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독도영유권 논쟁과 미국의 역할 정병준(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한국인들은 독도문제가 한일간의 영토문제이자 역사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한일 양국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란 판단이다. 나아가 일제 침략의 끔찍함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에게 독도문제는 일본제국주의의 패권적 영토야욕이 현재진행형임을 상징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때문에 독도는 한국인들에게 반일감정의 대표적 시금석이자 징표가 되어 왔다. 그렇지만 1950년대 이후 ‘독도분쟁’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미국의 결정, 미국의 영향력이었다. 1. 미국,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통보하다 1951년 8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한국정부에 공식 통보했다. 일본과의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을 한달여 앞둔 1951년 8월 10일 딘 러스크(Dean Rusk)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는 양유찬 주미한국대사 앞으로 보낸 공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으로 불리는, 와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위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隱岐島司) 관할하에 놓여져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파랑도를 강화조약에서 일본에서 분리될 섬 중 하나로 지목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구는 기각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직전 한국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마도, 파랑도,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그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러스크의 서한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는 이러한 공식 입장을 한국정부에 통보했지만, 일본정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독도를 둘러싼 한일갈등은 1952년 일본이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강력히 반발하며 독도가 일본령임을 주장하면서 폭발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극동의 동맹국들이 적전 충돌을 불사하자 미국은 중재에 나섰다. 1950년대 중반 미국무부 극동국의 관리들은 러스크의 비망록을 공개해 한일분쟁을 조정해야 한다, 즉 독도가 일본령임을 공표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1953년 4월초 주일미대사관 2등서기관이던 핀(R. B. Finn)은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독도영유권이 명백히 일본에게 있으며 이런 사실을 한국에게도 통보했으니, 한국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한일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러스크의 1951년 8월 10일자 서한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이 독도를 일본령으로 해석ㆍ결정했으니 평화선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이 적극 개입해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공표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상관이던 레온하트(L. D. Leonhart) 1등 서기관 역시 러스크 각서를 미국이 공표하거나 일본정부에 전해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1953년 7월 미국무부가 작성한 독도문제 대비책에 따르면 미국은 분쟁의 조정ㆍ화해ㆍ중재 혹은 사법적 조정을 위해 러스크 각서를 공개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의 선택지가 ① 미국의 중재를 요청, ②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제소, ③ 유엔총회 혹은 안보리에 제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재역할과 관련해 미국은 독도문제가 한일문제이므로 “가능한한 최대로 분쟁에서 벗어나”야 하며, 한국은 국제사법재판소행을 거부할 것이고, 일본이 유엔총회에까지 문제를 확대시키진 않으리라고 관측했다. 때문에 동북아시아처 일본과는 미국무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 하며, 만약 일본이 의견을 구할 경우 중재역할은 거부하며 유엔총회 제출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알리며, 국제사법재판소행이 적절하다고 통보할 것을 권고했다. 만약 일본이 미국의 법률적 견해를 요청한다면 러스크각서를 일본이 활용케 해야한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이 시점에서 주일미대사 앨리슨(John Allison) 역시 포츠담선언, 샌프란시스코조약, 러스크서한 등을 통해 미국이 독도논쟁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었으니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앨리슨은 미국이 이미 러스크서한을 통해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주장하는 것은 이전의 정책을 파기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국무부를 압박했다. 주일미대사관 참사관이던 윌리암 터너(William T. Turner) 역시 러스크서한을 공개한다고 위협해 한국정부를 압박해야 하며, 만약 한국정부가 러스크서한 즉 독도의 일본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선택해야 하며, 이것조차 수용되지 않으면 러스크서한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면에서는 한일간에 독도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지만, 그 이면에서 미국무부는 한국정부에게 러스크서한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하며, 국제사법재판소행을 권유했고, 한편으로 일본정부가 러스크서한에 명시된 독도의 일본영유권 확인사실을 알까봐 전전긍긍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일 우호적 국무부 관리들은 ‘합리적 이유’를 명분으로 러스크서한의 공개를 주장하며 국무부를 압박했다. 현재까지 한국정부가 미국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사진 1) 출처 : 중앙일보 만약 노회한 변호사출신의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국무장관직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1953~54년 사이에 러스크각서가 공개되어, 한일한미관계가 결정적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덜레스는 샌프란시스코회담에 대한 미국의 해석이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도, 미국은 조약서명국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며, 이는 미국의 해석이지 연합국의 합의된 공의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덜레스는 일본이 소련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북방의 하보마이(Habomais : 齒舞) 섬에 대해서는 미국이 일본령임을 명백히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무력시위를 요청하지 않지만,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강력한 개입을 요청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결국 덜레스는 미국이 독도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한일간 조정이 안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문제라고 정리했다. 덜레스의 명민한 판단으로 미국은 독도문제의 결정적 파국에서 두 동맹국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덜레스가 애써 미국의 입장을 중립적 위치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행정부 내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까지도 동일했다. 러스크서한의 장본인 딘 러스크는 태평양전쟁기 국무부전쟁부해군부 3부조정위원회(SWNCC)에 근무하며 찰스 본스틸(Charles Bonsteel)과 함께 38선을 그은 장본인이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1965년의 시점에서는 국무장관이 되어 있었다. 1965년 5월 27일 박정희와 러스크가 나눈 대화는 독도문제가 1950~60년대 이래 미국무부의 핵심관심사항임이 잘 드러나 있다. ㆍ딘 러스크 국무장관 : 독도에 한일 공동관리 등대 세우고, 섬의 귀속권 결정하지 말자. ㆍ박정희 : 한일 수교협상에서 암초로 작용하는 독도를 폭파해 없애버리고 싶다. 아마 박정희와의 회담을 위해 준비된 러스크의 핸드북에는 1951년 양유찬에게 제시한 비망록이 강조되어 있었을 것이다. 러스크는 당시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명백히 하고 있던 독도에 한일공동의 등대를 세우고 귀속권을 결정하지 말자고 주장함으로써 한국의 양보를 촉구한 것이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은 실질적으로 한일간 ‘독도분쟁’의 내용적 출발점이었다. 전투는 1952년 이후 한일간에 격렬한 형태로 벌어졌지만, 실제 주요 정책들이 결정된 총성없는 전장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패전 적국 일본에게 과도한 우호심을 갖고 있었다. 극동반공기지 건설을 위해 소련을 배제한 단독강화를 추진하면서 연합국들 간에도 일본에 대한 조치를 둘러싼 의견차이가 적지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과 미국간에도 ① 전쟁책임, ② 배상책임, ③ 영토문제 등에서 예각적 대립이 있었다. 먼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는 일본군국주의의 전쟁책임, 반인류적 범죄행위에 대한 비판과 책임추궁이 단 한 구절도 들어있지 않았다. 영국은 전쟁책임 구절을 삽입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주일미정치고문이자 연합국최고사령부(SCAP) 외교국장으로 친일적 견해의 대표자였던 윌리암 시볼드(William J. Sebald)는 조약의 전체 개념이 ‘비징벌적’인데다 일본인들이 그런 구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결국 전쟁책임 구절은 삭제되었다. 다음으로 일본의 배상책임 역시 일방적으로 면제(14조)되었다. 영국은 배상책임을 주장했지만 미국에게 300억 달러 이상의 전시채무를 지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경제가 파산상태라는 미국의 주장에 결국 입장을 철회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과정에서 임오군란ㆍ방곡령 등의 사소한 사건에서조차 가혹한 배상을 요구했고, 청일전쟁 이후 요동반도ㆍ대만의 할양을, 러일전쟁 이후 남만주철도와 조선지배권을 획득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는 모든 책임ㆍ의무의 면제였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일본의 미츠비시, 미츠이, 스미토모 등 대재벌들이 면책특권을 부여받았고, 수많은 연합국ㆍ피침략국의 국민들이 당한 노예노동ㆍ착취ㆍ학살ㆍ성범죄의 배상ㆍ보상은 원천적으로 가로막혔다. 영토문제에 대해 영국은 최초에 일본영토를 특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즉 특정되지 않는 지역이 자동적으로 일본에서 배제되는 방식이었고, 이를 위해 일본영토를 규정하는 공식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이 지도와 영국정부의 초안을 보여주었고 일본은 격렬히 반대했다. 전쟁책임, 배상, 영토할양으로 이어지는 19세기 이래의 강화회담의 원칙은 무시되었다.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체제는 독일ㆍ터키 등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분할을 요구했다. 독일은 연합국이 제시한 조약문에 서명할 권리만을 가졌다. 반면 일본은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의 초안을 검토했고, 이 과정에서 자국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외교적 로비를 벌였다.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영토조항은 일본에서 배제되는 지역을 특정하는 방식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일본에게 가장 유리한 조항이었고, 원하던 바의 실현이었다. 독도가 분쟁지로 된 가장 결정적 동기는 이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왜곡된 정보와 철저한 로비로 미행정부로 하여금 독도가 일본령임을 승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미국을 상대로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설득했고, 미국정부가 이를 인정한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태가 정리된 후인 1952년 어리숙한 한국정부를 향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영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는 미국에게 있었고, 진실을 말하자면 미국 행정부는 자신들이 독도문제와 관련해 내린 결정이 한일관계에 어떤 파급력을 지닐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 패권국가 미국의 중요한 결정은 약소국가 한국으로 하여금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엄혹하고 긴 투쟁에 접어들게 만들었다. 강약부동(强弱不同)이었다. 2. 울릉도를 노린 일본, 책략을 구사하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187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근대적 국민국가로 대외팽창을 노리던 일본의 주요 영토획득 및 편입이 확정되었다. 대만정벌(1874), 운요호사건ㆍ조일수호조규(1876), 사할린(樺太)ㆍ쿠릴(千島) 교환협정 체결(1875),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 편입(1876), 류우큐우(琉球) 귀속(1879)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이 시기에 집중되었다. 처음 일본이 노린 것은 울릉도였다. 전근대 시기 어떤 자료에도 독도는 독자적 공간ㆍ지역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독도는 울릉도와 결합될 때만 기능할 수 있는 섬이자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취급되었다. 1870년대 독도개발이 논의될 때도 이는 울릉도 개발에 수반된 것이었다.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지배가 명백했으므로, 일본의 초점은 독도로 옮아갔지만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미련은 식지 않았다. (사진 2) 출처 : 뉴스메이커 근대 일본의 영토침략은 인접국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이는 오랜 구상과 준비작업의 실현과정이기도 했다. 근대 일본이 최초로 획득한 식민지는 대만이었다. 17세기 중반 명왕조 부흥운동을 했던 정성공(鄭成功), 일명 콕싱가(國姓爺 : Coxinga)의 활약이래 일본인들에게 일종의 파라다이스로 생각되었다. 부계는 중국인이었고 모계로는 일본인이었던 정성공은 네덜란드 식민통치자들을 축출하고 1661년 항청복명(抗淸復明)을 시도했지만, 늪지의 말라리아로 이듬해 사망했다. 이후 정성공의 얘기는 연극으로 만들어져 일본들에게 대만에 대한 낭만적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후 200여년 동안 청조가 대만을 지배했지만, 1874년 대만사건 이래 일본은 결국 대만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정한론이 등장한 지 약 35년 뒤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독도는 그 과정에서 첫 번째 희생물이 되었다.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브로(中井養三郞)는 일본정부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청원했다. 다음해 1월 28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은 독도에 러시아함대 감시용 망루를 세웠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일본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무주지 영토편입론의 출발이었다. 2차 대전에서 패전했으나 일본은 영토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식민지는 돌려주지만 19세기 이래 영토로 편입한 섬들은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1946~47년간 모두 8개 도서지역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 연합국에 배포했다. 1947년 6월 작성된 팜플렛은 독도는 물론 울릉도까지 일본령으로 소개하고 있다.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이름이 있지만, 다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 이름도 없고 한국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다”고 썼다. 명백한 허위정보였다. 한국은 정부수립 이전이었고, 미소ㆍ남북ㆍ좌우 대립이 치열하던 때였다. 일본 외무성의 이 팜플렛에 제시된 허위정보와 오도된 진술은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준비하는 미국무부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51년 7월 미국무부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마지막 초안을 손질할 당시에도 이 팜플렛이 이용되었다. 1949년부터 미국 중심의 대일단독강화가 예견되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1951. 9)의 준비과정에서 미국을 상대로 가능한 모든 로비를 벌였다. 1949년 11월 주일 국무부 정치고문이던 시볼드는 독도가 일본령이며 여기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다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시볼드는 영국인 아버지ㆍ일본인 어머니를 둔 일본2세와 결혼해 일본에서 오래 법률회사를 운영했던 ‘지일파’였다. 시볼드와 일본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한국의 이익을 방해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요시다는 재일한국인 100만명이 공산주의자ㆍ범죄자라며 추방을 주장했고, 한국의 연합국지위 부여에 반대했다. 시볼드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한일양국에 맡기자는 일본측 입장을 강조해 한국의 대일 배상ㆍ청구권 해결을 원천 봉쇄했다. 일본은 국제조약의 조약 한 구절이 국가운명ㆍ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수많은 문서작업들을 진행했다. 심지어 국가차원의 조작문서 작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2년 초반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ㆍ해제하는 책략을 추진했다. 일본정부와 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활용하는 협정을 맺음으로써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확인케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중의원 의원과 외무성 고위관리들이 버젓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해 7월 26일 독도가 미공군훈련구역으로 선정됐고, 9월 15일 독도에서 어로중이던 한국어선 광영호가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다. 경고는 시마네현 어민들에게만 내려져 있었다. 일본정부는 1953년 3월 19일 미일합동위원회 소위원회를 통해 독도를 미공군의 훈련구역에서 제외했다. 이후 일본정부는 이러한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ㆍ해제조치가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증명한다고 한국정부에 통보했다. 3. 당황한 한국, 가까스로 독도를 지키다 일본 어부ㆍ사업가들은 이미 1870년대 이후 광산개발ㆍ배타적 어업권 확보 등 일확천금을 노리고 무인도의 발견과 일본령화의 국제법적 수속을 경쟁적으로 추진했지만, 한국은 그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정부가 울릉도를 방치한 사이 삼림벌채를 위해 침입한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순경이 파견되어 패만한 행동을 버젓이 하던 실정이었다. 1900년 10월에 대한제국 정부는 울도군을 선포했다. 울릉본도와 죽도, 석도로 울도군을 삼는다는 이 칙령41호(1900. 10. 25)에서 석도는 독도로 해석되었다. 처음으로 한국의 법령에 독도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근대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었다. 명칭도 달랐고, 좌표나 방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과 대응은 국민적 수준에서 추진되지 못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1948년 8월 5일 조성환을 중심으로 한 애국노인회가 독섬(독도), 울릉도, 대마도, 파랑도의 한국반환을 요구하는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일본령이 분명한 대마도와 위치가 불분명한 파랑도를 독도ㆍ울릉도와 함께 거론함으로써 논의의 진정성과 신뢰성을 현저히 감축시켰다. 1948년의 신생 한국은 외교적 경험과 시스템이 전무했고, 외교적 자원도 부족했다. 미국정부가 보내온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초안은 한 관리의 책상에서 수 주일동안 잠잤고, 한국정부는 주요 정책목표를 설정해 미국을 설득하기 보다는 하나의 문서에 다양한 수준의 요구를 쏟아냈다. 일본 외무성은 영토문제에 대해 7책 분량의 자료집을 만들었고, 미국 관리가 현혹될 수 있는 허위정보를 제공하고, 적극적 로비를 펼친 반면, 한국정부는 영토문제ㆍ배상문제ㆍ연합국자격문제 등 모든 문제를 불과 6장의 비망록에 담았다. 1951년 대마도ㆍ독도ㆍ파랑도가 한국영토라는 주미한국대사의 비망록을 접한 덜레스 대통령특사는 독도와 파랑도의 위치를 문의했다. 주미한국대사관의 한 공사는 좌표도 모른 채 독도와 파랑도가 동해상에 있다고만 답변했다. 한국정부는 독도가 샌프란시스코회담과정에서 논의된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52년 평화선 선포 이후 독도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일본정부는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미국을 설득했고, 약한 한국은 전쟁의 와중이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한국정부ㆍ한국국민들은 우여곡절 끝에 결연한 의지로 독도를 지켰다. (사진 3) 한일협정 일본은 한국이 허약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독도를 강점하기 위한 수많은 국가 공문서들을 조작해왔고, 기회를 노려왔다. 5ㆍ16 이후 일본은 정통성이 부재한 한국군사정부를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거나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고, 미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한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이에 동조했다. ◦ 1962 이세키 아시아 국장 :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하는 것을 정해야겠다(1962. 9. 3. 정치회담 예비절충) ◦ 1962 김종필(중앙정보부장)오히라(大平)메모 : 독도의 관리를 제3국 중재에 맡기자(김종필) vs 국제사법재판소에 맡기자(오히라)(1962. 11) 1950년대 이래의 독도분쟁은 한일간의 문제로 출발하지 않았다. 독도는 양국문제가 아니라 지역문제였으며, 역사적 영유권의 문제나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정치적 문제였다. 그 출발은 미국이 결정한 대일정책의 결과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이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패권적 지배력이 초래한 위력의 그림자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독도분쟁’은 1952년 1월 이승만의 평화선 발표 이후 일본이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해 ‘독도분쟁’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 전후 미ㆍ일관계에서 출발했다. 독도분쟁의 핵심 결정자는 한국ㆍ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미국은 독도문제와 관련해 편파적 결정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미국무부 당국자들 중 친일적 견해의 소유자가 적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태도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증거자료와 문서를 검토하고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재일한국인들을 공산주의자ㆍ범죄자로 무고해 한국의 연합국 지위 및 조약서명국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으며, 독도문제와 관련해 명백한 거짓정보와 자료들을 미국측에 제공했다. 광범위한 자료의 제출, 특히 미국이 전략적으로 필요로 하는 대답을 제공한 일본의 외교적 경험과 능력, 조직적인 로비, 친일적 인사들의 조력 등이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한국은 어떠한 외교경험, 외교자원, 우호적 견해의 조력자가 없었다. 미국ㆍ일본이 체득하고 있던 근대적 외교는 부재했다. 1951년 미국의 결정에 따라 독도문제를 포함한 전후 한일관계의 기본틀이 정해졌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한국령이 분명한 독도에 대해 문헌적 증빙과 설득력을 기준으로 일본의 입장을 선택함으로써,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판정했다. 이후 전개된 사태에 미국은 경악했다. 일본은 1905년, 1947년, 1951년에 이르는 시기 국가적 차원의 조작문서들을 생산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 과정에서 미국정부로 하여금 독도가 일본령임을 인정하게 만들었다고 확신했으며, 이를 토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준비된 도발자였고, 치밀한 계산과 예상 속에 책략을 구사했다. 한국은 위기와 충격의 파고를 넘어 버겁게 독도를 지켰다. 독도문제ㆍ한일관계에 있어 미국은 1950년대 중반까지 철저히 일본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독도문제가 한일관계 뿐만 아니라 한미, 미일관계를 폭발시킬 뇌관임이 드러나자, 미국은 곧 자신의 입장을 중립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결국 독도문제는 1950년대 국제정치로 포장된 미국의 외교적 결정이 파생시킨 뜻하지 않은 문제였으며, 일본에게는 수립되어 있던 계획의 실현이었고, 한국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논란에의 동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