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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추모사업의 현황과 과제

BoardLang.text_date 2004.09.07 작성자 한상권
안중근 추모사업의 현황과 과제

한상권(중세사 2분과)

 

1. 서세원, 영화 ‘도마 안중근‘으로 연예계 복귀


 

 방송사 PD 등에게 홍보비 명목으로 돈을 건네고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지난 해 기소되어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연예계를 떠났던 개그맨 겸 MC 서세원(48)이 영화 ‘도마 안중근‘의 연출을 맡아 화제다. 서세원은 총 6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도마 『안중근』의 각본, 감독, 기획을 맡았다고 한다. 지난 8월 29일에는,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한일합방' 조약이 조인된 날을 '국치일'로 정하자고 촉구하는 집회가 서울 중구 정동 중명전 앞에서 열렸는데, 이날 국치일 복원 촉구대회 2부 행사로 오는 9월 10일에 개봉 예정인 영화 <도마 안중근>(감독 서세원, 제작 소스원프로뎍션) 무료 시사회가 정동극장에서 열렸다고 한다. 이 영화를 제작, 감독한 서세원씨는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똑같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관객들이) 지금껏 (제가) 살아온 날들이 연상하면 좋지 않은 말씀들을 하겠지만 묵묵히 받아들이고 영화는 저 개인을 떠나 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서씨는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국을 바라보며 '조국과 통일'에 대한 생각과 스스로 반성을 하면서 지냈다"며 "나이 50살이 돼서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게 됐는데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좋은 일을 통해 큰 일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서세원 감독의 바램과는 달리 영화 <도마 안중근>을 보는 주위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김용필 영화칼럼니스트는 <해결사로 전락해 버린 안중근 의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도마 안중근>을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개그맨 서세원이 스크린에 담는다고 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아니나다를까 우려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 일제의 만행과 당시 우리 백성들이 처한 현실의 나열만 있을 뿐 거사를 앞둔 안중근 의사의 고뇌를 찾아볼 수 없다. 이쯤 되면 영화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경의의 표시보다 민족적 울분을 이용해 얄팍한 상술에 기대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이 교리를 저버리면서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 살생을 금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어겨 제명까지 당한 안중근의 고뇌에 찬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곧 영화를 준비하는 사람이 안중근에 대한 고뇌가 없었다는 얘기다. 『도마 안중근』이란 제목이 무색해지는 상황이다. … 감옥에서 보여준 안중근의 의연한 모습에 당시 검찰관이 감화될 정도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일화만 차용했을 뿐 안중근이 어떻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는가는 없다. …안중근은 당시 명사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 일화에 착안한 탓인지 안중근의 품속에는 권총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마치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쌍권총을 휘둘러대는 안중근의 모습을 보노라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 마치 준비된 해결사처럼 보인다. 동양의 신성(神聖)으로 불리는 안중근이 하루아침에 킬러로 돌변해버린 상황. 안중근 의사는 "인간은 두 번 죽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안중근 의사를 두 번 죽이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야말로 서세원 감독이 자신의 상업적 재기를 위해 안중근 의사를 저격한 꼴이 되고 말았다. …『도마 안중근』은 진정성 없이 단순히 상업성에만 목적을 둔다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얻게 되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경향신문, 2004.8.17)

  전문가들은 영화 <도마 안중근> 이 역사적 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의사 안중근을 폭력배 김두한 수준으로 격하시켰다고 분개하고 있다.

 

2. 친일․독재세력이 장악한 안중근 추모사업

 1946년 3월 26일,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안중근 의사 순국 36주기 추도행사가 서울 공설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안중근과 하얼빈거사를 함께 하였던 우덕순과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진, 김창숙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하고 군중 10만여명 운집한 가운데 천주교 합창단의 추모가 제창과 함께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모열기는 슬그머니 사그러들고 어느새 친일․독재세력이 추모사업을 독차지하였다.


  먼저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제작 경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안의사 동상건립사업은 1956년 여름, 3.1 독립운동 33인중의 한 사람인 이명룡(李明龍: 1873-1956)이 기성회장이 되어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으로 이 해 11월 신임이사장으로 일본군 대좌출신 김석원(金山錫源:예비역소장, 성남중고등학교장)이 선출되었으며, 동상건립은 1958년 11월 11일 기공, 익년 5월 23일 제막식을 가졌다. 안중근 동상 제작을 의뢰받은 이는 친일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1915-1992)이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이른바 '시국색'을 띠는 작품으로 잇달아 수상하여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조선총독부 주최)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8․15해방 직후 '친일 부역자 미술가'로 꼽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김기창(金基昶), 심형구(沈亨球), 윤효중과 함께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김경승은 이승만 정권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 상(충무, 1953, 부산, 1955), 안중근 상(서울, 1959)을,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4․19학생의 의거 기념탑', 김구 상, 안창호 상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전두환(全斗煥) 군사 독재 시절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전두환이 같은 성씨라는 이유 때문에 1984년 동학농민전쟁 전적지에 세운 황토현 기념관 뒤의 전봉준 동상과 그 좌우의 농민전쟁 모습을 '돋을 새김'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안중근 동상명(銅像銘)에는 ‘여기 세운 안중근의사의 동상은 정기의 상징‘이라고 쓰여져 있다. 일신의 영달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인생을 산 친일부역자가 민족정기의 표상인 안의사 동상을 제작하였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더욱 기가막힌 사실은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충절을 추앙하여 민족정기를 국내외에 선양함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다는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의 인적 구성이다. [안중근의사 숭모회]는 1963년 12월 이은상, 윤치영, 우덕순, 김양선 등이 설립을 발기하여 문공부의 승인을 받아, 윤치영 당시 서울시장이 숭모회 초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일제시대 이동치영(伊東致映)으로 창씨한 윤치영은 1941년 8월에 발기한 [임전대책협의회]의 회원이 되어 “우리는 황국신민으로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제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로 후방에서 투쟁하였다. 19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우리 조선청년을 영광스러운 일본 해군의 자랑스러운 대열로 받아들인 데 대하여 제국 정부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학병제도가 실시되자 “파격의 영광인데 어찌 주저할소냐.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 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고 말하였다. 1945년 4월 일제가 그를 칙선 귀족원으로 선출하여, 남작의 작위를 받은 부친 윤영렬(尹英烈)에 이어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하여 조선 내 7인의 일본 귀족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처벌은커녕 출세가도를 달려 이승만 비서실장(1945-48), 내무부장관(1948), 국회부의장(1948, 52)서울시장(1963), 자유당 공화당 5선 국회의원(1948-71), 5공 국정자문위원(1981) 등을 역임하였다. 숭모회 초대회장과 3대회장을 역임한 윤치영은 일제시대에는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한 전쟁범죄자이었으며, 해방후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권력을 번갈아 섬기면서 ‘잘 먹고 살 산자’의 표본이었다.



숭모회 2대 회장인 이은상은 국민 각계의 성금과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1970년 10월 26일 서울 남산공원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79년 9월 2일 안중근의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안중근의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 건의서를 올려, “안중근 의사의 위격(位格)을 이 충무공과 동격으로 높이는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라는 재가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이 해 박정희 대통령이 ‘民族正氣의 殿堂’라는 휘호를 내려 10월 26일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서 석비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박 대통령이 삽교천으로 행선을 변경하고 동일 서거하였기에 석비 제막식은 이듬해 3월 26일 거행되었다. 윤치영과 이은상 이후의 역대 숭모회 이사장은 최태섭(한국유리 회장), 정원식(문교부장관, 국무총리), 노신영(안기부장관, 국무총리, 민정당 고문)으로 이어졌으며, 현재 이사장은 황인성(민정당 국회의원, 국무총리), 부이사장은 안응모(치안본부장, 안기부 1, 2차장, 내무부장관, 자유총연맹총재)이다. 실업가 출신인 최태섭을 제외하고, 숭모회 역대 이사장들은 한결같이 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 계열의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안기부장관, 국무총리 등을 지낸 수구․냉전세력으로 국민의 자유과 인권을 짓밟는데 앞장서 왔던 인물들이다. 안중근 동상명(銅像銘)에 새겨진 ‘자유의 봉화’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숭모회는 안중근의 상징인 ‘민족정기나 자유’와는 거리가 먼, 친일․독재 세력의 총집결지임을 알 수 있다.


3. 안중근 추모사업, 어떻게 할 것인가

안중근 추모사업 현황이 이러할진대, 서세원 감독이 ‘안중근을 조폭 해결사 수준’으로 비하시켰다고 비난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다. 님즈웨일즈의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 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식민지시기 안중근은 중국과 조선을 막론하고 항일운동가들에게 패배주의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었다. 이제 그의 항일 독립운동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일은 민족정기 확립을 위해서는 물론 올바른 국민교육과 민족통일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안중근이 교육․식산운동과 의병전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하고자 하였던 자주독립정신, 민권과 자유가 신장되는 사회 건설을 위해 부패한 봉건국가권력과 부당한 종교권위에 맞서 항거하였던 정의로움, 죽는 순간까지『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대한독립이 동양평화의 근본임을 밝히고자 하였던 평화정신은 오늘날 민족, 민주, 통일 정신으로 창조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국권 침탈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정신은 식민지잔재 청산과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로, 민권자유의 신장에 바탕을 둔 사회정의는 국가권력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으로, 동양평화사상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화해와 민족공조로,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연대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5년후면 안중근의 하얼빈의거 100주년이 된다. 연구자들은 안중근 정신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학술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일을 제일 먼저 시급하다. 현재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등의 전집은 발간되었으나 안중근은 아직 전집조차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위해 안중근 공판과 관련된 인물, 즉 통역관, 전리, 고급신문관들의 주변을 조사해야 하며, 세계 각국의 언론보도, 여순 법원과 본국 정부와의 내부 보고 문서, 전보 등을 종합적으로 수집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안중근의 유묵을 수집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를 하는 일도 시급하다. 박은식에 의하면 안중근의 유묵은 200점 정도가 된다고 하나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약 60점 정도에 불과하다. 



안중근을 우리 시대에 부활시키려면, 먼저 연구자들이 안의사의 시대정신을 오늘에 맞게 재해석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교육자들은 이를 국민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예술가들은 국민 정서로 승화시켜 국민 가슴속에 안의사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서세원 감독의 영화 <도마 안중근>이 우리 학계의 빈약한 안중근 연구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