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공개 파동 속에서 한일문제와 과거청산을 생각하며 홍 석 률(성신여대 교수) 1. 2005년, 거듭되는 기념일 2005년은 을사조약(1905) 체결 100주년이고, 해방(1945) 60주년이며, 한일협정 체결(1965)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는 각종 기념 학술회의와 사업 때문에 근현대사 연구자들에게 대단히 바쁜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렇듯 기념할 것이 많은 것은 단순히 중요 역사적 사건이 5로 끝나는 해에 발생했다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열어 놓은 것이고, 해방은 식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여, 한일협정은 한국이 독립한 후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한 것을 의미한다. 모두 한일관계와 관련이 있다. 세 개의 사건은 하나가 정리되고, 다음의 것이 오는 연결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세 문제 모두 하나도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그 청산 문제가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식민지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를 비롯한 식민지 유산들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 민족분단으로 말미암아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깔끔하게 근대 민족국가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일관계의 정상화(한일협정)도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명확한 반성과 배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여러 미해결의 쟁점을 남겨 놓고 있다. 세 가지 주년 모두 우리에게는 단순한 과거에 대한 기념이 될 수는 없고, 과거로부터 남은 현재 진행적인 문제를 청산하는 과제, 즉 과거청산의 문제와 결부되어 이야기되고 있다. 때문에 혹자는 2005년을 한일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고, 한일간의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어가는 원년으로 만들자고 한다. 한일문제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한국의 주류 언론은 한일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자고 촉구한다. 일본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그래서 축구를 하더라도 한일전은 꼭 이겨야 하는 차원의 한일감정이 문제라고 한다. 최근 사학계에서도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론이 일고 있다. 물론 감정이나 민족주의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이를 경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개선해야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한일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민족문제나 민족감정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보다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해 있다. 이는 인권의 문제이며,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규정하는 민주주의 문제이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국제질서의 문제이다. 민족주의와 민족감정에 대한 비판론이 이와 결부된 현실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될 일이다. 한일문제와 관련된 제반 쟁점들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의 관계라는 차원에서만 접근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보다 다양하고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와 결부시켜 보다 종합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2. 문서공개 파동과 국가와 시민 일제 식민 통치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군인으로, 노동자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피해자 및 피해자 단체들은 국제적 선례에 힘입어 일본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개별적인 배상을 받기 위해 소송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소송과정에서 한일협정으로 양국 사이의 청구권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는 논리가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피해자와 관련 단체들은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을 하고, 관련 문서의 공개를 위해 소송을 전개하였다. 법원은 문서공개가 필요하다고 판결했고, 한국정부는 원래 항소를 추진했지만 다시 이를 포기하고, 2005년 1월 17일 일부 문서를 공개했다. 언론들은 공개된 문서를 특유의 선정성을 발휘하여 보도했다. 언론이 보도했던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다. 한국정부는 한일회담 과정에서 징용, 징병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일본정부가 개인들에게 개별적으로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정부에 일괄보상할 것을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동원되었던 사람들의 숫자를 103만 2천 684명으로 잡고, 총 3억 6천 400만 달러를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 부상자는 2,000달러를 요구한 것이었다. 한일협정은 주지하다시피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이 경제협력 자금인지, 아니면 청구권 자금인지에 대해서는 양국 사이에 협정 타결 시점까지 논란이 계속되었다. 한일협정에는 일본이 제공한 돈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한국과 일본 사이에 모든 청구권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한다고 명시되었다. 한국정부는 1971년 징용, 징병 등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신청을 10개월 동안 받고, 1975년에서 1977년까지 인명보상의 경우 8천 522명에게 25억 6천 560만원을, 재산보상은 7만 4천 967명에게 66억 2천 209만 3천원을 보상했다. 보상금의 기준은 사상자 1인당 30만원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보상이 이루어진 1975년의 환율이 달러 당 484원임을 감안해 볼 때, 사망자 1인당 622달러에 불과한 금액이다. 이는 한국 정부가 애초 주장했던 사망자 1인당 1천 650달러의 보상과 커다란 격차가 있다.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받은 자금의 오직 9.8% 정도만 피해보상에 사용했고, 나머지는 모두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등 경제개발에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정부가 징용, 징병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내세워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보상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공개된 문서는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당시 한일협정에 임하는 박정희 정권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치를 했던 군사독재정권이었다. 독재정권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정부가 시민의 의사와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 과정에서 일본 지배집단과 유착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여 권력유지를 도모한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최근 공개된 미국 CIA 문서는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아마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probably well founded)고 하면서 일본기업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으며, 6개 일본 기업이 한 기업 당 백만 달러에서 2천 만 달러까지 총 6천 6백만불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했다. 일부 보수 정치인과 언론은 한일협정 당시에는 나라가 가난했고, 경제개발을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적 권리가 불가피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대적 한계나 경제개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차원의 문제라 하기 어렵다. 당시 국가권력의 성격이 보다 민주적이었다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문제가 결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형식적인 보상이 시작된 1975년의 시점은 유신체제기였다. 피해자들은 불만이 있었을 것이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군림하는 국가 권력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들의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고, 처리되었는지 알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이 피해자 보상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한국 정부의 책임이고, 한국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 주류 언론의 보도는 문제가 있다. 최근 공개된 한일회담 관련 문서들은 전체 문서 중에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는 문서라고 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문서만을 갖고, 사실관계를 너무 단순화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올해 8월 15일로 예정된 추가적인 문서공개를 지켜보며 보다 면밀하게 사실 관계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정부도 물론 책임을 져야 될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기업의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크게 경계할 일이다. 한일협정에 모든 청구권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한다는 구절이 있지만 이는 피해자 개인들이 보상 받을 수 있는 권리 자체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1965년 11월 일본 의회에서 협정에 서명한 시이나 외상은 이 구절을 한국 정부가 외교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고, 1995년 한국의 공로명 외무장관도 국회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청구권에 대해서는 정부가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개인들의 청구권은 개인의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가 완전히 이를 양도하거나 폐지시킬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나아가 피해자 개인의 배상 문제는 재산 손실에 대한 청구권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동원, 일본군 성노예, 원폭 피해자 문제, 사할린 억류자 문제 등 인권과 관련된 문제이다. 인권침해 범죄에 대해서는 국가가 어떤 협약으로도 자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가 이미 일본과 청구권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합의했으니 정부가 책임지고 피해자들에게 추가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시 시민을 국가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태도나 일부 문서가 공개된 이후 이를 보도하는 주류 언론의 태도나 모두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보는 기본 관념은 여전히 국가의 부속물로서의 시민, 시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국가 경제개발을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이야기도 성장주의와 결합한 국가주의 논리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한편 문서공개 파동을 보면서 최근 민족주의 비판론이 대두되면서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 비판론자들은 식민지로부터의 독립, 민족의 통일 같은 것을 국가적 문제로 보고, 이러한 것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시민의 일상의 영역을 강조한다. 그러나 금번 사태에도 드러나듯 한일회담이라는 국가와 국가 차원의 문제는 피해자들의 시민적 권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식민지는 독립운동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았던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남겨주었다. 시민의 권리는 시민을 국가로부터 분리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재편성함으로써, 즉 국가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 과정에서 확보될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의 국가권력의 속성이 과거 식민지 권력이나 독재정권과 똑같은 상태로 지속되었다면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는 지금도 묻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쟁점화 될 수 있는 것 자체가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던 민족해방운동과 억압적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단지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배제하고, 시민의 일상의 영역을 분리시켜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식민지 시기와 독재정권기 국가와 시민의 잘못된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점을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한일관계에서 제기되는 제반 문제는 단지 한국과 일본 두 민족국가 사이의 문제나 민족주의 감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는 인권의 문제가 내재해 있고, 국가와 시민의 관계라는 문제가 내재해 있다. 나아가 이는 단지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차원의 국제관계가 개입되어 있으며, 남북 분단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3. 한일문제와 국제관계, 남북관계 한국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과정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나타나듯 단지 두 국가 사이의 관계로만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주변 강대국의 역학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일회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일회담은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이 여기에 강력하게 개입되어 있었다. 한일회담이 식민지배의 부당성과 배상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마무리된 것은 실질적으로 전후 냉전이라는 국제질서와 그 주도자였던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정부는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와 시설 중에 1930년대 수준의 기본적인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전쟁 배상으로 충당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배상정책이 실행되었다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전범들을 국가의 재앙을 가져온 인물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정책은 아시아의 자본주의와 반공진영을 이끌 견인차로써 일본을 육성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은 처음에는 전쟁배상이 전혀 없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시도했지만, 관계국이 반발하여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청구권 문제를 일본과 관계 각국 사이의 쌍무협상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규정하였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국으로 참여하려 했고, 미국도 이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한국은 교전국가가 아니라는 일본의 주장과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영국의 방해 때문에 서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자본주의는 부흥하고, 반공기지로서의 역할도 강화되었다. 경제적으로 부강해진 일본과 아시아 관계 각국이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상을 할 때 일본의 입지는 그만큼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냉전이 형성한 국제관계의 기본 틀은 한국에는 불리하고, 일본에게는 유리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정부는 한일회담 과정에서 엄정 중립을 표방하였지만, 여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아시아 정책과 냉전정책의 연장선에서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강조했고,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에게 압력을 넣었다. 미국의 압력은 양자 모두에게 가해졌지만 실질적으로 그 압력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사와 경제 모든 측면에서 미국에 크게 의존했던 한국이었다. 한국에 분단국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남한이 반공 전초기지로 강화하는 과정은 애초부터 아시아 반공진영의 중심축인 일본을 방위한다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적극 추동했던 세력은 극우적인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한일 관계개선으로 한국이 반공기지로 강화되어야 일본의 안보가 확보될 수 있다는 반공, 안보논리를 주로 내세웠다. 반면 일본의 사회당과 진보적 인사들은 한일협정이 한국의 분단을 고정화하고, 한ㆍ미ㆍ일 군사동맹 구조를 정착함에 따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북한도 한일 관계개선 문제를 경제개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ㆍ미ㆍ일 삼각 군사동맹의 형성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이에 한일협정이 타결된 1960년대 후반기부터 경제ㆍ국방 병진 노선을 내세우며 군비를 확충하고, 베트남전쟁과도 관련되어 남한에 대한 무력 공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한일협정은 애초부터 이렇듯 한국의 분단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 하에 전개되었다. 냉전과 한국의 분단은 한일협정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 및 피해보상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반공진영의 결속이라는 명분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피해보상의 요구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나아가 민족 분단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정부는 원래 한일회담 때 대한민국이 전체 한반도를 대표하며, 북한 주민이 입은 피해도 한국정부가 모두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일본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한 주민에 대한 피해 보상 문제는 북한과 일본의 수교 과정에서 다시 거론될 수밖에 없다. 북일 관계개선 움직임이 본격화된 1990년 가네마루 자민당 부총재의 평양 방문 때 일본측은 사죄와 배상문제를 언급하고, 식민통치기의 손실은 물론이고, 이러한 손실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함으로써 파생된 1945년 이후 45년간의 손실에 대해서도 보상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정부차원의 교섭에서 일본 정부의 태도는 한일합방 조약은 합법적으로 맺어진 것이라고 강변하는 등 이전의 남한과 회담을 벌일 때와 크게 다름없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는 문제는 남북한 간의 공조가 가능하고,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2004년 2월 국회는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정부차원의 기구로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2005년 2월 1일부터 피해 신고 및 진상조사 신청 접수를 시작하였다. 북한에서도 이러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고, 따라서 강제동원 피해 조사는 남북의 공조가 가능하고, 필요한 사업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흔히 일제하 강제동원하면 한국인들이 일본이나 해외로 끌려간 것만 생각하지만, 한반도 북부 지역의 공장이나 탄광 또는 제주도 등 국내 다른 지역으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 실태를 제대로 조사하기 위해서는 남북 공조가 필수적이다. 적절한 수준에서 남북이 공조하며 진상규명을 할 수 있다면, 이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남북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과거 청산과 단열화(斷裂化), 파편화의 극복 을사조약 100주년, 한일협정 40주년이 되는 올해 벽두부터 정부의 한일회담 문서 공개로 인해 한일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올해에는 본격적으로 친일 진상규명에 대한 작업이 시작될 것이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독재정권기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규명 등 이른바 과거청산 문제가 계속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할 것이다. 올 해 8월 15일 추가적인 한일회담 문서가 공개될 예정이고, 국정원과 경찰도 독재정권기 인권침해에 대해 자체 진상규명 작업을 하고 있으니 여러 은폐된 사실들이 공개될 것이다. 은폐되었던 사실이 드러나고, 공개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단편적인 사실들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또한 미래의 문제해결을 위한 맥락에서 제대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이 잘 되어야 최근 한일회담 문서공개 파동에서 한국 주류 언론들이 보여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직접적으로는 근현대사 연구의 축적이 필요한데, 아직 충분한 연구를 축적했다고 자신할 수 없어 안타까움이 있다. 과거 청산 문제에 대해 역사학계에도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과거가 어떻게 청산되느냐는 차원에서 이러한 용어 사용 자체가 너무 비역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는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아왔던 경험과 삶의 조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극지에 사는 한 에스키모 종족은 서로 다른 종류의 눈을 표현하는 11개의 단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 11개의 다른 종류의 눈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눈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다고 한다. 수시로 내리는 눈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눈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청산 이라는 용어를 접목시킨 우리의 용어 사용은 물론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와 고통을 주었던 과거의 일이 진상규명도, 가해자 처벌도, 보상도 없이 냉전과 분단 속에서 그냥 묻혀 지나왔던 우리의 과거를 돌아 볼 때 사람들이 왜 과거를 청산하려 하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불행했던 과거를 제대로 마무리 짓는 작업은 인간의 삶과 인간 사회의 총체적 흐름에 대한 인식, 즉 역사의식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사 문제는 범죄 사실을 확정하고, 손실을 계산하며, 조약을 개정 또는 수정하는 기능적 차원의 법률, 행정, 외교적 조치만으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이는 역사적인 연구 차원의 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불행했던 일이 왜 일어났고, 왜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원인규명이 필요하다. 과거사 문제를 이야기 할 때마다 나오는 반성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상황을 제대로 복구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차원의 법률, 행정, 외교적 조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20세기 수많은 인간을 희생으로 내몰았던 전쟁, 대량학살, 제국주의, 파시즘, 냉전에 대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성찰과 극복을 의미할 것이다. 역사가는 인간과 사회를 보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강창일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경험 때문에 한국사회에 만연한 단열화(斷裂化)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단열이란 분열과는 다른 차원의 파편화되는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사회구조가 통합성과 정합성을 상실하여 단층화되는 양상을 의미한다. 즉 식민지 사회는 그 질서가 내부적인 토대를 갖고, 추동되거나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이중구조화, 경제 각 부문의 비접합성, 비자립적 개인의 존재 등이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는 사람들의 사고에도 반영되어 개인과 사회 및 국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고 파편화시켜 사고하거나 보편적인 정의와 가치를 배제한 채 극단적인 법 논리, 경제논리, 실용주의 논리를 전개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과거청산을 위한 운동 과정에도 일부 피해자 단체, 내지는 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전반적인 사회와 역사의 발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만을 특화시키고, 고립시켜 전반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데 장애를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인간과 사회를 보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불행했던 과거사를 청산하는 작업은 이와 같은 단열화, 파편화를 극복하고,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점을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종합적인 시각을 확보하고 함양하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작업은 이와 같은 사고와 안목을 함양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하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전공시기와 상관없이 여기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