀 먼지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그날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특히 7월 9일 이한열장례식 당시 100여만 군중이 집결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한 곳에 집결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같이 저항 에네르기가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그 폭력성은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 역시 주목할 점이다. 외신 화면에서 흔히 보게 되는 장면 즉 시위대에 의한 사적(私的) 폭력이 무절제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심지어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총기가 보급된 상황에서도 폭력은 극도로 제한적이고 선택적이었다.

시민항쟁들에서 가공할 폭발력과 폭력의 제한성은 한국적 특징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은 이번 ‘촛불항쟁’에서도 기본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다만 촛불항쟁은 그 시위 형태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떤 논자들은 참여 개방 공유의 웹2.0에 빗대어 ‘시위2.0’이라 칭하기도 한다. ‘시위2.0’식의 촛불항쟁은 낯설고 경이롭지만 또한 불만스럽고 답답하기조차 하다. 한달 여 지속된 현단계에서는 핵심 타켓 한둘에 대한 물리적 타격도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이니 말이다. 4.19당시에 이기붕 집, 어용지 서울신문, 4.18고대생 시위를 습격한 반공청년단의 반공회관 등이 불태워지고, 광주항쟁시에 시민을 폭도로 매도한 방송국이 불태워진 과거사를 떠올리는 것은 직업병의 소치일까?


<사진제공>  김진영(근대사분과)

  필자는 6월항쟁과 같은 국면은 다시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저항을 초래할 정권은 물론 저항 에네르기의 폭발을 선도하고 조직할 운동권도 존립할 여지가 제한될 것이므로.... 특히 한국현대사에서 시위의 선봉대였던 대학생들과 젊은 세대들의 보수화와 정치적 무관심도를 감안할 때.... 그런데 두 측면에서 모두 필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명박정권은 예상보다 극단적이었고, 디지털 게릴라들이 저항의 주체로 등장했다.

  디지털 문명을 그 기반으로 하면서 2002년 노풍과 2004년의 탄핵반대 촛불시위, 그리고 차원은 좀 다르지만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당시의 거리 응원 등에서 보듯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저항 주체들이 등장할 조짐을 보였다. 결국 2008년에 광우병 쇠고기 국면을 계기로 시민항쟁의 전통은 촛불항쟁으로 재현되고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지도부, 돌멩이 화염병 쇠파이프, 일사분란한 구호, 운동권 노래도 찾아볼 수 없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공포감과 긴장감도 없다. 그래서 구시대의 시위에서 맛보았던 묘한 스릴과 쾌감을 느끼지 못함이 아쉬울 지경이다.

  촛불항쟁은 어떻게 귀결될까? 그리고 후일 역사가는 이를 어떻게 기록할까? 이는 1차적으로 집권세력의 대응에 달렸다. 촛불항쟁은 그 배경에 다양한 근원들이 작용했지만, 직접적으로는 졸속의 쇠고기수입 협상으로 촉발되었다.

  촛불민심은 쇠고기 재협상이지만 이명박대통령이나 미국도 쉽게 수용하기 어렵다. 쇠고기 협정은 기본적으로 이명박대통령의 작품이다. 쇠고기협정은 '한미동맹 복원'과 한미 FTA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양이고 조공(朝貢)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미국측의 입장에서도 한국과의 쇠고기 협상은 시범 케이스다. 한국과의 쇠고기협정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전세계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한미FTA와 쇠고기협정은 시장 규모에 규모에 비해 대미교섭력이 취약한 한국을 상대로 맺은 시범 케이스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이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쇠고기 재협상은 국익과 국가신뢰도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건은 미국의 반응이다. 미국이 특정 상황하에서 재협상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대신 비싼 댓가를 요구할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의 양보와 한미FTA의 개악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이는 반미감정과 한미FTA 비준 반대론은 더하게 할 것이다. 결국 한미동맹과 한미FTA를 위한 희생양으로서의 쇠고기 협정이 도리어 걸림돌로 작용하는 역설이 성립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재협상 혹은 재협상 수준의 보완에도 불구하고 핵심 논란이 되는 항목들이 말끔하게 해소될 가능성은 적으므로 촛불은 쉬 잦아들지 않을 것 같다.


<사진제공>  김진영(근대사분과)

  광우병 쇠고기문제가 웰빙시대의 건강과 생명과 직결된 민감한 사안인데다, 누적된 실정 특히 인사 문제가 작용하여 촛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심지어 박사모도 촛불을 들었다. 정권은 현재 청와대와 내각 인사를 대폭 교체하려 하고 민생 대책을 남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인사문제의 핵심은 형 이상득과 ‘멘토’라는 최시중(방송통신위원장) 퇴진 문제이다. 이것은 민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 수도권 소장파의원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지난 총선 공천 파동 때부터 제기되었다.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도 이상득과 최시중은 이명박대통령에게 두고두고 계륵과 같은 존재임이 명약관화해 보였다. 그러나 인사 쇄신책을 거론하면서도 이 사람을 내친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 남발되고 있는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민생 응급책들 역시 심지어 조선일보로부터 ‘눈이 펄펄 내리는데 눈을 쓸겠다고 빗자루를 들고 마당에 나서는 인간들’(조선일보 6월 12일자 사설)의 바보짓이거나 아부짓이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이다. 결국 인사쇄신도 민생대책도 촛불을 진화하지 못할 것 같다.

  촛불항쟁이 급격하게 확대된 데에는 대운하, 언론통제, 신자유주의 교육 확대, 공공부문 민영화, 대결적 대북 기조로의 전환과 친미친일적 편향 등과 같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 정책들이 그 근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식의 편협한 인식하에, 전공(戰功)을 따지고 전리품 챙기듯이 인사를 멋대로 행하고, 점령지 정책 하듯이 국가정책을 입안 집행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재앙이다. 기왕의 핵심 정책들에 대한 조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이명박정권은 그 핵심 정책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명박정권의 정체성 정당성과 관련된 것이다. 일단 불붙은 촛불을 재점화할 뇌관과 화약고는 즐비하다.  

  현 추세대로 가늠하자면,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명박 정권은 쇠고기협정의 부분적 수정, 청와대와 내각의 인사개편, 경제 민생대책, 대운하와 공공부분 민영화 등 일부 공약의 후퇴 등과 같은 조치로 급한 불을 끄고(소나기를 피하고), 한편 촛불시위와 파업 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보수대연합 강화를 통해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친박입당 조치와 박근혜 총리설 등이 그것이다. 분열된 당을 수습하고 자유선진당까지 포함한 보수대연합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보수대연합을 통해 지지율을 약간 제고할 수 있겠지만, 이는 촛불 민심에 대한 동문서답격이다. 그리고 개헌 정국으로의 국면전환을 모색할 수도 있겠지만 정권 초반기 개헌 논의는 필연적으로 정국주도권 상실로 귀결될 것이므로 선택 가능성은 적다고 하겠다.   

  어떤 이들은 거국내각과 제2의 6.29선언을 주문하기도 한다. 거국내각을 고려했다면 각계 원로의 의견을 듣는다며 보수 일색 인사들과 형 이상득과 최시중을 만났겠는가? 그리고 정권 초반에 거국내각은 실현 가능성이 적다. 다만 보수대연합 구축 차원에서 친박진영과 자유선진당의 인물들이 내각과 공관장 공기업에 발탁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항복선언에 담을 내용물도 문제이다. 취임 100일만에 항복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인사 개편과 민생대책을 이미 발표한 마당에 항복문에 담아야 할 내용도 마땅치않다. 현재로는 항복할 기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삽으로 막을 일을 불도저로 막고, 방패로 막을 것을 컨테이너로 막는 행태를 되풀이할 것 같은 우울한 예감이 든다. 촛불항쟁은 장기간 계속될 것 같다.

  국내외적 환경마저 어려운 상황이므로 촛불 민심을 수습할 적절한 대안은 더욱  제한적이다. 취임 100일을 전후한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라고 한다. 이 수치는 심각한 도덕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에게 투표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물론, 고정지지층의 일부마저 지지를 철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수위 시절을 포함하여 6개월여 동안 이명박 정권의 성과가 대불공단 전봇대 2개 뽑은 것과 초등생 납치미수사건시에 일산 경찰서를 방문 한 것밖에 없다는 세간의 인식이 이를 반증한다.

  최근의 촛불항쟁은 잘 할 거라 믿고 권력을 맡겼는데 잘못하니 시민들이 촛불이라도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가 심각한 갈등을 빚은 셈이다. 10%대의 지지도로 상징되는 신뢰 상실 상황에서는 대통령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차마 듣기 민망한 단어들로 국가 원수를 조롱하는 현 사태는 우리 공동체 모두의 불행이다. 조만간 이명박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게 될 국면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른다.


<사진제공> 김진영(근대사분과)

 물론 재신임 국민투표는 현 집권자에게 유리하고 그래서 집권자들이 국면타개용으로 흔히 취하는 수단이다. 취임 100일된 정권에게 재신임을 묻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재신임투표와 같은 극약처방이 필요할 국면이 올지도 모른다(물론 필자는 재신임투표를 받아야 할지 고민하겠지만). 

  이제 끝으로 촛불을 든 주체들의 관점에서 전망해 보자. 6월 10일 촛불 시위대를 막기 위해 광화문 사거리 등 청와대로 통하는 길목에 컨테이너 방벽이 설치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지구인들은 서울에서 총격 시가전이 벌어진 걸로 여겼을 것이다. 촛불 행진은 컨테이너 바리케이트에 막혔지만 그 시간에 청와대 홈페이지는 순식간에 네티즌들의 사이버 공격으로 다운되고 말았다. ‘시위2.0’과 시대착오적 아날로그식 대응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사진제공> 허원영(근대사분과)

  ‘시위2.0’의 촛불항쟁은 그 역사적 사례가 없어 어떻게 나아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촛불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 같다. 진화책이라며 내놓은 것이 하나같이 불난데 기름 붓는 식이다. 낡은 레코드의 익숙한 소리인 불순세력 배후설도 들린다. 지도력을 발휘하려 시도한 그룹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로는 지도력이 관철된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당국도 배후를 적발하지 못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라는 형식적 조직이 존재하지만 의도적으로도 최소한의 지도력마저 방기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이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시민광장’이 마련되고 소위 ‘집단 지성’이 관철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구세대로 전락한 필자는 '시민광장'과 ‘집단 지성’의 한계를 구태여 강조하고 싶을 지경이다.

  필자는 6월 10일 촛불집회시에 화물연대 시위 행렬과 마주쳤다. 여중생인 듯한 학생이 그들을 선동하는(?) 듯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 노동자 대열의 표정은 심각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최근 기름값 인상으로 그들이 얼마나 극단적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는 필자의 뇌리에는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들은 돌과 쇠파이프라도 들고 하소연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1987년 6월항쟁에 이어 7-8월 노동자투쟁이 전개되었던 과거사가 떠오른다. 물론 그 국면은 다르지만 곧 양극화심화에 따른 피해자들의 절규가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태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온 평화시위 국면은 어떤 계기에 의해 일순간에 전변될지도 모른다.

  한편 일부 극우들은 박정희식의 강경한 대응을 선동하고 있다. 이명박 자신이 한일회담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학교에서 제적되고 감옥살이 한 민주화1세대라고 자칭했는데, 박정희식으로 군대까지 동원하는 강경 대응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잃어버린 10년’의 그늘이 만만치 않다고 토로했지만, 어찌 그 10년 동안 그늘만 있겠는가 양지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촛불항쟁에 대한 극단적 진압은 선택하기 어렵게 되었다.

  폭력으로 촛불시위를 광장과 거리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겠지만 그 촛불을 완전히 진화할 수 없을 것이다. 촛불은 오프라인과 거리만이 아니라 온라인과 안방에도 산재한다. 촛불시위대는 인터넷 핸드폰 카메라 등의 디지털 무기들을 다루는데 익숙하며 이미 카페와 블로그 등 무수하고 다양한 캠프들을 구축하여 소위 디지털식 게릴라투쟁을 벌인다. 네티즌들이 청와대 홈페이지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킨 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이러한 디지털 게릴라투쟁은 쉽게 진압되지 않고 한편 상대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하지도 못할 것이다. 결국 촛불항쟁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진제공>  허원영(근대사분과)

  촛불항쟁은 이미 제1단계 국면을 넘어선 것 같다.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권력의 독선과 질주를 견제했고, 한미 FTA의 위험성을 환기했고, 주류 언론의 위선을 폭로했고, 전국민을 주체의식화시켰다. '시민광장'과 '집단지성'에 익숙치 않은 필자로서는 다음 단계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촛불항쟁이 진화(進化)할지, 진화(鎭火)될지 두고 볼 일이다. 이명박정권이 촛불민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핵심 관건이다. 물론 현재까지의 상황을 두고 보면 촛불항쟁은 진화(進化)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지만.

    전세계의 사회과학자들은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기이한 역사적 국면을 분석하느라 진땀을 흘리게 될 것이다. 필자 역시 현대사연구자로서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또 역사를 만들기 위해, 처자식과 이웃들의 손을 잡고 그 역사적 현장에 촛불 들고 서 있게 될 것 같다.

기성세대로서 안타깝고 부끄럽다. 이명박정권을 세우고, 중고등학생들이 맨 앞장 서게 한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나아가 기껏 촛불 대열에 동참하고 성명서에 서명하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이 그러하다. 4.19 당시에는 척박한 지적 상황과 계엄령하에서도 4.25교수 데모가 있었는데...

(6월 12일 기록하다)

사족: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7개 역사단체가 6월 10일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일협정 비준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1965년 7월 9일 역사학회 등 3개 역사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한 이래, 역사학계로는 가장 의미있는 시국성명서가 아닌가 여겨진다. 당시 역사학계의 이 성명서 발표 사건을 둘러싸고 권력의 압력이 들어오자 역사학계에서 추한 파문이 일었는데, 그 여파로 이화여대 교수이던 김성준이 정치교수로 지목되어 해직되었던 과거사가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기우의 소치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