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속 역사보기 - 서울 1945 고지훈(현대사분과) ‘서울 1945’라는 드라마에 대한 비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예전 같았으면 “아, 그거 본적 없어서요...”라고 거절할 수 있었을텐데, 요샌 ‘동영상 다시보기’가 된다네. 동영상이라면 다른 좋은 것도 많은데 말이지... 50분짜리 드라마가 이미 60회가 넘었으니 이걸 다 볼 순 없었고, 중간중간 줄거리를 봐가며 관심가는 부분을 몇회 보았다. 그걸 중심으로 간단한 시청소감(?)을 좀 써보련다. 익히 알려진대로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 ‘건국의 시조들’이라 할만한 이승만ㆍ장택상의 후손들이 소송을 걸었다는 걸로 더 유명하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소송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감이라고는 없던 드라마"였다. 4명의 청춘스타가 나오긴 하지만, 전지현이나 송혜교, 장동건이나 원빈급이 아니라 대소신문사들의 연예부 기자들도 별반 관심을 갖지 않던 터였으니 뭐 당연하다. 소송을 제기했다는 말을 언뜻 들었을 때는 ‘저 분들 어지간하믄 좀 참으시지. 괜히 유명세 타게 해줘봐야 시청률만 높여주고 역효과만 날텐데, 왜들 저러실까’했다. 한데 ‘다시보기’로 보니... 글쎄, 소송은 걸만했다. 이 드라마가 두 분의 건국시신... 아니 시조들의 명예를 훼손했는지의 여부는 법원이 가려줄 것이다. 물론 ‘그때 그사람’이라는 또다른 현대사 사건을 다룬 극장용 영화에 대해 ‘검열명령’을 내린 전력이 있는 대한민국 사법부라서(최근 법원은 그 판결을 다시 뒤집었고 영화는 원상복구되었다고 한다. 이런걸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죽은 자식 X알 만져주기’가 되겠다) 좀 불안하긴 하지만 말이다. ‘서울 1945’는 1930년대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함흥을 고향으로 하는 등장인물들을 축으로 전개된다. 또래의 주인공 네 명을 중심으로 가족과 주변인물들이 일제부터 한국전쟁까지 말 그대로 우리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첫 번째 미덕은 여기에서 나온다. 드라마의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원죄’를 식민지시기의 여러 갈등으로부터 풀어낸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던 무렵부터 뿌리내린 일종의 ‘법칙’이 되었다. 비단 연구자들뿐 아니라 ‘태백산맥’이나 ‘토지’같이 우리 근현대사를 무대로 삼는 문학작품 대부분은 이러한 설명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사연구방법론이 소개되기도 전부터 우리 문학작품들이 그같은 방법론을 터득한 것은 그것이 곧 그들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직관에 의해 알 수는 있는 것. 삶이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하다 못해 이제 막 이혼도장을 찍은 부부들도 그들을 여기까지 내 몬 것이 ‘어젯밤의 한바탕 격렬한 다툼’ 때문만이 아니라, 지난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갈등과 모순(?)의 ‘총체적 귀결’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하물며 두 개의 정부 사이의 싸움이랴? 한국전쟁을 악마적 인간 한둘의 ‘착각’만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는 지구상의 모든 전쟁사 연구자들의 밥그릇을 날리는 일이다. 일종의 ‘학문적 자살행위’라 부를만하다. 아무튼 ‘서울 1945’는 최근 ‘뉴라이트 어쩌고’하는 분들의 역공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분단-전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정면돌파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통’ 현대사 드라마라 부를만하다. 이 드라마의 첫 번째 미덕이라 하겠다. ‘서울 1945’의 두 번째 미덕을 꼽자면 그건 성실함이 될 것이다. 대충 얼기설기 시청자가 보고싶어 하는 장면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역사적 사실들을 조미료처럼 첨가하는 식이었다면 ‘다시보기’가 약간 지루했을 것이다. 한데 ‘서울 1945’에는 비교적 최근까지의 현대사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예를 하나 들자. 남침을 앞두고 고민하는 남로당 간부들의 대화에서 소련이 1949년 9월 현재 남침을 불허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건 1949년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결정을 지목한 것이다. 전쟁과 관련된 소련측 문서들은 90년대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바자노프를 비롯 소련과 미국, 그리고 한국측 학자들에 의해서 그 대체적인 면면이 밝혀진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 역시 이런 최근 연구동향을 제작진들이 충실히 검토했음을 과시하려는 듯한 인상이었다. 뭐 선생님들께 ‘나 공부 열심히 했어요. 이뿌죠?’라고 으스대는 학생을 보는 기분인데 나쁘진 않다. 공부해서 남주나. 이 말고도 길게 다뤄지진 않았지만 패망직전 일본인 소유 재산을 헐값에 매매했던 당시 상황이나, 박헌영의 호를 ‘而丁’이란 자막으로 내보내는 장면(이정은 박헌영이 쓰던 필명이지만 연구자에 따라서는 다른 인물로 보기도 한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논란 와중에 로마넨코를 배후 실력자라고 지목하는 장면, 좌우합작에 대한 평가나 여운형의 방북을 다루는 장면, 찬반탁 논란 친일파들이 극우-애국세력으로 변신하는 장면 등은 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현대사관련 서적들을 비교적 충실히 학습한 흔적이 보이는 대목들이다. RP가 누구였는진 모르지만 커리큘럼 선택도 그만하면 잘된 것 같다. 한데 뭐 공부란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법. 오류가 없을 수 없다. 이제 좀 씹을 차례다. 저쪽에서 뺨맞고 온 제작진들에게 “이쪽 뺨도 대”라고 하기 좀 야박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린 소송까지 걸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라.(사실 소송을 걸어줄 후손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소송비 마련조차 어려운 형편이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좌익을 다루는 제작진의 태도에 관해서 한마디. 충분히 예견할 수 있고, 또 이해는 간다. 건국의 시조들까지 다소 ‘얍실’하게 묘사한 이 드라마가 훨씬 더 ‘전형적으로’ 좌익을 고발하리란 것은 충분히 예견했다. 이는 ‘서울 1945’가 다루는 실존인물 가운데 가장 ‘미화’된 인물이 여운형이라는 사실을 보면 그리 놀랍지도 않다. 좌우합작 혹은 중도파가 돋보이기 위해서는 좌와 우가 모두 함량미달이 되어야 하니까. 구체적인 사건을 들자면야 여러 가지 들 수 있다. 모스크바 3상결정을 전후한 조선공산당의 ‘좌충우돌’이 그러했고, 1946년 7월 조선공산당의 소위 ‘신전술’이 그러했으며, 11월의 3당 합당, 48년 이후의 게릴라전술 등등. 이 모든 것은 남한 좌파운동의 최종실패와 함께 ‘오류’였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다. 문제는 해방 직후 남한좌파의 ‘전술적 오류’를 지목하는 부분이 아니다. 드라마가 당시 남한 좌파들의 입을 빌어 ‘파업’이란 단어를 배치하는 방식 때문이다. ‘서울 1945’에서는 ‘좌익=파업=공공의 적’이라고 공식화시킨다. 예컨대 이런 장면이다. 31부.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의 귀국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공산당 간부들의 회합. 조선공산당의 가장 강력한 외곽단체는 물론 1945년 11월 5일 결성된 전평이다. 노동운동은 조공의 핵심기반 가운데 하나였고, 46년 9월 총파업을 지도하면서 그 위력을 과시한 바 있다. 이걸 보면 위의 저 대사들은 별 이상할 것 없어 보인다. 한데 그렇지 않다. 이건 참으로 심각한 ‘오해’에 해당한다. 해방직후부터 1945년 연말에 이르기까지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노선은 당내에서 우경이란 비판을 받을 정도로 “산업평화”를 외치던 시점이었다. 산업평화라. 이 말이 노사정위원회 같은데서 나왔다면 필시 使 혹은 政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좌우대립의 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심각한 후유증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다. “파업은 어떤 경우라도 모두 파괴행위”라는 것이다. 아직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노선은 금방이라도 정권을 장악할 것처럼 ‘착각’한데서 나온 오류들이 많다. 대군정 협력정책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전평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한데 이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러시아 혁명 후 소련에서도 파업은 금지되었었다. 국가코포라티즘이 유독 강했던 전후의 모든 국가들에서 파업은 계급적 이해관계가 아닌 ‘공공의 적’으로 묘사된다. 드라마 전반에 걸쳐 노동자 혹은 파업은 이처럼 조선공산당의 ‘집권야욕’에 철저하게 이용되기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공공의 적’이 된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경제적 약자로서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우리의 헌법정신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해, ‘서울 1945’는 철저하게 60․70년대식 시선을 유지한다. 신자유주의는 참 무서운거다. 이젠 공영방송이 이승만도 희화화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파업은 안되는거다. 그건 절대악인거다. ‘서울 1945’의 또다른 심각한 ‘오해’ 한가지를 더 들자면 정판사 위폐사건과 관련된 묘사다.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양심적인 우파청년이다)가 절친한 친구인 최운혁(역시 양심적 좌파다)과 사상적 결별을 하게되고 좌우간의 폭발을 일으키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인 정판사사건은 실제 그런 역할을 했다. 한데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방식은 숫제 코미디다. 수도경찰청이 발표를 일주일씩이나 미루면서 쉬쉬할만큼 실체구성이 어려웠던 사건이지만, 드라마에선 뭐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다. 같은 시간대에서 방영하는 개그콘써트를 의식했나보다. 최근 정판사 사건을 주요 소재로 한 책도 나왔고, 유가족(이관술의 딸)이 과거사위원회에 소청을 낸 바도 있으니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위조지폐로 국가경제를 붕괴시키려는 최초의 사례가 1946년 5월 남한에서 발생했다는 점으로 보면 위폐문제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지는 모르겠다.(1952년 미국의 한 군사학 잡지는 교전수단 중 하나로 위조지폐를 남발하여 적국의 경제를 붕괴시키는 방법을 제기하기는 했었다) 이 말고도 몇몇 사소한 ‘오해’가 눈에 띈다. 해방 직전 사회주의자들이 ‘요인암살’을 시도한다든지(1930년대 이후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삼은 정치세력은 거의 없다. 좌파는 더더군다나), 동북항일연군 출신이 갑작스레 박헌영의 오른팔이 된다든지(이강국을 모티브로 했다는 문동기의 이력인데, 이강국은 물론이고 조공 서울중앙에는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없다), 투옥된 김삼룡과 이주하를 남파된 남로당 지도부 인사(주인공인 최운혁)가 비밀리에 면회를 한다든가(가족이라고 해도 김삼룡과 이주하를 면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6월 27일 서울시내의 민간인을 상대로 북한전투기가 기총소사와 폭탄을 투하해서 사상자가 난다든가(한국전쟁 당시의 공중폭격을 연구하는 동료 연구자도 눈이 똥그래지더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김삼룡과 이주하를 석방하라고 시위하는 장면 등등도 눈에 걸리더라. 그렇긴 하지만, 뭐 어때? 드라만데. ‘다시보기’를 보면서 그래도 드라마는 참 잘 만들었다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교대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지금 평양에선’이라는 드라마다. 필자는 아직도 가끔 김정일하면 평양의 그 김정일 대신 탤런트 김병기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나 고증과 자료수집에 충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도착은 기본이고 애비뻘 되는 고위관료의 뺨을 떡치듯 후려치는 안하무인에다가, 폭음에 약물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온갖 호사와 권능을 보유한 반인반수 김정일이 주인공이던 그 드라마. 솔직히 아직도 그 드라마가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쬐~끔 든다. 세뇌란 무서운 거다. 그때는 시청등급이란게 없었다. 그래서 그 야리꾸리한 드라마를 매주 열렬히 시청했던 기억도 난다. 한데 ‘서울 1945’ 시작화면에는 “15세 이하 어린이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라는 자막이 나간다. 이런 자막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왜곡’을 둘러싼 논쟁과 쟁송이 반복된다. 2006년 현재의 대한민국과 우리들의 좌표를 잘 보여준다. 현대사에 관한한 우리 모두는 아직 15세 미만의 철없는 아이들인 셈이다. 600만불의 사나이를 보고는 꼭 2층에서 ‘뚜뚜뚜뚜~’하면서 뛰어내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애들이 물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건 모두 드라마가 재밌자고 만든 것이다. 시청자의 입장으로는 ‘정확한 드라마’ 보다는 ‘재미있는 드라마’가 훨씬 낫다. 재미없고 정확한 거, 그런 거 서점에 많다. 책값들 좀 쓰시기 바란다. 엉뚱하게 변호사들 배불리시지들 말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