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키스가 특별히 사랑한 'Old Korea' 개항 이래 조선에는 많은 외국인이 입국하였다. 선교를 위해 입국한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 외교를 맺기 위해 입국한 푸트와 같은 외교관, 이윤 추구를 위해 입국한 콜브란과 같은 사업가, 취재를 위해 입국한 아손과 같은 기자, 여행을 위해 입국한 헤르만 산더와 같은 사람 등... 이러한 일련의 외국인 중 조선의 산천 및 일상의 모습 등을 화폭에 옮겨 동경, 런던, 파리, 호놀룰루 등에서 전시를 연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영국인 미혼 여성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29세 때인 1915년『뉴 이스트 프레스』의 편집인인 제부 J. W. 로버트슨 스콧과 여동생 엘스펏 K. 로버트슨 스콧이 살고 있는 일본에 잠시 다니러 왔다가 동양의 신비로운 색채에 매료되어 근 10년간 머무르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그림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재능만은 탁월하여 이를 지켜본 제부의 제안으로 이 때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 이토 신수이,「엘리자베스 키스의 초상화」, 1922 일본에서 머물던 엘리자베스 키스는 1919년 여동생과 함께 조선에 처음 입국하였고 일본과는 또 다른 조선의 매력에 이끌려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조선에 입국해 서울, 평양, 함흥, 원산, 금강산 등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들이 현재까지 남아 이를 한자리에 모은 특별전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전”이 지난 12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대개 목판화로 표현된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은 풍경만이 단독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지만 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즉, 얼룩소를 타고 다니는 노인, 대동강변에서 빨래하는 부인, 사찰 부엌에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고 있는 아이 등 평범한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사람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조선의 일상에 대한 엘리자베스 키스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에는 ‘살아있는’ 당시 조선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금강산 절 부엌」, 1920 작품들을 살펴보건데 엘리자베스 키스는 조선의 일상 전반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산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을 묘사한 것이나 서울 홍은동의 보도각 백불을 묘사한 것은 조선의 신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부의 행렬을 묘사한 것이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은 조선의 관혼상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찰 부엌에서 밥을 짓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나 고추를 말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은 조선의 음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기두기」, 1936 특히나 엘리자베스 키스는 조선의 복식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인물을 표현하는데 있어 의복 및 일련의 소품들을 아주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제복을 갖춰 입은 관료, 심의를 입은 유생, 오방장 두루마기를 입은 아이, 원삼을 입은 신부, 악공복을 입은 악공 등의 의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조바위, 남바위, 굴레 등의 쓰개류와 외래품 장갑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용했던 털토시 등의 소품까지도 꼼꼼히 묘사하고 있다.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 이러한 조선의 일상에 대한 엘리자베스 키스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조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래 조선에 입국한 여러 외국인 중 조선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적어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외국인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설령 그러했다 하더라도 그 접근 목적에서 볼 때 엘리자베스 키스처럼 따뜻하고 순수한 목적에서 접근한 외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낯선 구도, 낯선 색채, 낯선 제작방식으로 표현된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이 낯설지만은 않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겨울방학, 조선을 특별히 사랑한 여인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조선의 일상을 만나러 과천으로 나들이를 나서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